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0년 11월 2020-11-01   1083

[보자] 내 목소리를 들려줄 랩

내 목소리를
들려줄 랩 

 

‘랩짱’ 여자 주인공 영화 영업하기

유튜브 알고리즘의 인도였을까? 영화 <위 아 40>의 공식 예고편을 우연히 마주하고 눈이 번쩍 뜨였다. 주인공이 랩을 하는데, 너무 잘하는 거다! 보아하니 여자 주인공이 ‘오지는’ 랩으로 세상을 ‘조지는’ 내용 같았다. 몇 년간 ‘쇼미충’이자 래퍼 지망생으로 살다가, 다큐멘터리 <망치> 제작 과정을 통해 랩은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깔끔하게 단념한, 그러나 아직도 힙합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는 나다. 이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의 쾌감을 느끼고 싶었다.
 

또한 <위 아 40>는 오랜 시간 보석 같은 독립 영화를 발굴하고 소개하며 세계적 권위를 형성한 선댄스 영화제Sundance Film Festival의 감독상 수상 작품이다. ‘선댄스 인증 마크’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 10월 9일, 직접 본 영화는 기대했던 것과 조금 달랐고, 같이 얘기나누고 싶은 지점을 발견했다. 하지만 한국어 사용자 중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드물었다. 고독하다. 역시 다양성 영화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얘기나누기 위해서는 영업부터 해야 하는 건가?

 

월간참여사회 2020년 11월호 (통권 280호)

위 아 40 The 40-Year-Old Version

음악 | 129분 | 2020 | 미국 | 15세 관람가

감독      라다 블랭크

출연      라다 블랭크, 피터 킴, 오스윈 벤저민

 

대도시의 독립 예술가로 나이 든다는 것

영화의 각본을 쓰고 감독한 라다 블랭크는 직접 출연도 했다. 실제 ‘라다’와 영화 속 ‘라다’가 얼마나 일치하는지 모르므로, 앞으로 서술할 ‘라다’의 이야기는 영화에 기반한 것임을 미리 밝힌다. 라다는 ‘30세 이하 예술가 30인’ 상을 받은 촉망 받는 창작자였으나, 2012년 이후로는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흑인 여성 창작자로서, 업계를 쥐락펴락하는 백인 중산층 늙은이들의 비위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생계를 위해 라다는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 크게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인다. 예술가는 창작 활동으로 생계를 이을 수 있어야 한다는 관념 때문이다. 그건 학생들도 마찬가지인지, 라다가 가르치는 학생은 라다를 조롱하며, 최근 뚜렷한 창작 활동이 없는 사실을 아프게 꼬집는다.

 

라다를 조롱하는 것은 학생만이 아니다. 40대를 코앞에 둔 1인가구 여성에게 세상은 상냥하지 않다. “나무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벌레 먹이가 되는 다 익은 열매” 취급을 받고, 라다의 집 앞에 터를 잡은 홈리스는 성희롱을 일삼는다. “오늘 집에 같이 갈 남자 찾으러 가냐? 남자 데리고 들어간 지 한참 됐잖아.”

 

뉴욕 할렘가 집에서 울며 베개를 주먹으로 치던 라다는, 멀리서 들려오는 힙합 비트에 고개를 번쩍 든다. 자신이 랩으로 고등학교를 주름잡았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그는 자신을 열 받게 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디스’ 하기로 결심하고, ‘40세 여성 관점의 믹스 테이프’를 낼 계획으로 동네 프로듀서 D를 찾아간다. 라다를 좋게 본 D는 라다에게 무대에 서기를 권한다.

 

이제 그만 현실에 타협해야 하는 걸까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나는 라다 선배님이 무대를 뒤집어 놓으시고, 믹스테이프를 성공적으로 발매한 뒤, 랩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다는 개망신을 당한다. 무대 위에서 랩을 시작하기 전 들뜬 마음으로, 친구와 제자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주접을 떨지만, 막상 비트가 시작되자 얼어붙어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한 것이다. 

 

라다는 친구 아치의 품에 안겨 엉엉 운다. 믹스테이프를 발매하기로 한 계획을 엎고, 아치의 말 대로 ‘현실적’이 되기로 한다. 그것은 재수 없는 메이저 프로덕션 대표 휘트먼의 비위를 맞춰 다시 대중의 관심을 받는 일이었다. 휘트먼은 여러 차례 목을 조르고 싶어지는 노인네다(실제로 라다는 그의 목을 한 번 졸랐다). 그는 라다가 쓴 극본 <할렘가>의 초고를 보고 “흑인으로서의 진정성이 떨어진다”며 흑인보다 흑인에 대해 더 잘 아는 척을 했고, “흑인 감독을 두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라다의 말에 수긍하는 척 하면서 중산층 백인 여성 감독을 기용해 라다의 뒤통수를 친다. 

 

“이건 내 연극이 아니야.”라고 중얼거리는 라다에게 아치는 “다음 연극은 네 게 될 거야.”라고 답한다. 아치 역시 상황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할렘가> 초연을 앞두고 TV 프로그램에서 라다를 찾는 등, 세상은 다시 라다를 주목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 라다는 거울 앞에서 랩으로 독백한다. 그런 라다에게 프로듀서 D가 찾아온다. 라다는 D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환기한다. 이제 그는 어떤 일을 벌일까? 궁금하다면 넷플릭스에서 <위아 40>를 찾아보자.

 

월간참여사회 2020년 11월호 (통권 280호)

Fucking for chips Sucking white, wrinkly dick

가난을 피하기 위해 늙은 백인 X 빠는 게 네 판단  

Just to be a New York Times theater pick

뉴욕타임스에 걸리기 위한 기만

 

로맨스는 ‘만능 치트키’?

젊은 시절 독립 예술 영역에서 나름의 성과를 얻더라도, 상업 예술계에 안착하지 못하면 예술가의 삶을 이어가기 어려워질까? 창작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 주인공의 방황과 닿아있어 사는 곳과 인종이 다름에도 영화에 이입할 수 있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 중인 할렘가 주민의 눈으로 담은 뉴욕의 풍경은 기존의 미디어를 통해 접한 것과 다르게 생생했고, 건조하고 자조적인 유머와 클리셰를 비껴가는 전개는 흥미로웠다. 특정 업계의 디테일과 개성 있는 인물들을 알게 되는 재미도 있었다. 내가 한국인이어서일까? 한국계 배우 피터 킴이 연기한 사랑스러운 속물, ‘아치 최’가 특히 흥미로웠다.

 

그러나 주인공이 스스로의 성적 매력을 확인하며 자존감을 되찾아 자신과 화해한다는 내용은 아쉽다. 많은 클리셰를 비껴갔지만, 로맨스를 잃지 못하는 미국 영화의 관습을 답습하는 듯 보였다. D와 함께 걷는 뉴욕의 밤은 근사했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❶  https://youtu.be/_p1AV5Uw03g 참조


글. 최서윤 작가 

<월간잉여> 편집장으로 많이들 기억해주시는데 휴간한 지 오래됐습니다. 가장 최근 활동은 단편영화 <망치>를 연출한 것입니다. 화가 나서 만든 영화입니다. 저는 화가 나면 창작물로 표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가 봅니다. 종종 칼럼이나 리뷰로 생각과 감정을 나누기도 합니다. 저서로 <불만의 품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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