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5월 2000-05-01   829

그들이 결혼한 이유

그로부터 4년 후, 어디서 귀동냥했는지 기억을 더듬어 그 주인공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들이 일하는 곳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대구에 있는 ‘우리복지시민연합’. 두 사람이 몸담고 있는 직장이다. 4월 15일, 그들의 보금자리인 집으로 찾아가 아름다운 사람, 은재식(36세) 씨와 김명희(40세) 씨를 만났다.

방 세 개가 딸린 일반 주택의 대문을 넘어서 현관문을 열자 세 명의 아이들이 뛰쳐나와 인사를 했다. 아이들은 이내 자신들의 놀이로 돌아갔고, 은재식 씨는 아이들에게 “아빠랑 엄마는 손님이랑 얘기 좀 할게”라고 말하며 안방으로 안내했다. ‘아빠랑 엄마’하니 이들은 꼭 부부 같다. 그래도 오버하면 안 되니 잠자코 차근차근 궁금한 점을 묻기로 했다. 이들에 대해 조금만 언급하자면 은재식 씨는 경북대 지질학과와 서울대 지질과학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84년 선배의 요청으로 고아원에 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대학원 졸업 후 복지운동을 하는 활동가의 길을 택했다. 김명희 씨는 영남대 심리학과를 86년도에 졸업, 염색공장에서 1년 동안 현장근무, 패스트푸드점 점장 1년, 또 5년 동안의 아동복지시설에서 보육사로 있는 등 화려한 경력의 소유하고 있다.

“시설보호의 문제점은 누누이 지적되어 왔죠. 시설보호아동들이 오랜동안 시설에서만 생활하면 정서 및 욕구충족에 각종 문제가 생기죠. 저희는 이것을 ‘시설병’이라 부릅니다. 저희도 거기에 염증을 느끼다가 그러면 우리가 대안을 마련해보자고 생각했죠. 그때 한국에 ‘그룹홈’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되었습니다. 그룹홈이란 정신지체 장애인에서 출발했는데 이들은 부모가 죽으면 대책이 묘연해집니다. 그래서 정신지체 장애인과 사회적응이 가능한 사람 및 전문가가 결합해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겁니다.”

이들은 이런 개념으로 95년 10월에 ‘해뜨는 집’을 시작했다. 지금 이들 다섯 식구가 사는 집을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두 사람이 ‘해뜨는 집’에 대해 얘기를 이어가는데, 기자는 호기심을 억누를 길이 없어 대뜸, “두분은 결혼 계획은 없으십니까?”라고 내뱉었다.

“우리 결혼했습니다.”

순간 눈이 휘둥그레져, ‘언제요’라는 말이 바로 튀어나갔다.

“97년 10월 5일에 했어요.”

그러면 그렇지. 그들의 얘기는 점점 재미있다. ‘해뜨는 집’을 시작하기 전부터 그들은 선후배 관계로 절친한 사이 였다. 은재식 씨는 그 당시 복지운동에 관심 있는 학생이었고, 김명희 씨는 아동복지시설에서 보육사로 현장에 있었다. 은재식 씨로서는 김명희 씨가 대단한 선배로만 보였단다. 그러나 김명희 씨는 사람들이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부각시키는 것이 늘 부담스러웠다. 자신이 의미 있는 일을 하긴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한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자기연민과 현실문제의 딜레마의 기로에 서서 그들은 “우리가 다시 시작하자”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95년 10월 뜻을 함께 한 후배들이 주머니를 털어 1, 2만원씩 모았고, 그 중 한 사람이 거금 100만원을 내어 280만원이 걷혔다고 한다. 그 돈 으로 먼저 방 두 개를 월세로 구했다. 그리고 각자 한 방씩 썼고, 아동을 한 명 보호하고 있었으니 세 식구로 출발한 셈이다. 그때까지는 철저히 동지적인 관계였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생각하면 끔찍할 정도의 환경이었어요. 부엌에는 쥐가 득실거리고, 바퀴벌레는 말도 못했죠.”

그들의 시작에 대해 아무도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진 않았다. 그러나 김명희 씨는 “말로만 하면 뭐하노? 한번 해보면 될 거 아니가? 뭐든 돈은 두 번째다”라며 후배들을 설득했고 나를 따르라, 선봉대장이 되었다. 어렵고 힘든 고비들을 넘어 지금 두 사람은 우리사회복지시민연합의 두 축을 이루고 있다. 우리복지시민연합은 크게 사무국, 장애인복지신문, 청소년공부방, 해뜨는 집으로 구성된다. 은재식 씨는 사무국장, 김명희 씨는 홀로 장애인복지신문을 만들고, 해뜨는 집은 이 두 사람이 꾸려나간다. 그리고 앞으로 ‘위탁가정지원센터’를 설립할 예정이다. 가정위탁보호란 부모가 일시적 혹은 장기적으로 아동을 양육할 수 없거나 양육하기에 부적절할 상황에 아동보호를 희망하는 가정을 선정하여 단기적 또는 장기적으로 대리양육하는 제도이다. 대부분의 서구 사회에서는 시설보호가 아동의 성격발달이나 행동에 미치는 여러 문제로 인해 오래 전부터 가정위탁사업을 실시해오고 있다고 한다. 이에 위탁가정지원센터는 아동위탁을 상담, 위탁가정 발굴 및 교육 등 다양한 가정위탁제도를 뒷받침할 다양한 기제를 발전시킬 계획이다.

“한국은 혈연 중심의 유교 문화가 뿌리깊어서 입양이나 가정위탁이 사람들에게 생소하죠. 현재 가족제도의 파괴에 대해선 얘기하지만 대안이 없죠. 한국에서 가정 해체는 곧 시설보호라는 등식을 성립시킵니다. 시설 자체가 가지는 있는 비민주성이나 인권파괴 등의 문제가 있어 시설로 가기 전에 상담이나 정신적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는 정신치료의 과정이 생략되어 있죠.”

김명희 씨는 아동복지시설에 근무하면서 느껴온 문제점들을 극복할 만한 방안으로 가정위탁제도를 설명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을 나 아닌, 뜻있는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도 얼마나 많은 인간적인 단점이 있는데요. 어떨 땐 제 자신이 한심할 정도로 아이들과 다투기도 하고, 아이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저 자신을 괴롭히는데요.” 두 사람은 가정위탁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생각만 바꾸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난 아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숫자상으로 잡히지 않는 아이도 엄청나죠. 천사표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 돼요. 지금 상황이 불가능하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할 수 있다고 마음을 열어놓으면 돼죠. 이래 사나 저래 사나 고민 없이 살 순 없죠. 이렇게 사는 방법에 대해서도 열어놓고 생각해보면 더욱 쉽죠.”

아!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설명하다 보니 결혼을 하게 된 배경을 빠트리고 갔다. 얘기를 듣다 한참을 웃었다. 둘은 마치 친동생, 누나 같은 사이였단다. 김명희 씨 말로는 ‘피붙이’같이 느껴져 후배들과 MT를 가서도 은재식 씨 다리를 베고 누워 얘기할 정도로 밀착된 관계였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차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김명희 씨가 집안의 권유로 선을 보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다 보니 같이 사는 후배가 다시 보이게 되었다. ‘누가 나를 재식이처럼 이해할 수 있을까?’, ‘난 평생 이 일을 할 건데 오늘 본 이 남자는 나를 알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그런 생각이 발전되어 결혼식으로 이어진 것. 그러나 결혼식장에서 돌발사태 발생. 김명희 씨가 식장에 막상 와서 생각해보니 한 집에서 오래 살다보니 제대로된 프로포즈 한번 못 받아본 것 같아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고. 그래서 신랑, 신부 나란히 입장해야할 순서인데도 불구하고 “너, 나한테 프로포즈도 제대로 안 했지? 지금 안 하면 결혼 안 한다”라고 선언.

안에서는 “신랑, 신부 입장!”이라는 마이크 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는데도 신부가 꿈쩍을 하지 않자 장내는 이내 술렁거렸다.

“선배 왜 이래요? 나중에 합시다.”

그래도 신부가 목석처럼 서있자 그제서야 신랑, 무릎 꿇고 “사랑합니다”라고 구혼했고 잠시 후 신랑, 신부는 나란히 입장할 수 있었다. 이상 결혼 이야기 끝.

“위탁운동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운동이기 때문에 빨리빨리 해치워 결과를 얻어내는 사업이 아닙니다”라며 은재식 씨가 마무리했다. 그의 말을 꼬리를 물고 김명희 씨가 “천천히, 평생 할 거니까”라며 그의 마지막 말을 완전히 채웠다.

윤정은(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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