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4월 2000-04-01   1193

4 · 3 제주항쟁을 아십니까?

“안녕하세요? 사랑과 낭만이 가득한 섬, 제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바람·돌·여자가 많다하여 삼다도라 불리는 제주의 대표적 관광지로는 한라산을 비롯 성산일출봉, 용머리, 섭지코지, 산방산 등이 있습니다. 아, 그리고 옥빛 물결 출렁이는 남태평양의 분위기를 즐기고 싶다면 함덕해수욕장에서 사진 한컷, 놓치지 마세요. 그럼, 목적지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탄가루를 뭉쳐 나무젓가락으로 구멍낸 것처럼 부셔질듯 부셔질듯 17세기를 버텨온 현무암과 쪽빛 바다. 고려왕조때 몽고의 침략을 받자 삼별초가 최후의 거점으로 삼아 대몽항전을 치렀던 저항의 섬, 제주.

봄볕 내리쬐는 까만 돌담장 아래 곱게 자란 유채도 넋을 잃고, 낮은 언덕처럼 형성된 오름도 기염을 토할 뿐이다,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살려줍서, 살려줍서”

세 살바기 딸아이를 등에 업은 한 아낙이 군인이 겨눈 총부리를 향해 두손을 모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다시 한번 애걸해 보지만 소용없다. 일순간 총알은 그녀의 옆구리를 관통하고만다. 아홉살난 아들이 “어머니”하고 매달리니, 그 어린 것에게도 총알은 깊숙이 박히고, 오히려 심장을 토해낸다.

1947년 3월 1일 제주읍내에서는 3·1절 시위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 6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발했다. 당시 미군정은 좌익계의 선동에 의해 시위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포했다고 밝혔지만 일반 대중의 인식은 ‘일반 도민에 대한 무차별 발사’라는 것이었다. 6명의 사망자가 초등학생, 젖먹이를 안은 아낙, 장년의 농부 등 대부분 구경하던 군중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주도민은 더욱 분노했다. 그러나 미군정당국은 경솔하기 짝이 없는 이 발포사건을 정당방위로 주장,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열흘 뒤, 제주에서는 민관합동 대규모 총파업이 진행됐다. 발포경관의 처벌, 경찰 수뇌부의 인책사임, 희생자 유족보상 등을 요구하면서 3월 10일 도내 156개 관공서, 국영기업 단체들이 파업에 참여한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미군정도 서울사령부의 카스티어 대령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시켰고, 이 파업은 3·1절 경찰발포로 인해 도민의 감정이 고조된 틈을 타 남로당이 이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후로 파업주모자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졌다. 3월에만 421명의 경찰과 서북청년단원이 제주로 내려왔고, 도지사가 비제주인으로 교체됐다. 그러면서 경찰과 서북청년단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조금이라도 불평하는 주민들이 있다면 그들을 무자비 연행, 투옥, 고문했다. 심지어 억지로 죄인을 만들어 금품을 갈취하는 백색테러가 자행되기도 했다. 이렇게 된지 한달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간 2,500명이 구금됐다. 특히 1948년 3월로 들어서면서 조천지서와 모슬포지서 등지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사건이 발생, 제주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져만 갔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 당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개입한 가운데 어떤 정부로 갈 것인가를 두고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남한만의 단독선거인 ‘5·10선거’를 치르게 됐고, 당시 좌파계열의 남로당 제주도 조직은 이에 대한 반대운동에 적극 나섰다. 실제 남로당 제주조직은 군정당국에 등돌린 민심을 자극, 1948년 4월 3일 새벽 “통일국가 건립을 가로막는 5·10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슬로건을 걸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광란의 칼바람이 휘몰아쳤던 그때, 대다수 제주도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한 희생을 당했고, 당시 섬 주민을 27만 명으로 규정했을 때 전체 인구의 9명중 1명이 희생됐다고 제민일보 ‘제주 4·3 양민학살사건’ 취재반은 전하고 있다.

그로부터 52년이 흐른 2000년 봄, 다시 제주를 찾는다. 신혼부부들의 ‘똑같은 사진찍기’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성산일출봉과 함덕해수욕장 또는 마라도행 배를 타는 모슬포, 제주 국제공항이 무고한 양민을 대상으로 군경이 총포를 퍼부었던 학살터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2000년 3월 10일 오후.

햇살 가득한 오후지만 제주답게 바람은 셌다. 제주에서 만난 월간 『작은책』 김민호 기자와 우리 일행은 제주범도민회 문용포 시민사업위원장의 안내를 받아 짧은 역사기행을 시작했다.

처음 찾은 곳은 남제주군 안덕면 동광리. 4·3 이전 이곳은 150여 가구들이 모여 살던 제법 큰 마을이었다. 일명 ‘무등이왓’이라 불리는 그곳에선 1948년 11월 14일 마을 유지 9명이 학살됐고 11월 21일엔 이 마을 주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과 방화가 자행돼 상당수의 주민이 죽고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다. 그래서일까? 지금 그곳엔 집터만 남아 있고 아무도 살지 않는다. 을씨년스런 분위기속에 검은흙을 비집고 웃자란만 주홍빛 당근만 우릴 반길뿐 사람의 온기는 느낄 수 없었다.

게서 차로 달려 10분거리. 한참동안 걸어 억새와 가시나무를 제치고 지나니 동광 큰넓궤(넓궤 : 동굴)가 나온다. 그 당시 토벌을 피해 이주한 동광리 사람 120여 명이 50∼60일간 숨어 살았다는 삶터. 동굴 입구부터 배를 바닥에 바짝 붙이고, 가능한한 길게 다리를 뻗어 죽죽 밀어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이다. 가져간 두개의 랜턴중 하나는 불빛이 약해 못쓰고, 오로지 한개의 랜턴에 의존해 4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컴컴한 땅 아래로 깊숙이 패인 천연동굴에 발을 내리고 쿵 떨어지니 전형적인 제주가옥 스타일로 돌을 쌓아둔 ‘대문’이 나온다. 입구에서 보면 그 밖의 왼쪽이 화장실이고 안쪽의 왼쪽이 부엌이었다고. 깨진 토기들이 그대로 널부러져 있는 것으로 봐선 아직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드물어 52년전 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대문을 지나 20여 분, 바닥에 코를 박고, 기어가다 만난 박쥐들. 그들이 깰까봐 랜턴 한번 제대로 못비추고 숨죽이며 헉헉댄다. 종루석에 머리도 찔리고, 다리도 긁혀가며, 숨을 몰아쉬면서 다다른 넓은 광장. 어떻게 이곳을 알아냈을까 싶을 정도로 낮고 긴 동굴길을 지나니 넉근히 많은 사람이 지낼 수 있는 터가 나온다. 윗층엔 노인과 아이들이 지낼만한 또 하나의 공간이 있고, 두 계단높이의 연단도 있었다. 그러나, 잠깐 드나들기도 힘겨운 여기서 그들은 두달을 어떻게 살았을까.

문 위원장은 넋나간 우리에게 ‘잠들지 않는 남도’를 아냐고 묻고, 조용히 선창했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밤, 어둠 살 뚫고 피어난 피에 물든 유채꽃이여…’

노래가 끝나자, 김민호 기자는 대뜸 욕부터 한다.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았냐?” 겁에 질려 토벌대를 피해 무작정 이곳으로 왔을 아낙과 노인, 아이들. 그가 욕을 해대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쓰러져 있던 양초 한자루를 켜놓고 한동안 말없이 그 초를 바라봤다. 문 위원장은 조용히 당시 상황을 읊조린다.

“아수라장이었겠죠. 사돈의 팔촌이라도 가족중 한 사람이 산사람(무장대)이면 대살이라 하여 죽임을 당했으니까. 어린애, 부녀자, 노인 관계없이 무조건 폭도로 몰려 억울한 죽임을 당한 거예요. 그래서 제주 사람들, 이데올로기에 대한 피해의식이 참 큽니다. 4·3 이후 제주공동체가 파괴됐다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성을 겁탈하고, 손자가 할아버지를 때리게 하고…. 또 대개 그 당시 서북청년단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외지인이에요. 뭍사람들. 그래서 제주사람들이 뭍이라면 본능적 반발이 생기나봐요. 지금은 안그렇지만.”

허허롭게 웃는 그의 웃음 뒤로 눈물이 보인다.

2000년 3월 11일 오후.

아침부터 비가 왔다. 한림읍 월령리에 사는 진아영 할머니(85세·4·3피해 생존자)를 만나러 가는 날, 찬비가 내리니 마음이 더욱 무겁다. 인권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던 <무명천할머니>의 주인공 진아영 할머니. 영화에서 본 할머니는 턱이 없어 말도 못하고, 음식도 못드신다.

4·3 당시 할머니의 고향인 판포리에 무장대의 보급투쟁이 시작되면서 군경토벌대는 판포리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시작했다. 총격전이 치러지던 한밤에 무슨 일인가 하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모두 할머니처럼 당하거나 사망했다. 그날 할머니도 총에 맞아 턱을 잃었다. 당시 무장대의 무기란 고작해야 죽창·철창이었으므로 할머니가 입은 총상은 80∼90% 이상의 군경이 가지고 다녔던 총에 의한 피해가 분명하다고 『제민일보』 김종민 기자는 증언한다. 실제 판포리 등지를 취재한 결과, 지역사람 대다수가 똑같이 증언하고 있다고.

담장을 돌아가며 핀 빨간 선인장 열매가 빗발에 맞아 그런지 처연해보인다.

“할머니!”

“…”

아무리 불러도 응답이 없다. 인기척이 없어 문을 여니 스르르 미닫이가 밀린다. 그러나 숨소리도 안들린다. 다시 “할머니!” 해보지만 역시 대답은 없다. 다시 ‘할머니’하며 방문을 여니 ‘무명천’의 그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섬뜩한 느낌. 영화와는 또 달랐다.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작은 방. 그 안에 겹겹이 깔아둔 요와 전기장판, 두꺼운 이불. 입김나는 그 방에서 모두 굳어버린 할머니의 손가락마디를 잡는 순간, 눈물이 솟구쳤다.

“할머니, 그동안 어떻게 사셨어요….”

할머니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몸동작으로 이디오피아 난민처럼 뼈만 앙상한 팔과 다리, 스웨터를 벗어 배와 가슴에 난 상처를 처맨 복대를 가리키며 온몸이 쑤신다는 표정을 짓는다.

할머니는 생전 누구와 마주 앉아 식사하거나, 어디 가서 오래 앉아 있지도 않는다. 4·3충격으로 누군가 해칠지 모른다는 피해의식과 남들과 달리 턱에 입은 상처 때문 아닐까? 얼핏봐도 무명천에 얼룩진 핏물이 섬뜩하게 하는데, 당신 스스로 느끼는 고통은 얼마나 클까. 턱과 함께 모조리 날아간 아랫니. 그 때문에 아무 것도 씹지 못하는 할머니는 위장병 등 각종 속병을 앓고 있다. 제주의 모든 양민처럼 어느날 갑자기 당한 피해로 평생 괴로움을 당했을 할머니. 생각할수록 분이 삯여지지 않는다. 무슨 죄로 평범했던 한 여인이 이런 고통의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가. 하늘도 땅도 우리도 함께 울어버렸다. 할머니는 계속 어깨를 다독이며 ‘이젠 괜찮다’는 눈빛으로 울지 말라 했지만, 할머니도 봇물처럼 터진 울음을 빗물에 씻어 내리고 있었다.

52년이 지난 지금도 할머니가 턱에 두른 무명천엔 아물지 못한 상처 탓으로 붉은 피가 묻어난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무슨 말이건 할 때마다 할머니의 하이얀 무명천에 적셔지는 선혈. 도대체 이 아물어지지 않는 상처는 언제쯤 치유될 수 있는가.

4·3피해 생존자로 평생을 그렇게 홀로 살지만, 정부로부터는 거택생활보호 대상자로 월 10만 원 받는 게 고작이다. 이걸로는 생계유지가 안되니 할머니는 톳도 따다 팔고, 선인장도 기르며, 품앗이 남의 일도 한다. 여느 팔순노인이라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할머니는 제주여인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텨내는 게 아닐까? 찬바람이 불 때는 체감온도가 영하10도를 밑도는 제주에서 보일러도 돌지 않는 냉방에 앉아 마치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할머니는 역사속으로 고요히 저물고 있다.

2000년 3월 12일 새벽.

6시 30분 출발, 북촌초등학교에 닿으니 이미 이제후 선생님(61세)이 교문 사이에서 바람을 피해 서 계시다.

북촌초등학교는 4·3 때 북촌리 사람들이 몰살당한 학살터로 소설가 현기영의 작품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4·3 당시 이제후 선생의 나이는 아홉살. 그때 아버지와 누이, 동생이 모두 죽고 초등학생이던 형과 어머니, 그리고 당신만이 살아남았다고 증언한다.

“그때는 이 학교도 초가지붕이었는데…, 여하간 마을주민들에게 경찰이 방송을 했어요. 연설들으러 북촌초등학교로 나오라고. 거동할 수 없는 노인과 간난쟁이를 빼고는 모두 나왔지. 그랬더니 군경가족 손들라 해서 앞으로 분리해내고 순식간에 마을을 불태우더니 마을사람들을 두부자르듯 장대로 잘라 옴팡밭에 가서 총질을 해댔어. 아이구, 죽겠다고 난리를 치면 군인이 때리고, 안간다면 안간다고 때리고. 애들하고 여자들은 끝에 있었지만 대부분 장년들은 처음에 다 죽었지. 우리 아버지도 그때 옴팡밭에서 총살당했어.”

그 옴팡밭엔 애기무덤이 있다. 산사람 애기가 잠들었다하여 지금까지 밭주인이 그 무덤만 빼고 다른 곳에 농사를 짓고 있는데 그 무덤 위엔 ‘무시’풀이 높게 자라 있었다.

북촌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1948년 음력 12월 19일 아침 세화리 주둔 2연대 3대대 병력 일부가 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중 북촌마을 어귀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이 숨졌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날 오전 11시쯤 2개 소대가 마을로 들이닥쳐 400여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1,000명 가량의 주민들을 집결시킨 뒤 차례대로 옴팡밭에서 총살한 것이다. 양일간 이뤄진 총살에서 숨을 거둔 양민은 모두 400여 명. 그후로 이 마을엔 남자가 없다하여 ‘무남촌’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한날 한시에 사람이 하도 많이 죽어 당시 북촌리는 제삿날이 마치 잔칫날처럼 마을 전체가 훤히 밝았다고.

“그후로 우리가 얼마나 연좌제에 시달렸는지 알아? 빨갱이 새끼들이라고. 그래서 인천상륙작전 할 적에 우리 마을 형들이 다 지원해서 해병대에 들어갔어. 우리는 빨갱이 자식 아니다, 이걸 보여주려고. 빨갱이 자식이 군에 자원입대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고 9·28 서울수복을 이뤘겠냐 그말이야. 그런데도 우리또래에는 하위직이라도 공무원이 된 사람이 없어. 무조건 빨갱이마을이라고 취직도 안됐어.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잠이 안 와.”

한 줄기 눈물이 흐른다. 억울함과 분노가 고조되니 얼굴이 빨개지고, 입가에 침이 고인다. 그 사무친 원한의 세월속에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입도 벙긋 못하고 반백년을 살았다. 누구든 4·3에 대해 입을 열면 끌려가서 맞거나 고초를 치르니까. 차라리 잊고 사는 편이 나았다. 그게 지금까지 제주도민 전체를 심각한 레드컴플렉스에 시달리게 만들었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파괴시킨 게 아닌지….

사랑과 낭만의 섬, 제주엔 52년전에 이런 아픔이 있었다. 요새 젊은이들은 이런 현대사를 뒤로 한 채 DDR과 스타크래프트에 빠져 살지만, 52년전부터 제주에 살았던 사람들은 전쟁같은 4·3의 악몽을 지금도 현실처럼 인식한다. 언제 누가 와서 해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면서. 진아영 할머니가 문을 이중삼중으로 잠그고도 인기척하지 않는 모습이나 옴팡밭을 가리키며 눈물 떨구는 그옛날 아홉살 미소년의 얼굴엔 아직도 그때의 겁이 남아 있다. 4·3제주항쟁특별법이 통과됐다. 김대중정부는 잔인하게 이뤄진 양민학살에 대해 공동체적 보상을 이야기한다. 공원과 위령탑. 중요하다. 그러나 그 시절 당한 피해로 지금까지 신음하고 있는 생존자들을 위한다면 진정한 명예회복과 아직도 비상식적 대북이데올로기를 전파하며 분쟁을 일삼으려하는 일부 몰지각한 극우세력에 대한 준동을 막아야 할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이제는 똑똑히 말해야 한다.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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