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8월 2003-08-01   1477

‘별밭으로 이사한 우리집에 놀러와요’

도시 직장인의 “전원생활” 이야기


5년 전 그의 집에 놀러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곤지암 통나무집이라…. 생각만 해도 낭만이 샘솟아 “멋모르고” 차를 끌고 갔다가 낭패를 당했다. 폭설이 내린 고갯길에, 차가 딱 멈춰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동승한 네 명이 힘껏 밀어 차가 “별밭” 그 집 앞에 섰을 때, 우린 나무에 걸린 흰 눈을 삼키며 깔깔거렸다. 폭염의 7월, 숨막히는 사무실에 앉아 있지만,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집 마루에서 내려다보던 겨울풍광이…. 편집자 주

“집이 어디죠?” “곤지암입니다.”

“아니 고향집말고 지금 살고 있는데 말이에요.”

내가 경기도 곤지암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런 반응을 보인다. 중부고속도로를 한참 달려 톨게이트를 빠져나간 뒤 양평, 여주 경계선까지 10km쯤 더 들어간 산속에 스무 평짜리 작은 집을 지어 이사한 게 벌써 5년 전 일이다. 우리 부부와 아이들의 삶을 바꿔놓은 중대한 사건이었지만 그 일이 충분한 고민 끝에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주저하게 되는 부분이 많다. 어쩌면 상황에 떠밀렸다고 말하는 게 더욱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신혼 초 우리는 경기도 안양의 10평 남짓한 다가구 주택에 살았다. 삶이 고단한 이웃들은 자주 부부싸움을 했고, 그 탓인지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온갖 이웃들의 복닥거리는 소리는 우리 부부에게 ‘삶이란 이리도…’라는 비감한 생각에 빠져들게 했다. 그 무렵 ‘마당에서 개도 키우고 텃밭도 갈아먹으면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던 것 같다.

“선배, 마당에서 개 키우면서 살고 싶다 그랬수?”

1996년 어느 날 밤, 충청도 출신인 한 후배의 전화를 받으면서 우리 가족의 시골살이는 대책 없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언론사 부동산 전문기자인 후배는 일찌감치 우리 마을 근처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 집을 짓고 있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우리 부부는 후배의 ‘조언’에 따라 전재산에 해당하는 3000만 원을 대출받아 우선 땅 200평을 사둔 뒤, 전세를 빼서 공사 대금을 충당하기로 하고 ‘곤지암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지긋지긋하다고 떠들던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꿈꾸던 전원생활을 할 수 있게 되다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빙긋이 웃곤 했다.

전세금 빼서 대출금 갚고

그러나 시골살이에 대한 낭만적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현실의 시고 쓴 어려움은 폭풍처럼 커져갔다.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감당하기 힘들만큼 대출을 얻어 땅값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IMF 구제금융사태가 터졌다. 첫 시련은 가장 강력하고 치명적이었다. 은행 대출금 이자가 연 20%로 치솟고, 다니던 회사의 월급은 상여금을 삭제하고 터무니없이 줄어든 채 지급되는 믿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졌다. 황급히 전세금을 빼서 대출금을 갚아야 했고 그때부턴 덜렁 남은 시골의 맨 땅 말고는 우리가 거처할 곳이 없어 길에 나앉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친구가 미국 이민을 준비하면서 몇 달 비워둔 집에 임시 거처를 구한 채 전전긍긍하며 몇 달을 버텨야했다. 다행히 1999년 경 은행이자는 진정됐고 우리는 달리 선택의 가능성도 없어 무작정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다시는 집을 짓고 싶지 않을 만큼 ‘고난의 행진’은 계속 됐다. 운전 경험도 없던 아내가 서울 응암동에서 경기도 곤지암까지 거의 매일 세 살, 다섯 살 두 딸을 태우고 출퇴근을 하면서 공사를 진행했다. 좌불안석이긴 했으나 나는 회사에 출근해 진행상황을 전해 듣는 게 고작이었다. 약속과 규정대로 진행되는 게 하나도 없는 주먹구구식의 현장논리, 그리고 다른 현장과 공사를 병행하고 있던 건축업자와 목수의 태업으로 인한 공기 지연, 결국 세 달이나 입주가 늦춰지면서 1999년 초겨울 동안 우리 네 식구는 한달 가까이 처가와 친구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안타까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힘겹게 진행되던 공사는 결국 업자가 파산하는 바람에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끝났고 우리는 도배와 장판을 깔고 겨우 구색을 갖춰 그 해 크리스마스 무렵, 감회어린 이사를 했다.

지금은 이웃에 서너 채 집들이 들어섰지만 그때는 캄캄한 산속에 우리 집 거실의 불빛만 힘겹게 어둠을 몰아낼 때가 많았다. 이사한 첫 날 안방에 온 가족이 함께 누워 전등을 모두 끄자 새카만 어둠 속에 마치 일부러 그려놓은 장막이라도 드리운 듯 총총한 별빛이 빼곡하게 창에 들어찼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어릴 때나 군대에서 보초 설 때 말고는 그간 밤하늘에 별이 있다는 것조차 잊고 살았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그 간의 숱한 고생이 총총한 별빛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다 보상되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날 밤 아내와 나는 우리 동네 지명이 본디 무엇이든 개의치 않고 우리 마음대로 ‘별밭’으로 명명하기로 했다.

마당을 수놓은 보랏빛의 제비꽃 타래붓꽃

서울에 살 때, 우리 부부는 일요일 저녁이면 어린 두 딸의 손을 잡고 하릴없이 집 근처 골목길을 배회했다. 떡볶이나 순대도 사먹고 서점을 기웃거리고 전철역 주변에 나앉은 노점 할머니들에게 꼭 필요하지도 않았던 푸성귀나 잡다한 물건을 사기도 하면서 어슬렁거리는 일을 일종의 레저처럼 즐기곤 했었다. 그러나 별밭으로 이사한 뒤로는 자잘한 도시 재미는 접어야 했다. 또 밤 12시에도 문만 열고 나가면 맥주나 통닭, 아이스크림이든 뭐든 마음대로 사다먹곤 하던 일들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해가 지고 나면 가족들은 어지간히 큰 일이 아니면 외출을 포기한다. 도시에서 이중삼중의 자물쇠를 잠그고도 불안한 마음에 쉽게 잠들지 못하던 아내가 깊은 산속에서 어린 두 딸과 별 두려움 맘 없이 편히 지내는 것은 물론이고 자정 무렵 퇴근하는 나를 데리러 곤지암까지 오는 데도 별스럽지 않게 넘긴다.

시골에 이사 가서야 비로소 나는 별빛을 헤아리려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고, 계절마다 바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겨울 지나고 해토 무렵 언 땅이 녹으면서 어떻게 부드러운 감촉이 발끝에 전해오는지, 계절에 따라 해가 지는 위치와 노을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꽃다지와 솜양지 노란꽃이 지고 나면 타래붓꽃 제비꽃의 보랏빛이 타들어 갈듯 마당을 수놓는다는 것, 그 무렵 꽃보다 더 아름다운 신록이 엷은 안개처럼 숲 속에 번져 가는 일들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도 처음 깨달았다.

그러나 시골생활이 이렇게 달콤하고 낭만적인 경험만 있는 건 아니다. 도시의 인위적인 환경이 결국 자연의 험난한 조건으로부터 일상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집적된 것이라는 사실 또한 혹독한 겨울과 여름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폭설이 내린 2001년 겨울에는 걸핏하면 버스조차 끊겨 며칠씩 처가로 피난살이를 하다 근 1주일만에 길을 뚫어가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폭설에 갇힌 연휴 때에는 등산용 스패츠와 방풍 재킷으로 무장한 채 배낭을 메고 산 아래 마을까지 ‘보급투쟁’을 나가듯 아이들 과자와 반찬거리를 사러 간 적도 있었다. 서울에 전화하면 아침에 눈발 날리다 그쳤다는 정도일 때도 우리 동네는 강한 눈보라에 휩싸여있기가 십상이었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오전 내 겨우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쳐 길을 뚫고 출근해보면 서울에는 눈 온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태연한 풍경인 경우도 많았다. 태풍이 불어오는 8월 하순엔 폭우로 곳곳에 길이 끊기기도 한다.

이제는 서울로 돌아가려고 해도 몇 번의 부동산 파동이 부풀려놓은 집 값 때문에 불가능해졌다. 해질 무렵 온 가족이 배드민턴을 치고, 소원대로 암캐 ‘평강이’가 꼬리를 치며 뛰어다니는 마당이 있고 마음껏 음악을 틀어놓거나, 아이들이 쿵쾅거리며 뛰어 놀아도 아래 윗층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좋은데, 우리 집을 팔자고 시장에 내놓자면 5년 전이나 다름없이 보잘것없는 싼값이 매겨질 게 뻔하고 그 돈으로는 서울의 작은 전셋집도 구할 수 없는 형편인 것도 억울하지만 현실이다. 강남의 재개발 11평 아파트가 5억 원도 넘는다는 말을 우린 그저 딴 세상 얘기처럼 멍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우린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선택을 옳다고 믿어야 하고 실제로도 그렇다.

요즘 아내와 나는 이사 와서 동네를 우리 마음대로 ‘별밭’으로 명명한 것처럼 ‘우리 집을 10억 원도 넘는다’고 생각하자, 누가 바꾸자고 그래도 절대로 안 바꿔’ 이렇게 생각하자며 실속 없이 웃는 일이 많아졌다. 우리가 자기 삶의 주인 된 지위를 좀 더 분명히 찾게 돼 서울로 노동을 팔러 다니지 않아도 되는 ‘그날’을 꿈꾸며 우리는 10억 원도 넘는 저택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우리 마음대로.

김성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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