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6월 2000-06-01   721

38선 접경지역을 가다

풍경 하나.

“개구락지 한 마리가 오줌만 싸도 뚝방이 터진단 말이야, 이눔아.”

남북분단의 한자락 흔적, 민통선 마을도 매한가지였다. 여느 농촌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성산대교 근방 자유로 진입로에서 30여 분 달려 도착한 통일대교 검문소. 이곳을 지나 민통선안의 첫 마을 통일촌에서 만난 최종수(62세) 씨는 통일대교와 이어지는 뚝방 밑 논배미 한쪽 구석에 물꼬를 내다가 기자 일행과 함께 군내 출장소 직원이 다가오자 불평부터 쏟아부었다.

“벌써 3년째야. 지금도 (수해에) 무방비상태라니까. 내가 삼십만 먹었어도 칼 들고 뛰어가겠다. 여기가 남의 자식이야. 어휴~. 뚝방 보다도 내 울화통이 먼저 터져.”

통일촌의 공식 행정명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73년 8월 박정희 정권시절 7․4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된 뒤 자유의 다리를 거쳐 판문점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통일의 길목’에 상징적으로 통일촌이 조성됐다. 당시 첫 정착민은 제대 장병 40세대와 실향민 40세대. 이들은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분양받은 전답 9,000평(세대별)을 지금껏 일궈오고 있다.

“말도 마십시오. 처음 들어올 땐 그야말로 황무지였죠. 국가에서 큰 나무는 베어줬지만 삽으로 나무뿌리 캐내는 데만도 3~4년 걸렸어요. 이 와중에 지뢰 밟고 죽어나간 사람이 한명이고, 두사람이 부상당했어요. 그렇게 목숨 바쳐 땅을 일궜는데 토지분쟁에 휩싸여 땅을 빼앗기고, 이곳을 등진 사람들도 많지요.”

이 마을 이장인 하수봉(60세) 씨의 말이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지만 정세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대남방송요? 그건 귀에도 안 들어와요. 전에는 주로 밤에만 웅웅거렸는데 요즘은 거의 안하는 것 같더라고요. 근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농기계 값이 너무 비싸 1년 내내 농사지어봤자 헛것입니다. 아니 트랙터 하나 값이 몇천만 원씩이나하고, 부품 사기도 하늘의 별따기니 농사 해먹겠어요.”

지리적으로 분단의 현장에 밀착해 있지만 그들의 냉전 체감기온은 한반도 남쪽의 다른 지역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가끔 고기나 생선을 식탁에 올리기 위해 문산으로 갈 때 거쳐야 하는 통일대교를 출입하면서 통행증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 남북분단은 이렇듯 무감각하다.

풍경 둘.

대인지뢰라는 게 있다. 일명 발목지뢰. 주먹만한 크기로 둥근 모양이다. 재질은 플라스틱. 이 지뢰의 타격 목표는 군인 한 사람의 발목이다. 부상자를 부축해야 하기 때문에 전투력 손실은 2~3배가 된다. 이 주먹만한 플라스틱이 몇백 가구의 가정을 50여 년 간 괴롭혀 왔다. 발목지뢰 피해자들. 경기도 파평면 금파2리에 47년째 살고 있는 이덕준(76세) 씨도 그중 한 명이다. 그의 고향은 철원 이북. 6․25때 젖먹이 어린아이를 업고 부인과 함께 1주일만 피난갔다 오겠다고 어머님 곁을 떠났다. 하지만 이제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북분단은 그에게 혈육의 정을 끊도록 강요했고 오른쪽 발목과 함께 가족의 행복도 앗아간 셈이다.

“꽝 하는 소리에 정신을 잃었죠. 69년 장파리 근방의 민통선 안에서 건초를 묶다가 생긴 일이었습니다. 나처럼 다치거나 죽어나간 사람들이 당시만 해도 많았어요. 이 동네만도 여섯 명, 장파리에 다섯 명, 문산에 두 명, 금촌에 한 명….”

사고 이전까지만도 그는 그럭저럭 먹고살 만했다고 한다. 미군 막사에서 식당일을 하다가 퇴출됐지만 몸뚱이 하나 건사하다는 것만으로 이곳저곳 막노동판을 전전하면서 6남매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사고난 뒤 매일 방구들만 데우고 있었다. 30년이 넘었다. 그 세월 동안 6남매가 성장했다. 제대로 공부시킬 여력은 없었다. 그의 부인이 여기저기 남의 농사일을 거들어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서 다치기라도 했으면 평생 연금은 타먹었겠지요. 지난번 조디 윌리암스가 왔을 때 60만 원짜리 의족을 준 게 전부예요.”

풍경 셋.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 초입의 비룡교를 지나면 곧바로 SK주유소가 나온다. 그 앞에 한적한 시골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섬이 있다. 1,000여 평 남짓 울창한 밀림의 지뢰지대.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돼 있어 참나무와 아까시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철책으로 둘러친 경고 팻말 옆으로 노곡초등학교 학생들이 재잘거리며 학교를 오가고, 가끔 경운기가 탈탈거리며 지나간다.

“전에 지뢰밭 출입을 막기 위해 쳐놓은 철책은 엿장수가 다 걷어갔어요. 한참동안 그대로 방치되다가 2년 전쯤 다시 (철책을) 쳤습니다. 노곡 1, 2리를 통틀어 이처럼 대충 방치해 놓은 지뢰밭은 아마도 1만 4,000여 평쯤 될 겁니다. 지금도 철책이 쳐있지 않은 곳도 있어요. 군인들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곳 마을 주민인 유병지(60세) 씨의 말이다. 그와 함께 3~4m 비포장 사잇길을 두고 위치한 노곡교회에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이곳 놀이터는 평지보다 1.5m나 높다. 지뢰를 그대로 둔 채 흙으로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지뢰밭 위에서 뛰노는 아이들. 충격적인 현장이다. 그네와 시소 등 아이들의 놀이기구가 놓여 있는 곳에 올라서니 왠지 섬뜩한 느낌이다. 유씨는 “이곳에 탱크가 올라와도 터지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지만 찜찜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이곳에 지뢰가 매설된 것은 지난 1961년. 국군이 매설했다. 하지만 국군도 이곳에 몇 개의 지뢰가 매설됐는지는 모른다. 철의 장벽을 넘기 전에 우리 속의 철책부터 거둬야 한다.

김병기(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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