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2년 08월 2012-08-06   1651

[놀자] 주차장 한 칸에서 잔치 같은 시장을

주차장 한 칸에서 잔치 같은 시장을

                                                                                                             
                                                                                                       이명석
저술업자

나는 읍내 시장의 옷가게에서 태어나 자랐다. 이웃집 간판들을 읽으며 글자를 깨우쳤고, 진열한 양말 개수를 세며 구구단을 외웠다. 내복을 포장했던 마분지 상자로 딱지, 배, 비행기 등을 만들어 노는 일은 질리지도 않았다. 동네의 어물전, 닭 집, 포목전에는 내 또래의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모두의 집은 열려 있었고, 그 가게들은 제각각의 테마로 채워진 신비한 놀이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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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 나는 이런 경험이 단절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도시 구석까지 편의점과 할인마트가 들어섰고, 재래시장은 식료품 위주로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소상인들의 생계가 가로막히고, 그들이 대형 마트의 비정규 직원밖에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내게 이것은 지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어떤 오락이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전방廛房에서 물건값을 이래라저래라 하고, 그 마루에 걸터앉아 동네 소식을 주고받는 즐거움 말이다. 시장 아이가 부모님이 없는 틈을 타서 능청스럽게 흥정해서 물건을 파는 데서 얻는 희열 같은 것 말이다.

북적북적한 시장의 재미라. 훗날 나는 뜻밖의 곳에서 이 재미를 되찾게 된다. 먼 길을 돌아간 뒤였다. 아주 멀었다. 지구 반대쪽까지 갔다 와야 했다. 십여 년 전 배낭을 둘러메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비행기에서 내린 런던의 날씨는 소문대로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오돌오돌 떨다 얼어 죽은 뒤 하이드파크의 까마귀에 뜯어 먹힐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때 누군가의 소개로 캄덴 타운을 찾아가게 되었다. 중고 물품의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나는 펑크족들이 입던 요란한 의상들 사이에서 10파운드짜리 빨간 가죽점퍼를 구해 걸쳤다. 그러곤 신이 나서 포토벨로와 브릭레인 마켓 같은 또 다른 벼룩시장을 찾아다녔다. 이후에는 어느 도시에 가든지 벼룩시장이 언제 어디서 열리는지부터 확인했다.

 

비슷한 때에 여행을 떠났던 사람들 역시 이 기쁨을 맛보았던 것 같다.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와 작은 벼룩시장을 열기 시작했다. 이사하기 직전 옷 방을 열기도 했고, 잘 아는 카페를 빌려 전방을 차리기도 했다. 주말에는 사무실 옥상에서 제법 큰 규모의 장을 펼치고, 상사들을 꼬드겨 헐값에 보물들을 내놓게도 했다. 서초구청, 뚝섬 고수부지, 홍대 앞 놀이터 등은 지역을 대표하는 벼룩시장이 되었고, 참가자가 너무 많아 추첨을 하기에 이르렀다.

 

벼룩시장이 너무 번성해서일까? 나는 거기에 약간의 지겨움을 느끼게 되었다. 대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의 시장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졌다. 영어로는 개러지 세일Garage Sale. 말 그대로 차고에서 여는 소규모의 일회성 벼룩시장 말이다. 외국 도시를 갈 때마다 유명한 벼룩시장에 꼭 찾아가 보았지만, 동네 카페에 붙어 있는 전단을 보고 찾아간 작은 차고에서 더 큰 재미를 볼 때가 많았다. 정말 ‘저것도 팔려고 내놓은 거야?’ 싶은 별의별 물건들이 다 나온다. 게다가 짐을 정리하는 의미가 크기 때문에 거의 공짜다 싶은 것투성이다. 서울에서도 성북동, 가회동 등에서 외국인들이 여는 개러지 세일을 찾아다니며 정말 재미있는 물건들을 많이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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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시장의 진짜 재미는 구경하고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나만의 전방을 차리는 것이다. 나와 친구들 역시 작은 주차장만 한 공간에서 재미있는 벼룩시장을 많이 했다. 혜화동의 도자기 공방 앞 주차장에서는 바질 화분과 만화책들을 내놓고, ‘이탈리아 가정식 카페’라며 모카 포트로 커피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부암동에서는 친구의 집 앞에서 열린 벼룩시장에 스피커를 갖다놓고 디제잉하는 재미로 한나절을 보냈다. 이런 시장에는 중고 물품만이 아니라 직접 만든 인형, 텃밭에서 키운 채소, 집에서 담근 반찬들도 줄줄이 나온다. 누군가 우쿨렐레와 탬버린을 들고 와 어설프게 연주만 해도 동네잔치가 된다.

 

그 시장에 친구의 초등학생 조카가 참가해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 그러더니 엄마의 카페 앞에 ‘O준이의 벼룩시장’이라는 작은 상자를 내놓고 주말마다 자신만의 가게를 열기 시작했다. 장난감, 동화책 같은 걸 내놓고 사탕발림하는 문구도 달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에게 계곡에서 주워온 작은 돌멩이를 선물로 주는 등 수완도 보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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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벼룩시장의 주인 자리에 아이들을 앉혀보라고 권한다. 거기에 거창하게 경제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다. 그냥 그 재미를 만끽하게 해주고 싶다. 자신이 안 쓰는 물건에 가격표를 붙여 남에게 파는 일. 그렇게 생긴 몇 푼으로 버려지기 직전의 로봇 장난감을 챙겨오는 일. 그건 어떤 게임보다 흥미롭고 짜릿하다. 그리고 자기 앞에 놓인 물건들의 주인이 계속 바뀔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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