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5월 2000-05-01   1013

사교육 부채질하는 우열반 편성

올해에 초등학교 1~2학년, 2001년에는 초등 3~4학년과 중학교 1학년, 2002년에는 초등학교 5~6학년과 중학교 2~3학년, 고등학교 1학년에 속속 확대 도입하기로 한 7차교육과정은 초등1학년부터 고1까지 10년 단위의 국민공통기본 교육기간 동안 10개 과목을 가르치며 세 가지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영어와 수학을 단계별로 나누어 우열반을 편성하도록 한 「수준별 교육과정」, 국어와 사회 등 4과목을 한 반에서 수준에 따라 그룹을 나누어 가르치고 열등한 아이는 방학기간까지 나머지 공부를 시키는 「심화·보충학습」, 고2부터 필수과목을 포함하여 80여 개 과목에 달하는 선택과목을 배울 수 있는 「선택형 교육과정」이 그것이다.

수모 당하기 싫으면 능력껏 우열반에 들어가야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대학서열화가 존재하고 획일적인 입시가 있는 환경에서는 적용하기 힘든 교육과정이다. 수준별 교육과정(이동수업)을 앞당겨 실시했던 어느 고등학교의 사례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자.

「학교에서 학생들은 수학과 영어를 성적 수준에 따라 A, B, C반으로 나누어 배운다. 시험이 끝날 때마다 보따리를 싸서 반을 옮겨야 하는 수모를 겪는 것은 기본이다. 시험지를 받아보면 기가 막히다. 배우기는 수준별로 따로 배웠는데 시험지의 내용은 A, B, C반이 동일하다. A반은 100%, B반은 60%쯤, C반은 40%쯤 받아 안을 수 있도록 출제된다. 보통반은 40%, 열등반은 60%나 배우지도 않은 영역에서 출제되는 것이다. 열등생에게 60%는 어차피 모르는 영역이니 40%나 제대로 배워 점수 따는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다. 그 수모를 감당하기 싫으면 능력껏 A반에 들어가면 된다. 교사 입장에서 그렇게 하기가 양심에 꺼리지만 엄연히 국가에서 정해준 교과서가 있고, 내신관리상 공정성과 투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학부모의 감시의 눈길이 번득이고, 국가에서 출제하는 수능이 있는 한 마음대로 학생들의 수준을 성적이 아닌, 취향, 소질, 적성대로 나눌 수 없다. 잘하는 아이는 떨어질까 불안하고 못하는 아이는 영영 절망에 빠진다. 지적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이러한 사례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전국의 학교마다 비일비재한 형편이다. 교육부가 교육청을 평가하고 교육청이 학교를 평가하는 체제에서 우열반 이동수업을 앞당겨 실시하는 풍토는 이미 만연된 지 오래다. 어떤 학교들은 한술 더 떠 방과후 특기적성 프로그램을 편법으로 조작하여 영어회화를 영어과목 보충수업으로 둔갑시키는 등의 수법을 동원하여 아이들을 쥐어짜고 있다.

처음으로 7차교육과정이 도입된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의 풍경은 착잡하기조차 하다 .

‘탁구공 100개를 세어보자’는 초등학교 2학년 수학 교과서의 내용을 놓고 교실마다 촌극이 벌어졌다. 실제로 탁구공 100개를 구해오라는 지시에서부터 탁구공 대신에 바둑알을 구해오라는 궁색한 부탁에 이르기까지 ‘좋은 취지’로 만들어졌다는 새 교과서의 열린 내용이 교사와 아이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학년에서 단체용으로 10개들이 10상자를 구입해서 쓰면 될 일을 왜 걱정하느냐는 의문을 갖는 이들은 평소 초등교육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을 반성해야 한다. 숫자의 구체적 조작단계를 입체화시키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조작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자면 에누리없이 1인당 100개의 탁구공이 필요한 것이다. 새 교과서 체계가 그러한 방식으로 편집되어 있고, 그 내용에 따라 준비물을 갖추다 보면 아이들의 숙제는 도리 없이 ‘엄마 숙제’와 ‘문방구 숙제’로 전락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선생님들이 기를 쓰고 1, 2학년 담임을 기피하고 있는 이유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더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고, 공부 못하는 아이는 그만큼 쉬운 내용을 가르친다는 7차교육과정의 수준별 교육과정은 교육수준에 따른 다양한 학습방법을 목표로 삼고 있는 교육과정이라고 교육부는 자랑하고 있지만, 정작 학교현장에서는 여건의 미비와 현실의 부조화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원래 만들어 놓았던 실험본 교과서의 내용이 70%나 바뀌어져 편집되었고, 그나마 개학한 지 몇 주가 지나도록 교과서조차 공급받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속셈학원행’ 부추기는 제7차 교육과정

한국교육개발원의 한 보고서는 수준별 교육과정에 대해 「정서 발달에 미치는 효과 / 불평등의 재생산 / 전인교육에 대한 유해성 / 사교육비의 증가 가능성」 등을 들어 부정적 견해를 나타낸 바 있다. 결과적으로 7차교육과정은 전국의 엄마들이 우열반 편성과 나머지 공부에 넋을 잃어 아이들의 손목을 잡아끌고 속셈학원으로 향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결과를 낳았다. 되풀이되는 교육과정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학교 교육은 실패하고 있다. 학력 저하, 중도 탈락, 교실 붕괴, 학교 붕괴 등이 모두 학교 교육의 실패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학교 교육의 문제들이 얘기 될 때마다 교사들에게 그 책임의 많은 부분이 돌아오게 된다. 교육과정 편성 운영에 아무런 권한도 없는 교사들이 왜 교육과정 실패의 모든 책임을 지어야 할까? 교육과정 정책 실명제에 입각하여 교육과정 정책을 입안한 교육관료들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원래 7차교육과정은 1997년 12월 확정될 당시부터 집권 여당의 정책위원회에서조차 극렬하게 반대했던 정책이었다. 이 시점에서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면 우선 7차교육과정을 전면 중단하고 책임자를 문책해야 하며, 5년 주기의 전면 개편을 중단하고 장관에게 주어진 수정고시의 권한을 이용하여 필요가 있을 때마다 항시 개정하고 수시로 개편하는 체제로 전환하고, 교육과정 개발·편성 과정에 교사단체의 조직적인 참여를 보장해야 하며, 정기적인 교육과정 평가 체제를 확립해야 한다. 나아가 단순나열식 교육내용 구성 방향을 재검토하고, 교육내용을 대폭 줄이고 교과목 수를 줄여야 하며, 교육내용의 난이도를 대폭 하향 조정해야 하며, 지식 위주의 교과 편성을 탈피하고 교과구성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 따라서 교육과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보통 교양교육으로서의 초·중등 학교 교육의 목표와 지향점을 분명히 하고, 교육과정 운영방안 논의에 앞서 교육내용의 재구조화에 노력하고, 수업에서의 교사 전문성을 확립해야 한다.

5년마다 정기적으로 개정되는 교육과정은 그 동안 많은 문제를 낳았다. 교과서만 바뀔 뿐이지(출판사만 떼돈을 번다. 이 때문에 교육과정 개편을 놓고 끊임없이 교육부와 업자들간의 유착설이 제기되고 있다.) 정작 교육과정의 근간이 되는 학제, 연간 수업일수, 주당학습시수 등은 한 번도 제대로 바뀐 적이 없다. 7차교육과정은 그런 면에서 80여 개의 선택과목에 따른 교과서의 개폐에 따라 멀쩡한 교사자격을 세분화하고 많은 수의 교사들을 기간제나 계약제 교사로 채울 계획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가난한 나라는 교사의 몸 하나가 국가의 교육력을 좌우하는 유일한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교사를 대상화시키는 교육과정 정책은 결국 나라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전교조와 교육개혁시민연대가 철회를 요구하고 있고, 심지어 민주당을 비롯한 정당들조차 수시 개편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7차교육과정은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산다.

김대유 전교조 정책연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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