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4월 2000-04-01   1219

길버트 그레이프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영화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김홍준 감독의 「장미빛 인생」이 그랬고, 최근의 「인생은 아름다워」와 「나라야마 부시코」 「박하사탕」이 그랬다.

「길버트 그레이프」도 바로 그런 영화중 하나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버겁거나 행복하다는 느낌보다 ‘일상의 지리함에서 벗어난 주인공과의 동화’라고나 할까? 자막이 올라가고 가벼운 음악이 흐르는 동안에도 화면에서의 주인공들이 멀리 도로 위로 사라질 때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나도 모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영화로 기억된다. 그러나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장애우를 둔 가족의 고민이 일상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현되긴 했지만 특별히 ‘장애우가족 이야기’로 기억에 남진 않는다. 그 때 당시 장애우와의 경험도 거의 없었고, 내가 장애우와 관련된 일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어니’라는 중증·중복 장애우 역을 잘 소화해 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력과 주인공 길버트(조니 뎁)의 묵묵한 성격에만 빠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일터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일하게 된 후,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이 영화는 나에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연구소에서 부설로 운영하고 있는 ‘장애아동가족지원센터’의 일을 하면서 당사자나 가족들을 만나기 때문에 그들의 쉽지 않은 일상을 몸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사회정책 수준이 후진국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고, ‘장애’를 ‘무능력’과 연결시켜 교육권과 노동권, 접근권 등의 기본권조차 싸워야 보장되는 사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직도 ‘장애’를 당사자와 가족에게 책임지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그런 장애우를 둔 가족의 젊은 가장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길버트는 홀어머니에 2남 2녀를 둔 집안의 가장이다. 먹고 살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지만 삶의 여유나 희망은 찾아볼 수 없고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7년 동안 집 밖 출입을 전혀 하지 않는, 몸무게가 너무 많이 나가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어려운 어머니의 시중을 들어야 하고, 정신지체에 자폐를 가진 중복 장애우 동생 ‘어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써야 하며, 자신만 아는 철없는 여동생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게다가 길버트는 같은 동네의 유부녀와 관계를 맺으며, 언제 그녀의 남편에게 들킬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해 전전긍긍한다. 그러다 할머니와 긴 여행을 하고 있는 한 여자를 만난다. 풋풋하고 맑은 느낌의 줄리엣 루이스. 길버트는 ‘어니’ 덕에 자연스럽게 그녀와 친해진다. 그녀는 길버트의 가족관계와 일상을 알면서 그가 진 생활의 무게를 덜어주고 싶어 그를 가까이 한다. 그러나 별다른 방법이 아니다. 그저 옆에서 즐거운 일상을 만들고 함께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또 다시 긴 여행길에 나서야 했고, 둘은 아쉬운 이별을 한다.

이후 길버트는 젊은 나이에 비해 너무나 무거운 일상을 이어가는 자신을 돌아보며 생활을 바꿔보려고 고민한다. 그 때 사랑하지만 일상의 부담이었던 어머니가 죽음을 맞는다. 어머니를 관에 넣으려면 특수제작을 해야 하고, 어머니의 시신을 끌어내리려면 ‘포크레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들은 그간 생활의 중압감으로만 여겨졌던 집을 함께 태우는 것으로 장례식을 대신한다. 그리고 여행길에서 다시 돌아온 그녀와 길버트, 어니는 함께 떠난다. 그들을 억누르고 있던 모든 것을 태워 날려버리고…. 두 번째 이 영화를 보면서, 한국적 상황과 다르긴 하지만 ‘장애우 가족은 마찬가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구나’를 느꼈다. 장애우의 삶과 그 가족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언제든 한 번쯤은 볼만한 영화인 듯 싶다.

여준민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 간사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