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06월 2008-05-29   797

[이슈2] 미국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사회학적 이해

홍성태  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 상지대 교수 rayhope@chol.com

이명박 정부가 광우병 위험이 큰 미국산 쇠고기의 전면수입을 결정한 것에 대해 맞서서 전국에서 촛불이 켜졌다. 작은 촛불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촛불은 작아도 어둠을 밝힐 수 있다. 작은 촛불이라도 많이 모이면 큰 어둠도 충분히 몰아낼 수 있다. 거리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들은 이명박 정부가 드리운 어둠에 맞서는 희망의 불빛들이다. 우리는 이 촛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번의 촛불시위에서 가장 많이 주목받는 것은 두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10대와 인터넷이다. 대부분의 언론과 학자들이 이 두 가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내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구한 기자들도 하나같이 이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질문을 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사실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터넷이 여론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0년 전부터의 일이고, 10대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것도 이미 6년 전에 봤던 일이다.

왜 새롭지 않은 일을 새롭다고 주장하고 유포하는가? 나는 이것 자체가 하나의 분석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새롭지 않은 것을 새롭다고 주장하는 언론과 학자들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 잘못된 분석에서 올바른 실천이 나올 수는 없다. 보수적 20대에 맞서서 진보적 10대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면 과연 세상이 진보할까? 그 진보적 10대가 몇 년 뒤에 다시 보수적 20대가 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 우리는 이번의 촛불시위에서 정말로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를 잘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 일단 인터넷이 여론의 형성에 미쳤다는 것은 확실히 제외할 수 있다. ‘붉은 악마’도, ‘효순이 미선이’도, ‘탄핵 반대’도 모두 사실상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10대가 대대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이다. 특히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은 이번의 촛불시위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이번의 촛불시위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광우병이라는 무서운 병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면, 이번의 촛불시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명박에 대한 실망이나 혐오 등은 부가적 사안이다. 이 점을 혼동해서는 이번의 촛불시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고, 당연히 이 사회의 올바른 변화도 추구할 수 없을 것이다.
 
광우병은 소의 골육분을 포함한 동물성 사료를 먹은 소에게 변형 프리온이 형성되어 발생하는 치명적 전염병이다. 쉽게 말해서 소에게 소를 먹여서 생긴 치명적 전염병이 광우병이다. 변형 프리온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으며 먹이사슬을 통해 돌고 돈다. 그리고 단 0.01g만으로도 광우병을 발생시킨다. 일단 광우병에 걸리면 치료할 수 없으며 누구나 뇌가 녹아 죽는다. 이 끔찍한 병에 대해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그야말로 극사실의 정보와 지식을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다.

급식을 하는 10대는 광우병의 가장 큰 잠재적 피해자이다. 그리고 10대는 인터넷을 통해 어떤 세대보다 활발히 정보와 지식을 얻는 세대이다. 10대는 광우병에 대해 그 어떤 세대보다 큰 공포를 느꼈다. 그 공포는 다시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급속히 전파되어 곧 ‘세대의 공포’가 되었다. 이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멍청하게도 괴담론과 선동론이라는 희한한 주장으로 진압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10대의 공포는 더 커졌고, 촛불시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10대는 자연스럽게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게 되었다. 부모들도 곧 자녀들의 공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공포를 느끼던 부모들은 자녀들의 공포를 알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대들의 촛불은 빠르게 시민의 촛불로 커졌다.

광우병 위험이 큰 미국산 쇠고기의 전면수입에 따라 세대와 계급을 떠나서 사실상 누구나 광우병에 걸릴 수 있게 되었다. 가장 큰 잠재적 피해자인 10대들의 촛불을 통해 이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PD수첩’의 설명이 가장 큰 잠재적 피해자인 10대들의 촛불을 통해 사회 전체로 확산된 것이다.

이에 대해 ‘보수’ 쪽에서는 괴담론과 선동론을 주장해서 자신들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 한나라당, 보수언론, 뉴라이트 등 ‘이명박 세력’은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강변하면서 자신들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냈다. 이들은 심지어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 ‘쇼’도 벌였는데, 이에 대해 시민들은 이미 전부터 이렇게 대응했다. ‘너희나 먹어라, 우리는 10년 뒤에 생각해 보마’라고. 반면에 ‘진보’ 쪽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밝혀진 것이며, 공공성을 전면에 내걸고 촛불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전인수에 가까운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광우병 위험이 큰 미국산 쇠고기 반대라는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요구를 신자유주의 반대와 같은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요구로 대체하는 것이야말로 ‘진보’ 쪽의 고질병이다.

이번의 촛불시위는 위험사회와 생활정치라는 관점에서 잘 이해될 수 있다. 생활정치는 무엇보다 개인의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 그러나 그 결과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분명히 진보적이다. 요컨대 생활정치는 기존의 이념적, 선험적, 추상적 보수와 진보의 틀을 벗어난다. 고성장과 민주화의 구조적 과제가 해결된 ‘선진사회’에서는 어디서나 이러한 생활정치가 기존의 권력정치, 이념정치를 대체하는 양상을 보인다. 우리도 그렇다. ‘선진사회’는 구조적 과제를 상당히 해결하고 풍요를 이룬 사회이지만, 그 풍요는 사실 광우병과 같은 엄청난 위험을 대가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풍요사회에서 건강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라는 원초적 요구가 증폭된다. 한국은 서구보다 훨씬 더 위험한 위험사회, 곧 ‘사고사회’이기 때문에 이 원초적 요구가 더욱 더 증폭된다.

기존의 주장을 반복하거나 조금 변형하는 것으로는 이번의 촛불시위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보수’나 ‘진보’에 대한 닳고 닳은 논의가 아니라 광우병이라는 문제의 발생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이다. 생활정치의 관점에서 이 점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도 잘못을 반복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에 세상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맞춰야 한다. ‘진보’라는 딱지를 붙인다고 해서 그 내용이 ‘진보’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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