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07월 2008-06-30   469

기획_2008 촛불집회, 그 작고 큰 메시지들

2008 촛불집회, 그 작고 큰 메시지들

양현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hyang@snu.ac.kr

지난 5월부터 현재까지 연일 계속되는 촛불집회, 시위 또는 문화제는 그 이름만큼이나 우리사회의 여러 어두운 곳을 밝히고 있다. 먼저, 미국산 쇠고기 협상에 의해 촉발된 촛불시위는 그 쟁점 면에서 음식, 건강, 환경, 소비, 교육과 같이 기성의 정치 영역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개인의 생활문제로 환원되기 어려운, ‘제3영역’의 정치화를 표상한다. 시위의 쟁점은 쇠고기 재협상, 대운하 반대 등 주요 정책 이슈로 집약되긴 하지만, 문제제기의 방식은 참여자들의 토론과 자기표현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고라’가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와 참여를 상징한다면, 이 공간의 철학은 동일성과 통일이 아니라 다양성과 관용(tolerance)이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촛불시위는 하나의 목소리로 대변될 수 없는 이질적 공간이고 지적 공간이다. 토론과 지성이 살아 있지 않다면, 촛불이 아니라 각목과 화염병의 공간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또한 이번 집회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은 “촛불 소녀”라는 재현을 통해 등장한 소수자성과 생활 감각이다. 학교와 군대 급식이 어머니들을 움직이고, 유모차 부대를 동원하고, 청소녀와 청소년의 참여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상품과 문화의 소비자로서의 여성과 청소년 이미지, 먹거리와 같은 생활 쟁점, 그것도 ‘어머니’노릇과 관련된 쟁점에만 개입하는 여성에 대한 통념이 작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하지만 눈을 제대로 뜨고 보면, 이번 촛불 집회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아닌 여성들, 젊은이뿐 아니라 60, 70대 시민 등 ‘비운동’ 세력들이 대거 참여하는 현상이 보일 것이다.

‘대리성’에 대한 문제제기

나는 이 새로운 주체들의 등장은 쇠고기 문제라는 생활의 현안뿐만 아니라, 새로운 운동방식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기성의 정치나 사회운동에서 리더십이나 조직적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던 시민들이 이 열린 광장에서는 자기 자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들의 소수자적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인해 새로운 의제를 제기하고, 기존의 정치 공간에서 표출할 수 없었던 상징과 언어들을 토해내는 데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생활’이란 개념은 정치적인 것으로 다 포섭되지 않았던 현실적 의제에 대한 이해이자 오해일지 모른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기성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도전이며, 국민의 의사를 ‘대의한다는’ 제도적 틀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읽힌다. 입법, 사법, 행정으로 구성되는 국가의 대의적 지배작용이 가지는 대리 혹은 재현(representation)의 모순을 노정하고 있다.

현금의 촛불 사태는 1980년대와 90년대의 민주화의 집합체험 속에서 ‘웃자란’ 시민사회에 대해 후퇴해버린 국가 기구의 대리정치간의 지체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시민적 참여와 소통을 위한 ‘아래로부터의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촛불은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적·정치적 표현방식을 ‘빨갱이 전사’, ‘배후’ 개념과 같은 구시대적 발상으로 포착한다면, 시민영역과 국가간의 괴리는 날로 심해질 것이다.

다른 한편, 현금의 촛불 집회는 제도정치뿐 아니라 기성의 사회운동과도 그 방식과 의제설정 면에서 차이가 있다. 먼저, 운동의 개인화와 직접성을 들 수 있다. 이제 사회운동은 스스로 교육하고 느끼고 변화하는 ‘주체 형성’의 장이라는 것이다. 이미 지율스님의 천성산 지키기, 강의석 씨의 종교 자유 투쟁, 오태양 씨의 양심적 병역 거부 등 90년대 말부터 등장한 일인시위방식에서 직접성의 특징이 나타났다. 그래서 촛불시위는 중심화된 기성 운동 조직과 방식에 대해서도 일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대규모 전국 운동 조직이 기업과 국가 영역뿐 아니라 시민 영역에서도 일종의 권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촛불은 밝히고 있다.

촛불 문화제로도 불리듯이 2008 촛불집회의 열쇳말은 또한 꿈과 재미에 있다. “2MB가 내 꿈을 가로막고 있어요.” 이런 현상은 특히 월드컵에서 보여준 (여성) 팬십 등에서 그 운동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이른바 ‘명박산성’에 나붙은 글귀, 사진, 그림 등을 보라. 그것은 ‘대자보’와 다른 것이다. 대자보보다 짧고 작고, 선언적이지 않은 자기의 글들을 쓴다. 이는 물론 인터넷 동아리, 블로그, UCC 등에서 갈고 닦인 감각일 것이다.

“이곳은 국경선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미국의 코리아주입니다. – USA 코리아 주지사 이명박” 시위에선 춤과 연행, 국악과 재즈가 연일 어우러지고 있다. 여기서 시민들은 정치와 놀이를 동시에 접하는 것이다. 어쩌면 촛불시위는 매주 혹은 상설로 열어서 문화생산의 광장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일지 모르겠다. 가장 주관적인 ‘감각’ 그리고 ‘아름다움’은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감각과 미의 발휘는 자기에 충실해야 할 뿐 아니라 타인의 감수성에 대한 상상력을 요청하기에, 미적 숭고함이란 늘 자신을 ‘넘어서는’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삶에 대한 재규정 고민할 때

사무엘 헌팅턴의 유명한 문명 충돌론은 ‘서구권(the West)’과 ‘세계의 나머지(the rest)’간의 충돌을 다루었다. 하지만 나는 촛불집회에 우리 사회 ‘안에서의’ 문명충돌을 보여주는 지점이 있다고 해석한다. 한국과 같은 비서구사회에서 서구 근대화와 자기 정체성, 과거와 현재는 서로 각축해왔다. 이번 쇠고기 협상을 둘러싼 촛불 시위는 현 정부에 대한 시각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 세계화와 지역화 등에 대한 시각 차이를 내장하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이제 ‘잘 사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재규정할 때가 아닌가 한다. 통상과 무역, 경제, 대미관계로 표상되는 물질주의적 가치와 조화와 평화, 탈식민, 자기만족 등으로 표상될 수 있는 탈물질주의적 가치에 대해서 시민적 논의가 필요하다. 선거 때마다 외치는 ‘민생’과 ‘일자리 창출’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삶의 요청이라 하겠으나, 2000년대 오늘의 삶에서도 한국의 정치적 의제가 고작, 늘 먹고사는 문제를 위협함으로써만 설정되어야 하는가. 치솟는 아파트 값과 사교육비의 문제는 민생이 아니라, 정의의 문제가 아니던가. 2008년 여름 촛불시위는 한국인들의 집합적이고 개인적 욕망의 지형이 먹고사는 문제를 통해서,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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