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0년 12월 2020-12-01   1037

[좌담] 공익제보의 이름으로 – 이상희 류영준 전경원

올해의 공익제보자상(구 의인상) 제정 10년 기획 좌담

공익제보의 이름으로

참여연대는 1994년 창립부터 내부비리고발자지원센터를 출범하여 현재는 공익제보지원센터라는 이름으로 공익제보자 보호 및 지원 활동을 해오고 있다. 2010년에는 공익제보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공익제보자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기 위해 의인상을 제정하여 현재까지 모두 48건(특별상 3건, 공로상 1건 포함)에 이르는 공익제보 사례를 시상해왔다. 올해 제정 10년을 맞아 ‘의인상’에서 ‘올해의 공익제보자상’으로 새롭게 명칭을 바꾸며 앞으로 공익제보 보호 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기에 앞서, 지난 10년간 올해의 공익제보자상(구 의인상)은 제보자들에게, 그리고 한국 사회에 어떤 의미였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메인-copy

이야기 손님

류영준 강원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2014년 의인상 수상(2005년 황우석 논문조작 제보)

전경원 국회의원 보좌관, 2015년 의인상 수상(2015년 하나고 입시비리 제보)

이상희 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센터 소장

‘공익제보’라는 명예 혹은 멍에

이상희 올해 참여연대가 의인상을 제정한 지 10년이 됐는데요, 그동안 많은 분들이 의인상이라는 이름이 좀 무겁지 않느냐는 말씀을 많이 하셔서, 저희가 몇 년 전부터 고민하다가 올해 처음 ‘올해의 공익제보자상’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어떠세요?

류영준 저는 좋은 거 같아요. ‘의인’이라는 단어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말이기도 해서 약간 종교색이 있다고도 느꼈거든요. 그래서 잘 바꾸신 것 같네요.

전경원 공식명칭으로는 좋은 것 같아요. 의인이라는 말이 약간 무겁고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긴 해요. (공익제보의) 문턱이 좀 높아지는 느낌이랄까요? 사실 누구나 내가 속한 조직에 대해 쉽게 문제제기 할 수 있어야 당연한 건데, 그걸 가지고 ‘의인’이라고 표현하면 뭐랄까, 목숨 걸고 살신성인해야 할 것 같은 느낌? 저부터도 흠결이 많고 가끔 실수도 하는데 과연 내가 의인이 맞나 싶고.(웃음) 아마 수상하신 분들은 그런 부담감을 다 가졌을 거 같아요.

이상희 저희가 처음 상을 제정할 당시에는 공익제보자들의 의로운 행동을 지지하고 그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드리자는 취지였는데, 매년 의인상을 시상하고 수상 소감을 듣긴 하지만 과연 이 상이 제보자들의 실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궁금하기도 해요. 수상하신 분들로서 두 분께는 이 상이 어떤 의미가 있었다고 보시나요.

캡션_이상희

전경원 저는 당시 극도의 고립 상태였어요. 학교 안에서 싸우면서 이사장으로부터 학교를 떠나라며 보복을 시사하는 말까지 듣고, 징계절차가 진행되면서 교사, 학부모, 학생들까지 나서서 그런 태도를 보이니까 아 내가 그렇게까지 큰 잘못을 저질렀나, 그동안 가졌던 생각이나 신념이 흔들리고, 깊은 우울과 좌절에 빠져있을 때 2015년 의인상을 받았거든요. 우리가 뭔가 문제제기를 할 때 명백한 사실이 있고, 그 사실에 대해서 가치 평가를 하면 진실이 된다고 하잖아요. 근데 사실을 왜곡하고 침묵을 강요할 때 저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고 수용할 수 없어서 잘못됐다고 말한 건데, 그로 인해서 엄청난 고립을 겪으며 힘들던 차에 그 의인상이 신호등의 파란불 같은 역할을 해준 거죠. 그대로 내 신념대로 가도 괜찮다고 신호를 주는, 이정표 역할을 했던 거 같아요.

이상희 류영준 선생님께서는 2005년 제보하신 이후 8년간 제보자 신분들 드러내지 않으시다가, 이례적으로 거의 10년 만에 이 상을 받으셨는데, 당시 어떤 계기로 세상 밖에 나오기로 결심하셨나요?

류영준 저는 당시 보호책이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전략적으로 접근했던 거 같아요. 제가 직접 참여연대, MBC PD수첩, 학계 3자를 엮어서 뚫고 나가겠다는 적극적 의지를 갖고 있었어요. 근데 의사들이 워낙 보수적인 집단이다 보니까 제보 이후 현실이 어떨지 눈에 뻔히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절대 세상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고, 무슨 상을 준다고 해도 다 거부하고 일단 먹고살 생각부터 했죠. 전문의도 다시 따고, 그렇게 일반인의 삶을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영화 <제보자>를 찍겠다고 찾아온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안 된다, 아직 8년밖에 안 지났다 했지만 일이 또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영화사도 밥 먹고 살아야 하니까.(웃음)

그때 다시 3자 동맹을 다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세상 밖으로 나가서 그동안 묻어놓고 덮어놨던 것들 꺼내서 다 얘기하자, 지금부터 한 10년 동안 국민들 한번 설득해보자, 그렇게 <제보자> 개봉이 결정되고 나서 저는 과학자들부터 설득했어요. 다행히 영화가 (관객) 175만 명을 넘었고, 또 EBS가 판권을 갖고 있어서 요즘도 계속 틀어주니까 초등학생인 애들도 봐요. (웃음) 그래서 지금은 찍길 잘했다 싶죠.

이상희 당시 참여연대와 PD수첩에 제보하신 과정이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첩보전을 방불케 했는데, 세상 밖으로 나오기로 결심하신 이후 받은 의인상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요.

류영준 의인상 받은 덕분에 연대가 더 확장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때 최승호, 한학수, 이재명 다 와서 축하해주고 사진 찍고 우리끼리 너무 행복했지만, 사실 2010년 제1회 의인상 시상식 갔을 때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나는 그래도 십몇 년 지났지만, 한창 사막 같은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분들 이야기를 듣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대부분 제보자가 비슷한 경험을 다 하기 때문에 그분들이 당시 어떤 상태라는 게 저는 한눈에 보이죠. 저한테 의인상은 장기적인 투쟁 속에서 연대의 폭을 넓혀주고 제가 걸어왔던 길을, 지금 시작하시는 분들에게는 제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고민하게 하는 그런 계기였어요.

공익제보에 ‘성공’이 있을까

이상희 한편으론 의인상을 받은 공익제보자 분들이 그 상패를 집에 갖다 놨을 때, 혹시 그걸 보면서 계속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리시진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들었던 거 같아요. 언젠가 한 수상자께서 집에 의인상을 갖다놨더니 아이들과 그걸 보면서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뿌듯하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그 후로 제가 걱정을 좀 내려놨습니다만…혹시 두 분께서는 상패를 보면서 과거가 떠올라 힘드신 적은 없으셨나요?

전경원 저도 책장에 놔뒀는데, 물론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적도 있지만 5년이 지난 지금은 그 상을 볼 때마다 위로가 많이 돼요. 그래, 내가 그때 외압에 굴복하지 않고 싸웠었지 이런 생각이 들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상이 저한테는 하나의 긍지나 자부심의 상징이 된 것 같아요.

류영준 어찌 보면 저 같은 ‘성공한 제보자’가 어떤 분들께는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늘 마음의 짐이 있어요. 혹시 내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픈 사람은 없을까, 그게 항상 미안하고요. 우리가 상을 받았다는 게 벼슬도 아니지만, 혹시 혜택을 못 받은 누군가들에게는 좀 미안한 마음이 들죠.

이상희 공익제보자들 가운데 제보한 사건의 진실 규명이나 피신고자들에 법적 책임을 제대로 묻기 위한 활동을 하시다가 사건 자체에서 못 벗어나고, 그런 오랜 활동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 애쓰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분들이 언제쯤 굴레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지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류영준 그런 분들일수록 우리가 더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상을 다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당신을 인정한다, 스스로도 자신을 좀 인정 하고, 우리 자리에 초대해서 같이 이야기할 기회나 손길이 더 필요하거든요. 누가 보더라도 ‘공익제보다’ 인정할 수 있는 제보만 있는 게 아니라서,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지 못하는 공익제보자들도 마음속 상처는 다 같을 겁니다.

전경원 저는 성공한 공익제보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사건이 잘 해결돼도 상처는 어마어마하니까요. 공익제보에 성공이라는 표현이 굳이 필요할까, 예를 들어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그건 성공한 공익제보일까요? 그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고통을 생각해보면 어떤 제보도 성공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거 같아요. 제보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공익제보자들도 스스로 받은 상처가 너무 크고 아프니까 인정받고 싶고, 그래야 정신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셨을 텐데, 주변에서라도 격려하고 지지하고 연대해주면 되는데, 그게 안 될 때는 온전한 마음으로 견디기 어렵죠.

이상희 의인상 시상식 때 가족이나, 지지해주는 분들이 같이 축하해주시는데, 저는 그게 참 보기 좋더라고요. 공익제보자상(의인상) 받으신 분들은 대부분 그런 지지 세력이 함께 움직여주셨기 때문에 그 힘든 시간을 견디고 의미 있는 제보를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브

가릴 수 없는 진실, 그 앞에서

이상희 류영준 선생님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진실의 문을 열기로 한 제보를 하기로 한 결정타가 ‘분노’였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분노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요.

류영준 공익제보자들의 제보 동기는 여러 가지겠지만 누구나 참을 수 있는 사실이 있고, 아 이것까진 도저히 안 되겠다, 이걸 참으면 내가 죽느니만 못하겠다 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임상시험이었죠. 그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거거든요. 의도가 좋고 절차만 잘 지키면 괜찮은데, 그 사람은 동기가 너무 불순했죠. 어떻게든 빨리 임상을 성공시켜서 노벨상 탈 목적으로 달리니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거죠. 지금도 사회생활 하다 보면 세상에 온갖 나쁜 일이 참 많지만, 생명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더라고요. 제 (분노의) 기준은 어쨌든 생명, 사람 목숨, 뒤돌아봐도 그건 확실한 기준이었던 거 같아요.

이상희 2013년에 영화 <제보자>가 만들어지면서, 선생님을 세상 밖에 드러내기로 결정했을 때, 가장 먼저 학회를 설득했다고 하셨는데 그때까지도 황우석 논쟁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던 건가요.

류영준 마무리 정도가 아니고, (논쟁을) 그대로 덮었던 거죠. 제보 후에 한 8~9개월 온 나라가 시끄러워지니까 세간에서는 빨리 기소해서 잊고 싶었을 거고, 어차피 재판에서 가려질 거라면서 결국 덮었죠. 그러다 보니까 제가 다시 나가는 순간 그 덮어놨던 게 그대로 올라와서 폭발하더라고요. 제가 과학자들을 먼저 설득했던 이유도, 그래도 과학자들이니까 팩트 앞에서 터무니없이 우기지는 못하거든요. 그래서 우군으로 만든 후에 같이 싸우려고 먼저 설득한 거죠. 그러다가 끝판왕까지 나와서 저를 고소하는 바람에.

이상희 그 고소 건 관련해서, 박근혜 정부 때 줄기세포 연구에 황우석 씨가 관여된 부분이 드러나면서 2016년 말 결국 황우석 씨가 류 선생님을 고소하면서 화룡점정을 찍었죠. 그때는 심정이 어떠셨어요?

류영준 사실 저는 그렇게 피해를 당해도 누구 하나 고소고발 안 했거든요. 근데 황우석이 저를 고소하니까, 올 게 왔구나,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마무리 짓자, 이런 생각이 강했죠. 뭐랄까, 저는 좀 당당하다고 할까, 어찌 보면 잘 됐다, 이번에야말로 대단원의 막을 좀 내렸으면 좋겠다 싶었죠. 운명 같아요, 일련의 일들이.

이상희 전경원 선생님도 당시에 정말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공익제보 이후에 선생님이 작사하신 하나고 교가까지 치졸하게 바꿨다고 들었어요.

전경원 당시 하나고 설립추진단장이 하나금융그룹 부회장이었는데, 저를 포함한 여섯 명을 개교준비위원으로 뽑아서 교가 작사에 한 번 참여해보라고 했어요.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심혈을 기울여서 작사했는데 제 가사가 선정된 거죠. 나중에 들어보니 작곡가 분이 전문 작사가들한테 몇백만 원 씩 주고 맡겨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여기 선생님이 쓴 가사로는 작곡할 수 있겠다고 해서 선정된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나 긍지가 있었는데 점점 학교가 망가지는 걸 보니까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막 싸웠는데 어느 날 교감 선생님이 저한테 교가 가사를 바꾸게 됐다고 미안하다고 하시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이게 교가 가사까지 바꿀 일이냐, 그럼 여태까지 이 노래를 부르고 졸업한 아이들은 뭐가 되고, 지금 재학 중인 애들은 매일 부르던 교가가 바뀌는 건데 그래도 되는 거냐고, 그때 받은 충격은 굉장히 컸어요. 그러고 나서 해직됐다가 다시 복직해서 학교 행사에 갔는데 제가 5년 동안 듣던 교가가 바뀌어 있으니까, 그걸 듣는 것도 참 고통스럽더라고요. 교가까지 바꾼 건 정말 너무 치졸하다는 생각이 들고, 나중에 선생님들이 그러시더라고요. 원래 가사가 훨씬 좋다고. (웃음)

캡션_전경원

이상희 교가를 작사할 정도로 애정했던 학교인데, 그 안에서 문제제기를 결심하셨을 때는 어느 정도 변화가 가능할 거라는 기대가 있으셨던 건가요.

전경원 그렇죠. 저는 될 거라고 생각했죠. 근데 지금 보면 그 공포는 굉장히 컸던 거 같아요. 지난 주말에도 MBC <스트레이트>를 보는데 론스타 관련 보도에 그 이사장 얘기가 또 나오더라고요. 이명박 대통령이랑 고대 경영학과 61학번 동기라는 연줄이나 배경을 내세워서 금융계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던 사람이니까요.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봤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한번은 기흥에 있는 하나은행 연수원에서 교직원 연수를 했는데 마침 은행지점장들 회의가 있었나 봐요. 그 앞에 검정 세단들이 쫙 세워져 있는데 마치 조폭 영화처럼 도열해서 인사하더란 말이죠. 그런 거에 익숙한 사람한테, 평교사가 와서 학교에 대해서 이사장님 이러시면 안 된다, 왜 알면서 방조하느냐, 이건 잘못된 거 아니냐, 이러쿵저러쿵 막 따지니까 황당했을 것 같아요.

이상희 그렇게 문제제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벽을 느낄 때 보통은 포기하게 되잖아요. 그것까지 넘어서게 한 건 어떤 힘이었을까요?

전경원 근데 제가 알고 있는 진실이란 게 있잖아요. 그걸 왜곡하고 굴종을 요구할 때는 도저히 굴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분이 저를 앉혀놓고 조용히 학교를 떠나라, 지금 떠나지 않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못 견디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그 순간 “알겠습니다. 다른 학교로 가겠습니다.” 이렇게 해버리면 두고두고 제 인생의 오점이 될 거 같았어요. 부정입학이라는 명백한 사실이 있고, 2년 동안 권력자 아들이 학교에서 한 짓을 학생들도 다 알고 있는데 문제제기 했다는 이유로 제가 떠나버리면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봐라, 저런 얘기 하면 결국 쫓겨난다, 저럴 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야” 애들이 그런 경험을 하고 사회에 나가서 또 권력자가 부당한 행보를 보였을 때 어떻게 행동할까, 생각하니까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는 파면당할 때 당하더라도 갈 때까지 가보자, 나중에 학원 강사라도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다 던지고 싸우니까 어느새 구도가 불리하지 않게 돌아가더라고요. 갑자기 국정감사에서 교육상임위 위원들이 문제를 크게 다뤄주고, 참여연대랑 호루라기재단에서도 도와주고, 은평지역 주민들이 매일 아침마다 학교 앞에서 피켓시위도 해주시고, 그런 힘이 없었으면 아마 혼자 싸우다가 포기하고 쓰러졌겠죠.

이상희 하나고가 자사고다 보니까 일반 학교보다도 학부모들의 반대가 더 심했을 것 같아요. 당시 학부모들이 선생님에 대한 비판 성명을 냈을 때 고립감은 꽤 크셨겠어요.

전경원 정말 죽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죠. 제가 아침 7시 30분에 출근해서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검정 옷을 입은 어머니들이 쫙 서 있어요. 제 자리 사방에는 검정 도화지에 하얀 글씨로 “전경원은 사직하라, 전경원은 물러가라” 피켓이 있고요. 어머니들이 제 시간표를 다 아니까 조를 짜서 제가 수업 있을 땐 어디 가서 쉬시다가 수업 끝날 때쯤 와서 계속 침묵시위를 하는 거죠. 문제는 거기가 교무실이잖아요. 그때 제가 한창 수시 추천서를 써줄 때였는데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교감 선생님한테 학부모님들 의사표현은 존중하지만 교무실은 적절한 공간이 아닌 거 같다, 제발 시위를 다른 곳에서 하게 해달라고 정중하게 보냈어요. 그랬더니 “힘드신가요? 학교도 힘듭니다”라고 답이 오더군요. 그런 시간이 몇 달 지속되니까 나중엔 불면증에 시달리고 새벽에 눈을 뜨면 학교 가서 겪어야 할 모멸감과 수치심부터 떠오르더라고요. 그냥 사직서 쓰면 끝날 일인데, 또 그러자니 마음으로 온전히 승복이 안 되고. 그래서 끝까지 이를 악물고 버틴 거죠. 5년이나 지났는데 지난주에 또 고발인 조사 갔다 왔어요. 이 사건은 아직 진행 중이에요.

이상희 저희 센터로 들어오는 공익제보 가운데 가장 많은 유형이 사학비리예요. 근데 이분들은 단지 보호뿐 아니라 제보가 진실로 규명되고 가해자가 책임지고 처벌받기를 바라시는데 저희가 사학운동을 하는 센터는 아니다 보니까 늘 안타깝고 운동의 한계를 느끼는데요, 사학비리 제보를 고민하시는 선생님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전경원 저도 겪어보고 나니까 선뜻 용기 내서 제보하시라고 말하기가 곤혹스러워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진실이 있는데, 그걸 외면하거나 침묵했을 때 지게 되는 마음의 짐이나 빚이 있을 거고, 두렵긴 하지만 그걸 바꿔보기 위해 시도하고 노력했을 때 겪게 될 불편하고 힘든 시간이 있을 거예요. 그 둘을 비교해보면 시도를 해보는 것이 침묵이나 외면을 선택했을 때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훨씬 더 마음의 짐이나 부담을 덜게 될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또 교육현장에서 선생님들이 문제를 발견했을 때 침묵하지 않고 변화할 수 있으려면 어쨌든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정상적인 사회라면 문제제기만으로 불이익 받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요. 주변을 돌아보면 분명히 도와주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혼자 고민하시기보다, 참여연대나 호루라기재단 같은 곳과 연대를 통해서 해결하는 방안을 권해드리고 싶어요.

누구나 마음속에 송곳이 있다

이상희 제보자들은 제보 이후에 엄청난 삶의 변화를 겪게 되잖아요. 그런데 사회적 낙인과 편견 속에서도 어쨌든 내 삶을 영위해야 하는 거고, 고꾸라지려고 할 때마다 계속 나를 세워서 그 길을 덤덤하게 걸어가게 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요. 두 분은 어떠신가요.

전경원 그 뭔가가 진짜 있거든요. 마치 자전거 처음 배울 때 느낌이랑 비슷하달까요. 처음엔 계속 넘어지다가 어느 순간엔 누가 잡아주지 않아도 혼자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는 것처럼요. 공익제보 하기 전에는 잘 몰랐는데, 예전에는 저 사람이 무슨 회장이고, 대통령의 절친이고, 금융권의 뭐래, 이러면 괜히 그 앞에서 말하기 거북하고 불편하고, 그런 권력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있었다면 이런 일을 겪고 난 후에는 약간 그런 두려움이 좀 없어진 거 같아요. 이젠 그게 누구라 할지라도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어떤 권력이나 권위로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저 사람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잘못된 건 말할 수 있게 된 거. 이런 게 공익제보 경험을 통해서 학습된 소중한 가치죠. 그런 게 살아가면서 힘이 되는 것 같아요.

류영준 동양 고전에 노추老錐라는 말이 있어요. 오래된 송곳이라는 뜻인데, 송곳은 끝이 뾰족하잖아요. 그게 악력을 모으면 바위도 뚫거든요. 그 한군데로 모으는 힘이 저는 진실 같아요. 제가 경험해봐서 알지만 진실의 힘은, 대단히 강력하니까요. 공익제보를 하는 사람들은 다들 마음속에 송곳이 있을 거예요. 아주 큰 강력한 적이라도, 딱 집중하면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캡션_류영준

이상희 그런 점에서 앞으로 저희 공익제보지원센터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전경원 공익제보가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척박한 영역인데, 그런 환경 속에서도 잠재적인 공익제보자들을 위해 참여연대가 해온 역할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해요. 그 부분에 우선 굉장히 큰 감사를 드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제보자들이 하는 문제제기가 대개 정당한 경우가 많은데 그만큼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큰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을 어떻게 수렴하고 연대하고 공유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공익제보자상이 견지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일 년에 한 번 행사 때마다 늘 제보자들이 말씀하실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그걸 효율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방안을 더 많이 고민해주시면 좋겠어요.

류영준 저는 역할분담이 좀 필요하다, 이런 말씀 드리고 싶어요. 지금 서울시교육청 내 공익제보센터에 시민단체 출신 베테랑 분들이 꽤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보자들이 찾아가면 비공식적으로 그렇게 말씀하신대요. 시민단체 찾아가면 이런저런 도움 받을 수 있다고. 물론 제보자 보호 관련 법률이 많이 생겼지만 아직 초기고, 미비하기 때문에 여전히 (역할을) 서로 조금씩 미루는 경향이 보이기도 해요. 제 눈에는. 제도적인 부분이 충족될 때까지는 서로 도와가면서 해야 하는데, 국가기관의 역할, 시민단체의 역할이 각기 다를 테니 역할분담이 잘 되면 빈틈없이 지원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한 사람의 제보자를 두고 그걸 통합하고 연결시킬 역할이 필요하고, 그건 제가 볼 땐 시민단체가 비공식적으로 담당할 수 있는 영역이 훨씬 많을 것 같아요. 그 부분을 좀 맡아서 역할분담을 해주셨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정리. 미디어홍보팀 이한나

사진. 박영록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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