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01월 2005-01-01   1034

소젖 짜는 것도 운동하는 것도, 함께하면 길이 보입니다.

전북 장수 오제환 회원

겨울 문턱에 찾은 전북 장수군은 한적했다. 농한기인 까닭만은 아닌 듯 했다. 무주를 지나 깊은 산 속에 자리잡은 장수에 들어서자, 산과 벌거벗은 나무와 마을을 굽이도는 시냇물이 외지손님을 반길 뿐 길가엔 사람의 발길조차 뜸한 적막하고 외진 마을이었다.

자연과 싸우고, 때론 순응하며 일군 성공

『참여사회』가 1월에 만난 회원은 이곳 장수에서 사과밭을 일구며 생활하는 오제환 씨다. 그를 만나기 위해선, 장수군 천천면 면소재지에서도 차로 한참을 더 들어가야 했다. 산기슭에 넓게 펼쳐진 그의 사과밭이 눈에 들어왔다. 수확이 끝난 사과밭을 지나자 밭 꼭대기에 자리잡은 집 앞으로 오제환 회원이 나와 반갑게 맞아 준다. 창고에서는 그의 아내가 배달할 사과를 정성스레 포장하고 있었다. 맛이나 보라며 큼직한 사과 하나를 통째 깎아 내 놓았다. 사과 한 알 한 알에 스며든 부부의 진한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익산·전주 지역에서 청과물 유통을 하다가 전업해 장수에 터전을 잡은 오 회원은 사과농사만 올해로 13년째이다. 도시 살던 사람이 농사를 짓긴 쉽지 않을 텐데, 하필 사과를 선택해 그것도 장수로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90년대 초였어요. 유통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게 잘못되면서 큰 피해를 입었죠. 그때 청과물 유통하던 때 접했던 장수사과를 직접 재배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농사꾼이 된 거예요. 해발 400미터가 넘는 장수는 해충피해가 적어 농약을 덜 써도 되고, 밤낮의 기온차가 커서 사과 맛을 내기엔 최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번잡한 도시를 떠나 조용하게 살고 싶었던 바람도 있었고요.”

13년 전은 장수에서 사과농가가 20여 가구에 불과했을 때였다.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장수가 사과농사에 천혜의 조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했던 그는, 지금 13만평 규모에 사과 5000주를 키우는 성공한 농업인이 됐으니 말이다. 지금은 생활에도 여유가 생겨 옛날 일을 웃으며 추억하지만, 처음 5년은 진짜 힘들었다고 한다.

“아무 것도 없는 산 중턱에 파라솔 하나 펴 놓고 살 집을 짓는데 참 막막했어요. 샘을 파고, 전기를 끌어오고, 전화선을 놓고…, 모든 걸 다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거든요. 무엇보다 제일 어려웠던 게 자연과의 싸움이었어요. 밤이면 온갖 야생동물들이 울어대지, 끔찍한 적막감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데, 그게 얼마나 큰 공포였는지 몰라요. 게다가 한여름 폭우가 쏟아지면 개간해 놓은 땅 몇 만평이 한순간에 없어져 버려요. 불과 몇 시간 사이에 밭도 길도 없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는 거예요. 자연의 힘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했던지, 그 땐 맥이 탁 풀려서 모든 의욕이 사라져 버립디다. 망가진 밭을 보며 포기하려고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어지간한 각오와 끈기가 필요한 게 아니었을 텐데, 그는 여태까지 잘 버텨 왔다. 아니, 버티는 데 그쳤다면, 지금의 작은 풍요는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버티기만 하지 않고, 그는 싸워 왔을 것이다. 그것도 처절하게 말이다. 그 처절함이 평생을 소처럼 일해도 밥 먹고 자식 교육시키기조차 힘겨운 우리농촌의 현실에서 ‘선택받은’ 사람처럼 만들었을 것이다. 그 ‘선택됨’이 그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님에도, 그는 자신과 같은 사람은 1000명 중 하나 있을까 말까 한 게 우리의 농촌현실이라며 다른 농민들에게 미안해했다.

‘실전경험’으로 다져진 농민운동가

그래서일까. 13년 농사꾼으로 살다 보니 이젠 농촌 실정이 낱낱이 보인다며, 그는 농촌을 좀더 살만한 곳으로 바꾸기 위해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지역농민회에서 활동을 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농촌문제는 잘못된 정부시책과 농민의 무지가 맞물린 결과라며, 농협개혁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지금 농협은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져 있어요. 농민들과 함께 하기 어려울 정도로, 농민은 뒷전이 돼 버린 거죠. 농협이 이익을 냈는데도 농민을 위해 쓰여지는 것은 13%에 불과해요. 나머지 80 % 이상이 농협직원들을 위해 쓰여지고요. 그런데도 농민들은 영농자금 대출 받을 때 괜히 직원들한테 주눅들고 굽신거리게 돼요. 농협은 농사꾼의 회원조합이고 우리 것인데도 말입니다. 다행히 최근 1~2년 사이 많이 달라지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농민들이 직접 나서서 농협을 해산시키고 농민과 고통을 나누는 농협을 만들기 위한 대안을 찾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분리하는 등의 농협개혁방안을 담은 농협법개정안이 지난 정기국회 통과가 물거품이 돼 너무 허탈했다는 그가 농한기를 틈타 뭔가 계획하는 일이 있다고 했다.

“며칠 전 제가 저희 천천면의 농민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를 만들었어요. 농촌의 가장 작은 단위인 면소재지부터 일어나 농촌개혁 방안을 찾아 보자는 취지였어요. 농민회다 농어민 후계자다 농민연대다, 단체가 많다 보니 목소리도 제 각각이고 활동도 중복돼 효율성이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여기저기 발을 걸친 제가 중개자 역할을 해 보려고요. 장수군이 재정자립도도 열악하고 인구 3만이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자랑스런 농민운동의 메카랍니다. 작년 멕시코 칸쿤에서 WTO에 반대하며 목숨을 끊은 이경해 열사가 장수군 출신이에요. 그러니까 농촌개혁에 장수군이 한 몫 해야죠.”

사실 그가 이런 모임까지 생각하게 된 데는 그간의 단체활동에서 느낀 것들이 있어서다. “농민들은 데모하러 서울 한 번 올라가도 하루밖에는 못 있어요. 얼른 와서 소젖도 짜야하고 소밥도 줘야하니까요. 그러니까 농한기 때라도 농민들이 서로 조를 짜서 시위를 나가면 남은 사람들이 대신 소도 봐 주고, 농사일도 나눠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서 이런 모임을 제안해 본 거고요.”

현재 모임 참석자는 몇 사람 안 된다고 한다. 아마 쉽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작은 노력들이 농촌을 한 걸음 전진하게 만드는 건 분명하다.

오제환 씨가 참여연대 회원이 된 건 3년 전이다.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참여연대 사람이 야무지게 말하는 걸 보고 바로 회원으로 가입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매달 『참여사회』가 배달되면 꼭 확인하는 코너가 있다. 바로 신입회원명단이 수록된 페이지다.

“이번 달엔 신입회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 세어 봅니다. 단체의 힘은 회원이니까요. 더구나 참여연대처럼 회원 회비에 의지해서 재정을 꾸리는 단체에서 회원은 더욱 중요하죠. 사회운동도 재정이 뒷받침돼야 할 수 있는 거라 믿거든요. 작년인가 참여연대에서 회원배가운동을 할 때 참여연대로 전화를 걸어 장수군의 회원이 몇인지 물어봤더니 나말곤 없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곤 마음이 급해져서 회원가입서 10장을 우편으로 받았는데, 그리곤 회원가입 못 시키고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우리 장수군에도 나라 걱정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말로만 하지 말고 참여연대에 후원하라고 다시 권유해 봐야겠습니다.”

고마운 회원이다. 참여연대의 진짜 주인이라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을 개간해 사과농장을 일구면서 모든 걸 손수해야 했던 그의 ‘실전경험’이 척박한 시민단체의 속사정까지 꿰뚫어 보게 만든 것은 아닐까 생각됐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풍성했다. 참여연대 살림을 제 일처럼 걱정해 주는 회원의 마음을 잔뜩 짊어지고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차 트렁크를 한가득 채운 사과는 그의 마음을 참여연대 사무실에까지 전해줄 것이기에.

정지인 참여연대 시민참여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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