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5월 2000-05-01   842

워싱턴을 뒤흔든 반세게화 물결

우리는 지금 정의를 원한다

“이게 바로 민주주의라는 거야!(This is what democracy looks like!)”

바리케이드를 겹겹이 쳐 놓고 완전무장을 갖춘 채 냉정한 눈만을 내놓고 줄지어 선 워싱턴 경찰들 앞에서 시위대는 비웃으며 외쳤다. 최루가스와 곤봉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수백명을 연행해가는 그들 앞에서 시위대는 ‘이런 게 너희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민주주의인가? 당신들이 이러고도 어떻게 다른 나라들에게 인권과 민주화를 강요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구속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끝까지 비폭력으로 저항하겠다는 시위대들의 의지는 흑인으로부터 백인에 이르기까지, 귀와 코, 입술 등 온몸에 고리로 장식을 하고 염색한 머리를 한 히피들로부터 법대 학생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지켜졌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의! 언제? 지금!(What do we need? Justice! When do we need? Now!)”

한국의 풍물 소리에 맞춰, 저 아프리카의 민속 악기에 맞춰 사방에서 구호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들의 주변으로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온 세계를 집어삼키는 괴물 모형과 IMF, 세계은행으로부터 맥도날드, 나이키 등을 표상하는 험상궂은 가면들, 마치 사과를 물고 있듯이 세계를 입안에 물고 눈웃음을 치는 뚱뚱한 돼지 모양의 IMF 등이 함께 행진했다. ‘저항’이라고 씌어 있는 새 모형들이 한바탕 춤을 추며 지나가면 ‘해방’이라는 신이 나타나서 미소지으면서 시위대를 감싸안기도 했다.

하나의 목소리로 메시지를 전하라

“IMF와 세계은행을 닫아 버리자!(Shut down the IMF/World Bank)”는 구호는 열대 우림을 보호하자는 환경운동가로부터 멕시코와 니카라과 연대 조직, 변호사 협의회, 그리고 노동착취 기업에 저항하는 대학생들과 동성애 단체에 이르기까지 그 자리에 함께 모인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다. 4월 16일과 17일의 격렬한 합법·비합법 시위가 끝난 후 미국의 언론들은 ‘IMF와 세계은행의 회의를 중지’시켜야 한다는 그 구호만을 들어서 일제히 ‘회의는 예정대로 진행되었으며 시위는 실패했다’는 표제를 걸었지만 400여개에 이르는 참가 단체들과 개인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승리를 자축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쏟아져 나올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전세계에 그들이 원하는 바를 목청껏 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워싱턴 시위는 성공적이었다고.

세계은행은 이제 예전의 세계은행이 아니다?

IMF와 세계은행 회의 전날인 4월 15일에는 IMF와 세계은행 대변자와 월든 밸로, 적키 조로헤 제후(50년이면 충분하다 네트워크)의 토론회가 있었다. 세계은행의 ‘빈곤 퇴치’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방송할만큼 치밀하게 대처하던 그들은 그러나 토론회에서는 거의 자신들의 논리를 펼치지 못했다. 세계은행 대변자가 ‘우리가 얼마나 빈곤 퇴치를 위해서, 그리고 음식과 식수를 제공해 주기 위해서 노력했는지 아느냐? 너희들이 직접 가서 본다면 이러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1,000여 명의 관중들은 야유를 보내면서 ‘우리가 바로 제3세계에서 온 사람들이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라고 응수했다.

IMF와 세계은행이 몇 년 전부터 내부 개혁을 통해 구조개편을 했기 때문에 이제 예전의 조직이 아니라 새로운 조직이라고 자신들의 잘못을 조금 인정하면서 약간 뒤로 물러나 변명을 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월든 밸로와 적키는 냉정했다. 그들은 곧바로 ‘예전의 IMF와 세계은행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조직이라면 왜 이전의 IMF와 세계은행이 빌려준 빚을 새로운 IMF와 세계은행이 돌려받고 있느냐? 당장 기존의 모든 빚을 탕감하라’고 요구했다.

세계화가 쉼터를 빼앗다

짐바브웨에서 어린 아이들의 가장 큰 소원은 ‘미국에 가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고 ‘아프리카 온라인’의 데비 말룽기사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메리칸 드림이 여전히 세계 구석구석에서 잡초처럼 생명력을 지니고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IMF, 세계은행과의 토론회가 끝난 후 ‘50년이면 충분하다(50years is enough)’ 네트워크의 대표인 적키 조로헤 제후(Njoki Njoroge Njehu)를 선두로 100여 명의 사람들이 행진해서 찾아간 콜롬비아 하이츠에는 철거 직전의 위기에 처한 엘살바도르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한때 싼 노동력으로 많은 부를 생산하는 제3세계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 이윤을 축적했던 미국은 이제 그들이 최소한의 생활 수준의 보장과 기본적인 인권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그들을 축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콜롬비아 하이츠 근처로 전철 역이 새로 들어선다고 한다. 그러자 워싱턴 시에서는 현재 가난한 제3세계 사람들이 세를 들어 살고 있는 그 지역을 재개발해서 새로운 주거지역을 형성하여 이윤을 남기고자 하였다. 영어조차 제대로 못해서 통역을 부탁해서 의사를 전달해야 했던 주민들은 시위대에게 호소했다.

“도대체 세계화가 뭡니까? 한때 막 이민 오라고 유혹해 와서 죽도록 일했더니, 이제는 나가라는 겁니까? 세계화라는 게 돈입니까?”

우리가 분열돼서는 안된다

4월 12일 캐피탈 힐 공원에서는 수만 명의 미국 AFL-CIO 소속의 철강 노동자들과 자동차 노동자들이 모여서 집회를 가졌다. 중국이 WTO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집회였다. ‘전지구적 정의를 위해 모인(Mobilization for Global Justice)’ 사람들도 중국의 WTO 가입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사이에 놓인 의견 차이는 매우 깊었다. 시위대들이 WTO 강화를 막자는 입장에서 동의하지 않는데 반해 노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들의 일자리에 대한 위협이었다. 물론 그것은 노동자들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당연한 불안감과 저항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그들의 저항이 WTO 반대로, 그리고 IMF와 세계은행 반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어려운 점이었다. AFL-CIO가 4월 16일과 17일의 시위의 참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오랜 시간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고민하다 뒤늦게야 16일의 합법 집회에 결합하기로 결정하게 된 것도 노동자들 사이에서 세계은행과 IMF 저지라는 구호가 합의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WTO 반대 국민행동(KOP A)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로 들고 갔던 양자간투자협정(BIT)도 많은 호응과 관심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한미투자협정과 한일투자협정의 체결 등은 한국 국민의 입장에서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였지만, 이미 40여개국과 양자간투자협정을 체결한 미국의 시민들은 IMF와 세계은행, WTO 등 세계적 규모의 조직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BIT에 대해서는 거의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럼에도 4월 14일, 금요일 오전에 진행된 BIT에 관한 워크숍에 참여한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함께 대처할 수 있는 연대 방안을 모색해 보는 단계까지 시도해보려고 노력했다. 특히 한국에서 참여한 ‘지구의 친구들(Friends of the Earth)’은 4월 말에 열리는 워싱턴 회의에서 BIT에 대한 의제를 상정하고 적극적으로 논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전지구적 정의를 위해 일어서라

4월 12일의 집회가 끝난 후 시위 조직본부로 사용하던 건물에 찾아온 오하이오에서 일하는 철강 노동자인 레이는 그곳에서 발견된 충격적 사실들에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한참 후에 레이는 더듬거리면서 자신이 베트남 전에 참전했었노라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당시 미국 내에서 반전 운동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노라고, 그 때만 해도 미국 정부에서 가라고 했기 때문에 한치의 의심도 없이 베트남에 갔었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 정부도 잘못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19세 청년으로서 하지 못했던 저항을 이제 30여년 가까이 지나서야 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흥분한 얼굴로 지금 당장 무엇을 도우면 되느냐고 물었다.

강은지 (민족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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