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5년 02월 2015-02-02   1359

[듣자] 얼어붙은 세상, 슈베르트 ‘겨울여행’

이채훈 MBC 해직 PD

97i/18/huty/6924/21

슈베르트 연가곡 <겨울여행> 이 음악을 듣고 싶다면?  

유투브에서 Schubert Winterreise Bostridge를 검색하세요.

http://youtu.be/DLsaSm5iG9o?list=PL2FEA1645BA0A5D3B

제1곡 ‘잘 자요’ (Gute Nacht), 제5곡 ‘보리수’ (Lindenbaum), 제11곡 ‘봄의 꿈’ (Fruhlingstraum), 제24곡 ‘거리의 악사’ (Leiermann). 

슈베르트 <봄의 신앙>, 이 음악을 듣고 싶다면? 

유투브에서 Schubert Fruhlingsglaube Bostridge를 검색하세요.

http://youtu.be/qKJnTCX6YEM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 피아노 줄리어스 드레이크)

온 세상이 얼어붙었다. 담뱃값 인상과 ‘13월의 세금폭탄’으로 서민 생계가 얼어붙었다. ‘갑’들의 막말에 이어, 4살 어린이에게 KO펀치를 날리는 보육원 교사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하다. 분노와 증오와 원망으로 가득한 세상은 폭발의 임계점에서 얼어붙어 있다.

차디찬 겨울밤, 슈베르트는 홀로 여행을 떠난다. “홀로 왔던 길을 이제 홀로 떠나네. 꽃 만발한 5월 그녀와 사랑을 다짐했지만 이젠 캄캄한 세상, 눈 덮인 길 뿐…. 잘자요, 그녀 유리창에 써 놓고 꿈 깨지 말라고 조용히 떠나네.” 슈베르트(1797~1828)가 죽음을 1년 앞두고 작곡한 <겨울여행>은 사랑하는 그녀와의 작별로 시작한다.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유리창에 ‘잘 자요Gute Nacht’ 인사를 써 놓고 조용히 떠난다. 

이 겨울에 아예 세상을 떠나려는 걸까? 자신도 알 수 없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그의 감성은 험악한 세상을 견디기가 어렵다. 가난한 그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돌아올 계획도 없고 목적지도 없다. 눈 덮인 길을 가는데, 눈물이 자꾸 흘러서 얼어붙는다.  

아무리 추워도 봄을 꿈꾸는 게 인간인가. <겨울여행> 중 5번째 곡 ‘보리수’, “마을 입구 우물가의 보리수, 그늘 아래서 단꿈을 꾸었지. 나무줄기에 사랑의 말을 새겼었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온 이 나무 아래….” 그러나 꿈 깨어 둘러보니 세상은 어둡다. “지금은 깊은 밤의 고요 속에 그 곁을 지나야 하지, 캄캄한 어둠 속에 두 눈을 감네….”

흔히 <겨울나그네>로 번역돼 온 <겨울여행Winterreise>은 빌헬름 뮐러(1794~1827)가 쓴 24편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이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막 시작된 무한경쟁에 시인과 음악가는 힘겨워했다. 슈베르트가 이 곡을 작곡한 1827년에 뮐러는 33살로 세상을 떠났고, 슈베르트 자신도 이듬해 31살로 세상을 떠난다. 슈베르트는 뮐러의 시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또렷해지는 ‘방랑자 의식’이었다. <겨울여행>은 슈베르트의 슬픈 ‘방랑자 의식’이 가장 짙게 드러난 작품이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달콤한 꿈을 꾼 그의 예술혼은 이른바 ‘낭만주의’의 씨앗이 됐다.  

보리수 아래서 잠시 꿈을 꾸고 나니 더 슬퍼진 걸까. 눈물이 다시 흐르더니 마침내 홍수가 된다. 의식이 혼미해진다. 그녀와의 사랑을 회상하고, 깊은 골짜기에서 춤추는 도깨비불의 환상을 본다. 평정을 되찾고 다시 봄을 꿈꾼다. “꿈속에서 아름다운 5월의 꽃을 보았네. 닭소리에 잠을 깨니 어두운 지붕위에 까마귀가 울고 있네. 눈을 감으니 아직도 가슴이 뛰고 있네. 내 잎새 언제 다시 푸르러져 그녀를 껴안을 수 있을까.” <겨울여행>의 11번째 곡 ‘봄의 꿈’이다. 

정처 없는 <겨울여행>의 막바지, 슈베르트는 마을 변두리에서 ‘거리의 악사’를 발견한다.  “곱은 손으로 손풍금을 타는 늙은 악사, 듣는 이 보는 이 아무도 없고 개들만 늙은 악사를 쫓아다니네.” 슈베르트는 이 늙은 ‘거리의 악사’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돈과 명성은 언제나 그를 빗겨 갔다. 슈베르트는 홀로 창작에서 구원의 빛을 찾아야 했다. “나는 오로지 작곡을 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어.” 이렇게 담담히 말하는 슈베르트는 바로 늙은 ‘거리의 악사’였다.

1964년 태어난 영국의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가 뮤직비디오로 만든 <겨울여행>은 아름다운 목소리, 섬세한 표현력, 지적인 호소력이 있다. 나이든 세대가 피셔 디스카우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면, 젊은 세대는 보스트리지의 노래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는 슈베르트뿐 아니라 헨델부터 브리튼까지 영국 작곡가들의 노래를 무척 많이 녹음했다. 

<겨울여행>은 전체적으로 무겁고 우울하다. 간혹 따뜻한 봄을 꿈꾸지만 결국 슬픈 방랑자 슈베르트 자신의 모습을 어둡게 노래한다. 하지만 슈베르트가 언제나 어두웠던 건 아니다. 1822년, 슈베르트가 20대 중반에 작곡한 <봄의 신앙>은 좀 더 밝게 빛난다. 모든 게 얼어붙은 요즘, 슈베르트의 이 노래를 들으며 함께 봄을 꿈꾸어 보면 어떨까.    

세상은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걸까?
결국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
하지만 꽃피는 건 멈추지 않을 거야.
멀고 깊은 골짜기에도 꽃은 필 거야.
가엾은 마음이여, 고통을 잊어라.”
모두 바뀔 거야. 

이채훈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2012년 해직된 뒤 ‘진실의 힘 음악 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저서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클래식, 마음을 어루만지다』등.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