월간참여사회 2005년 03월 2005-03-01   839

인디(indi) 미디어를 향해

사회, 문화적 특성위에서 전반적인 사회를 개선 및 발전시키고자 시민사회단체는 온·오프라인 매체를 발행한다. 매체 발행은 시민들간 의사소통공간이 확보되고, 이를 통해 전반적인 사회 개선 및 발전시키고자 하는 운동방법의 하나이다. 각 시민단체 환경에 따라 매체 발행의 의미는 다르지만, 각각의 특성 및 한계와 가능성에 대해 들어 보았다. 편집자주

안수찬 <한겨레> 문화부 기자 ahn@hani.co.kr

그게 언제였나. 한참을 생각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더듬었다. 그리고 오늘을 생각했다. 참으로 모처럼 있는 일이었다. 30대 중반에 이른 삶의 장면들을 종과 횡으로 되돌아봤다.

한 편의 영화 때문이었다. 소일거리로 비디오 테이프를 하나 빌렸다. <비포 선 셋>. 은근한 기대는 했지만 의외였다. 그렇게 많은 ‘기억의 그물’을 던질 것이라고 미처 예상치 못했다.

10년 전에 나온 <비포 선 라이즈>와 잇닿아 끝없는 의미의 파동을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그 두 영화에 나란히 출연한 남자 주인공은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 그 때와 오늘의 ‘영화’를 비교하며, 그 때와 오늘의 ‘나’를 비교했다. 동시에 ‘그 때’의 내가 그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를 더듬고, ‘오늘’ 내가 이 영화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살폈다.

이 영화의 감동은 영화라는 텍스트 ‘안’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 텍스트 ‘밖’에 있는 내가 반추하는 숱한 오버랩이 텍스트와 다시 한번 겹쳐졌다. 그렇게 텍스트 밖의 ‘나’는 텍스트 안의 ‘그’에게 기억을 투영시키고, 그 기억은 다시 ‘그’의 대사를 거쳐 ‘나’에게 전달됐다. 호수 중심과 밖에서 동시에 번지며 끝없이 상승되는 파문(波紋)!

‘말’의 힘, ‘텍스트’의 힘

여기서 영화 평을 늘어놓을 능력이 내겐 없다. 『참여사회』 100호의 의미를 가늠하는 지면에 난데없이 영화 이야기부터 풀어놓은 까닭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영화는 ‘미디어’, 특히 출판(활자) 미디어의 생명력에 대한 많은 영감을 줬다.

1시간 30분 여 동안 그 영화는 그저 ‘말’만 늘어놓았다. 등장인물은 사실상 두 명의 남녀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치지도 않고,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쉼 없이, 서로 말만 한다. 그 대사를 다 어떻게 외웠는지 경탄스러울 지경이다. 특별한 사건이라 할 만한 건, 그저 그들이 10년 만에 파리에서 다시 만났다는 사실뿐이다. 카메라는 어떤 흔들림도 없이 두 남녀만 줄기차게 따라다닌다. 여기에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 풍부하고 깊은 의미지평을 전달했다. 그게 순전히 나만의 개인적이고 특수한 경험이나 평가는 아닐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호의적 영화평론과 관객들의 나쁘지 않은 반응이 그 근거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이 영화의 힘은 무엇인가. 그 원천은 무엇인가.

영상과 활자라는 형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포 선 셋>은 ‘텍스트 중심’의 전략을 택했다는 점에서 <뉴욕타임즈>나 <르몽드>, <가디언>의 지면과 비슷하다. 요즘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매체들의 지면은 참 한심스럽다. 줄곧 텍스트 뿐이다.

눈길을 모으는 편집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 간략하고 무미건조한 기사 제목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다. 사진은 거의 없고, 그 흔한 그래픽도 찾기 힘들다.

10년 전, 영국에 잠시 머물던 때의 일이다. <가디언>에 축구평론가의 글이 하나 실렸다.

유로컵 대회와 관련한 잉글랜드 대표팀에 대한 기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한 꼭지의 평론이 지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글의 첫머리에 달린 엄지손톱 만한 필자 사진을 제외하면 흔한 일러스트 그림 하나 없었다. 가끔 연극 평론이 그런 식으로 실리곤 했는데, 지식인들이 즐겨 읽을 법한 연극칼럼이야 그렇다 치지만 축구까지는 좀 심하다 싶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저녁, 런던 외곽의 동네 선술집에서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한 중하층 노동자가 <가디언>의 바로 그 축구평론을 화제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축구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주변에 둘러서서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 대충 들어보니, 그 평론기사를 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평론기사에 대한 평론으로 시작한 논쟁은 잉글랜드 대표팀에 대한 그들 나름의 평론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 논쟁에서 이긴 사람이건 진 사람이건, 다음주에 나올 <가디언>의 축구평론을 기꺼이 읽을 것이 분명했다. <가디언>의 힘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미디어 역할은 중개와 전달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미디어’의 힘이었다. 미디어는 중개다. 이 쪽과 저 쪽의 이야기를 전하고 이어주는 노릇을 한다. 그 본질은 텍스트일 수밖에 없다. 이야기는 이미지로 대체될 수 없다. 이미지를 원용할 수는 있지만, 그 핵심은 서사다. 그래서 미디어가 다루는 거의 모든 텍스트는 역사적(historic)인 것이다. 어제의 맥락에서 오늘을 말하거나, 미래의 관점에서 오늘을 톺아본다. 동시에 그것은 다중(多衆)적이다. 심지어 단 한사람의 이야기를 옮겨 담는 칼럼이라 할지라도, 다중이 형성한 사회와 역사의 한 단면을 반영할 때에서야 비로소 생명력을 갖는다. 당연하게도 이런 이야기를 소비하는 주체 또한 다중이다.

문제는 기억과 의미 지평의 맥락에서 무수한 다중을 또 다른 무수한 다중과 중개하는 미디어가 ‘읽히는’ 방식이다. 미디어의 중개벨트에 올려진 어떤 텍스트는 한없이 지루하다. 또 다른 텍스트는 놀랍도록 흥미진진하다. 어떤 사람에겐 아무 의미 없는 텍스트가 다른 사람에겐 귀중한 가치로 다가온다. 여기에 보편타당한 패턴은 없다.

이 대목에서 ‘매체전략’이 등장한다. 어떻게 하면 텍스트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읽히게’ 할 것인가. 이를 둘러싼 판단과 논쟁이 모든 매체의 ‘좌표설정’의 핵심이다. 당연하게도 ‘중개’와 ‘전달’이라는 미디어의 핵심 가치는 보다 많은 다중과 접촉면을 갖는 데 있다. 이는 상업성을 따지기 이전의 문제다. 소수의 독자로 배부를 매체는 없다. 영리를 추구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크게 보아 매체전략은 두 가지다. 먼저 텍스트의 완결성을 높이는 일이다. 넘쳐나는 텍스트 가운데 독보적인 품질을 갖춘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이다. 미디어들이 기획, 심층 취재를 강화하는 흐름이 이와 관련돼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텍스트의 흡인력을 높이는 것이다. 한 눈에 확 들어오는 텍스트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텍스트 자체보다 이를 ‘디자인’하는 힘에 의존하는 방법이다. 이 과정에서 편집 등의 이미지 장치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비포 선 셋>이 놀라운 이유는 두드러져 보이는 이미지 전략 없이도 높은 밀도를 가진 텍스트를 별 무리 없이 다중에게 전달했다는 데 있다. 이는 이미지 디자인을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싶은 ‘텍스트 생산자’들에겐 한없는 유혹이다. 텍스트 생산자들은 생래적으로 ‘서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미지는 곧잘 서사의 올바른 이해를 막거나 왜곡하는 마약성 진통제로 이해된다. 손이 많이 가는 편집 작업 없이 맘 편하게 글만 늘어놓고 싶은 충동은 이들의 직업병이다.

『참여사회』에 부족한 2%

『참여사회』는 그런 직업병을 대단히 솔직하게 드러내는 미디어다. 지루하다는 이야기다. 두 가지 매체전략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고급스런 편집은 여기에 없다. 그렇다고 텍스트 중심의 전략을 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심층성 강화를 위해 취재 인력을 늘리거나 재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전문적’이라 할 만한 글이 간혹 있지만, 결코 ‘심층적’이지는 않다. 그 필자의 대부분은 기성 언론이 비슷한 주제를 다룰 때 자주 등장시키는 기고자이거나 인용대상자다.

『참여사회』의 생산자들(기자와 편집자들)은 -대단히 실례되는 말이겠지만- 다른 미디어 생산자를 꿈꾸거나 참여연대 내부에서 부서를 옮겨 조금 색다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정도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참여사회』기자의 모델이 없는 한, 『참여사회』의 텍스트는 언제나 2% 부족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신문기자, 방송기자, 인터넷 언론 기자란 말은 있지만, 시민단체 매체 기자란 말은 없다. 『참여사회』는 언제나 참여연대를 통해 설명되는 ‘미디어’다. 세상을 중개하는 하나의 미디어가 소속 단체의 ‘중개’를 통하지 않고는 자기완결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불행일까, 행운일까.

텍스트의 완결성으로 승부하는 <인권하루소식>

잠시 눈을 돌려 다른 시민단체들이 생산하는 매체를 살펴본다. ‘내부자’가 아닌 바깥 사람들에게도 그 이름이 알려진 매체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참여사회』를 비롯해 <함께 사는 길>(환경운동연합) <인권하루소식>(인권운동사랑방) <월간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운동연합)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매체는 <인권하루소식>이다. 여러 면에서 ‘텍스트 중심’의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현한 이 매체는 오랫동안 여러 쟁점의 ‘진앙지’ 역할을 했다. 인권문제를 특화시키는 매체전략으로 성공했다. 오직 <인권하루소식>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과거 사회부 기자 시절, <인권하루소식>은 각 경찰서가 제공하는 ‘일일 집회시위 예정 목록’과 함께 아침마다 꼭 챙겨봐야 하는 ‘취재소스’였다. <인권하루소식>은 인권운동사랑방이라는 인권단체와 인권에 관심 있는 회원들을 ‘중개’하고, 인권탄압을 받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기성 미디어를 통해 세상과 ‘중개’시켰다. 이 순환과정은 인권운동사랑방이라는 단체와 <인권하루소식>이라는 매체의 가치를 동시에 높였다. 이 둘은 이제 어느 쪽이 ‘주어’랄 것도 없이 서로를 설명하는 ‘서술어’가 됐다.

그래서 <인권하루소식>이 팩스 형태의 발행을 중단하고 인터넷 서비스에만 주력한다는 이야기가 기성 언론에게는 ‘뉴스거리’가 되고, 세상 사람들에겐 ‘기억과 의미의 그물’이 된다.

기억컨대 서준식 선생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을 정리할 때와 비슷한 정도의 관심으로 기성 언론이 보도했다. 그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인권, 인권운동사랑방, 또는 <인권하루소식>과 연관된 자신의 어떤 ‘기억’을 끝없이 반추했을 터이다.

그런 점에서 『참여사회』는 주어가 아니다. 참여연대는 『참여사회』라는 매체를 생산한다. 참여연대의 후광은 『참여사회』를 덮는다. 심지어는 서술어조차 아닐 때도 있다. 『참여사회』를 봐도 참여연대가 요즘 뭘 하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참여사회』는 세상의 어떤 부분은커녕, 참여연대조차 잘 설명하지 못하는 듯 하다.

텍스트의 흡인력을 강화시킨 인터넷 언론

<인권하루소식>이 텍스트의 완결성을 갖추는 전략의 성공사례라면, 이른바 ‘대안(alternative) 매체’라 불리는 인터넷 언론은 텍스트의 흡인력을 높인 사례다.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딴지일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언론이 ‘대안’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들 매체는 무엇에 대한 대안이었나? 바로 서사와 이념을 전달하려는 ‘텍스트 강박주의자’들이 좀처럼 가질 수 없었던 ‘다중과의 폭넓은 접촉면’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너도나도 인터넷 매체를 꿈꾸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 깊게 볼 대목이 있다. 인터넷 미디어들이 최근 들어 ‘회고적’이거나 ‘개인적’인 기사들을 부쩍 많이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텍스트의 흡인력으로 끌어안은 다중들 앞에 내놓을 ‘텍스트’ (또는 텍스트의 완결성을 높이는 능력) 자체가 일정한 한계에 부딪혔음을 드러내는 상징적 현상이다. 이들 매체는 (아마도 <프레시안>은 다소 예외라고 해야겠지만) 공공이 일시에 주목하는 텍스트 대신, 소수가 음미하는 개별적 텍스트를 중심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혹자는 이런 텍스트의 ‘개별화’ 현상이 기성 언론의 틈새를 노리는 진정한 매체전략이라고 주장하겠지만, 문제는 이런 변화가 정확히 인터넷 전반의 역할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포털 사이트의 서비스가 제공하는 텍스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도시 외곽에 가꾸는 나만의 주말농장 체험기는 굳이 인터넷 대안매체가 아니라도 쉽게 ‘다중’과 만날 수 있다.

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이런 개별적 이야기 묶음으로 지탱되는 흡인력만으론 인터넷 매체를 더 이상 ‘대안’으로 평가하기 힘들다. 기성 언론은 단지 ‘거대 텍스트’를 생산했기 때문에 대안과 극복의 대상이 됐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산하는 텍스트 자체에 문제가 많았던 것이다. 인터넷 미디어의 성공은 ‘작은 텍스트’를 생산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성 언론이 다루지 않는 ‘전혀 다른 거대 텍스트’를 세상에 중개한 데 있었다.

『참여사회』는 참여연대라는 미디어의 또 다른 미디어

당연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매체전략의 기본은 텍스트의 완결성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흡인력’을 어떤 장치와 경로를 통해 높일 것인지도 중요하지만, 이를 기본으로 고민하는 한 매체의 좌표는 모호하다. 그 매체의 기자들은 끝끝내 어영부영하다 볼일 다 본다.

그런 점에서 앞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감히 내놓을 수 있다. 『참여사회』가 참여연대를 거쳐야만 설명되는 일은 이 매체에겐 ‘행운’이다. 적어도 지금까진 그러하다.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 자체가 나름의 흡인력을 확보하고, 풍부한 텍스트를 생산하며, 다중을 상대로 이를 중개하는 성공적인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참여연대에는 『참여사회』라는 미디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참여연대가 곧 미디어다. 이는 『참여사회』 생산자의 고민과 수고를 상당 부분 덜어준다.

지령 100호를 맞은 『참여사회』의 고민은 아마도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를 중개하는 훌륭한 미디어인 참여연대의 성공은 아직 『참여사회』로 옮겨오지 못했다.

여기에 인권운동사랑방 못지 않은 참여연대가, <인권하루소식>못지 않은 『참여사회』를 발간하지 못하는 현실이 있다.

『참여사회』가 참여연대를 이끄는 주어가 되기를 바라며

아마도 이는 ‘의미와 기억의 지평’을 불러들이는 텍스트의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비포 선 셋>이 『참여사회』 생산자들에게 좋은 영감을 줄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권하루소식>은 지극히 개별적 존재들의 개별적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이 개별이 개인의 회고에 머물지 않고, 읽는 이의 문제로 울림을 주고, 이것이 다시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확장되어서, 마침내 제도의 변화로 이어진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파편적인 수다에 불과한 <비포 선 셋>은 비슷한 추억을 가진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보편적 텍스트’를 구축했다. 무슨 정치영화도 아닌 다음에야 그보다 더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개인의 잡다한 서사가 보편적 흡인력을 가지는 미묘하고도 놀라운 위력은 함께 음미하는 게 옳다.

왜냐하면 『참여사회』에 부족한 2%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참여를 말하지만 시민이 잘 보이지 않고, 인터뷰는 있지만 시민 개별의 고통은 잘 드러나지 않으며, 분노하는 시민은 있지만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일은 드물다. 제도와 대안이 종종 등장하지만, 이는 ‘미디어’로서의 참여연대가 나 홀로 시위 등을 통해 이미 ‘중개’하고 있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참여사회』는 참여연대라는 거대 미디어의 ‘틈새’를 파고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대안매체’가 되는 게 옳다. 이럴 때 『참여사회』는 참여연대 등 기성 시민단체에 대해 독립인 ‘인디(indi) 매체’다. 그러나 참여연대의 ‘후광’에 알레르기를 가질 필요는 없다. 사실은 그곳이 『참여사회』의 젖줄이다.

『참여사회』는 참여연대라는 미디어의 또 다른 미디어다. 그 활력은 텍스트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있다. 흡인력의 기본은 참여연대에서 나온다. 참여연대가 얼마나 튼튼한 인적 네트워크와 시민사회에 대한 장악력을 갖고 있는지가 흡인력의 절반 이상을 결정한다.

다만, 그 흡인력을 형상화하는 구체적 방식은 『참여사회』의 몫이다. 아마도 그것은 참여연대가 쉽게 말하지 못하는 ‘구체적 개인의 개별성’에 대한 주목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런 구체적 생생함을 지니고 있을 때, 그 텍스트는 아무리 소박한 치장을 하고 있을지라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성과가 차곡차곡 쌓이다보면, 언젠가는 『참여사회』가 참여연대를 이끄는 주어와 서술어의 자리에 가있을 것이다. 그러기를 기대한다.

안수찬 <한겨레>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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