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인 척, 한국 여행 놀이
이명석 저술업자
몇 년 전, 남대문 도깨비 시장에 커피 용품을 사러 간 적이 있다. 출출하던 차에 국숫집을 발견하고 “여기 두 그릇만 말아주세요.”라고 했다. 그런데 주인 할머니 왈. “아이고, 한국말은 어디서 배웠어? 참 잘하네.” 나는 뜻밖의 말에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저 한국 사람인데요. 여권 보여 드릴까요?” 할머니는 단호했다. “어허, 속일 걸 속여. 내가 여기서 장사가 몇 년인데?”
외모가 외모인지라 그런 오해를 자주 겪곤 한다. 명동, 남대문, 동대문 등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처음에는 일일이 국적을 확인시켜 주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저 그러려니 한다. 아니 한 술 더 뜬다. 아예 작정하고 외국인인 척하며 돌아다니는 거다. 짧은 영어나 일본어로 상인들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 보면 은근히 재미있다. 거기에 더 큰 즐거움이 생겼다. 신기하게도 항상 지나다니던 그 거리들이 전혀 다른 풍경으로 바뀌는 거다. 길가의 포장마차가 이국적인 길거리 음식 같고, 건물 외벽을 가득 채운 간판은 다국적 도시의 풍경처럼 여겨진다. 나는 마치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여행에 관한 책을 몇 권 쓴 탓인지, 내게 외국 여행지를 추천해달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여름 휴가철이 가까워지면 문의가 더욱 빈번해진다. 좋은 곳 많다. 나부터 달려가고 싶은 곳이 줄줄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런저런 조건 따지다 보면, 과연 그 비싼 해외여행을 지금 같은 성수기에 떠나야 할까 싶다. 그럴 땐 말한다. “한국을 여행 온 것처럼 다녀보세요. 서울에서 외국인이 되어보세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을 마치 여행자인 것처럼 새로운 눈으로 돌아보자는 것이다.
기왕 하는 것 본격적으로 해보자. 우선 여행 가방을 꾸린 뒤 새벽같이 인천공항으로 간다. 방금 입국 게이트로 들어온 것처럼 선글라스를 끼고 공항 로비를 거닌 뒤 적당한 곳에서 식사를 하자. 이때 일행끼리 이번 여행에서 쓸 만큼의 한국 돈을 나눠 가진다. “우와 한국 돈 환전한 거야?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누구야?”, “여기 가이드북에 나와. 이순신, 세종대왕…” 그러고선 이번 여행의 규칙을 분명히 정해둔다. 신분이 탄로 날 수 있는 신용카드는 자제한다. 특히 교통카드를 쓰는 건 배제한다. 스마트폰의 지도 앱은 써도 좋지만, 휴대전화로 통화를 한다든지 하는 건 삼가도록 한다. 가능하면 정말 외국에 여행 왔을 때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다.
이제 공항철도나 버스를 타고 시내로 이동하자. 여행의 순서상 숙소를 찾아 큰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쉬운 방법으로는 자기 집을 민박이라 가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본격적인 마음가짐을 위해 호텔이나 한옥 민박 같은 곳에 짐을 풀어도 괜찮다. 그 정도만으로도 정말 여행 온 느낌이 확 든다. 가장 추천하는 것은 강북 쪽의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리고 일행을 삼아 함께 서울을 돌아다니면 정말로 여행 온 느낌이 들 것이다.
여행의 코스는 어떻게 짤까? 시티투어버스 같은 정공법도 가능하다. 경복궁, 창경궁 같은 고궁, 남대문, 명동 등 상점가를 유유자적하며 돌아다닐 수도 있다. 홍대 앞, 서촌, 이태원 같은 카페 거리도 요즘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약 외국에서 친구가 놀러오는데, 이 친구에게 서울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광장시장, 통인시장 같은 전통 시장도 좋고, 서울성곽 등 힘은 들지만 새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도 괜찮다. 아니면 대학로, 동대문, 압구정동을 지나 삼성동 코엑스에 이르는 시내버스 노선 하나를 집중 공략해도 좋다.
경로만큼이나 태도가 중요하다. 진짜 여행자의 마음으로 이 풍경들을 보아야 한다. 외모는 선글라스에 모자, 관광 가이드 책자 등으로 적당히 꾸미면 된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를 쓰지 않는 것이다. 일행끼리, 혹은 상인들과 짧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 자신이 정말 외국인이 된 것처럼 여겨진다. 혹시 한국인인 게 들키면 부끄럽지 않을까? 그때는 이런 쪽지를 보여주자. “학원에서 영어 회화 배우고 있는데, 하루 동안 한국어를 한 마디도 안하는 게 숙제여서요.” 박원순 서울시장도 외국 관광객인 척 민생시찰을 하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 들킬 염려는 크지 않을 것이다.
자, 충분히 뻔뻔해졌으면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자. 한국의 낯선 풍경을 즐기고 기념사진도 찍자. 고궁에서 곤룡포를 빌려 입고 수문장 옆에서 브이 자도 그려보자. 벼룩시장을 만나면 이 여행을 기억할 특이한 물건들도 사보고, 돌아가 가족이나 친구에게 전해줄 선물도 골라보자. 우체국을 발견하면 보고 싶은 이, 혹은 나 자신에게 그림엽서 한 장이라도 띄워보자. 아이들과 함께 하면 더욱 재미있는 일이 많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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