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11월 2006-11-01   700

대선예감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까지, 영국 신좌파의 고민은 왜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대처가 블루칼라 계층과 화이트칼라 계층을 막론하고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영국이 갖는 강한 계급정치의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대처는 국민들로부터 커다란 지지를 획득하였다.

70년대부터 극심해진 경제적 불황과 실업률이란 악재도 대처의 인기를 막지 못하였다. 오히려 대처 집권기 경제 성장은 더욱 나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처가 연속적으로 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에게 강한 영국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고, 좌파의 무능함을 부각시켰으며, 영국민 공통의 적을 구성할 수 있었던 문화적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처주의는 단순히 대처 개인 혹은 대처 정부가 갖는 통치 철학이라 할 수 없다. 대처주의는 당시 영국사회의 전통적 좌파의 무능과 이를 파고든 우파의 문화적 정치 투쟁을 일컫는 일련의 정치적·문화적 흐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뜬금없이 영국 사회 신좌파의 고민을 이야기 한 것은 현재 우리의 정치·문화 상황이 대처주의가 본격적으로 발흥한 70년대 말 영국사회와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것이다. 당시 집권여당인 영국의 노동당은 우파로부터 무능한 정부라고 끊임없이 공격당했다. 영국 경제의 불황은 세계 경제의 구조적 불황의 산물이었지만 우파는 이를 좌파 정부의 무능으로 규정하였다.

경제적 불황으로 인한 치안의 불안 역시 좌파 정부의 무능과 결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다. 전국을 파란색 스머프로 만들어 버린 지난 5·31 지방 선거에서 확인할 수 있듯, 국민들은 ‘부패’한 한나라당보다는 ‘무능’한 열린우리당을 심판함으로써 현재의 집권당에 강한 불신감을 표출하였다. 열린우리당은 자신들의 전통적지지 세력을 결집함으로써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려 하지만 ‘무능’ 이데올로기는 너무나도 뿌리 깊게 확산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좌파 역시 뚜렷한 대안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 경향과 한겨레의 ‘보수·진보 담론’ 기획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보수 진형은 좌파 진보개혁의 실패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빠르게 그 세를 일으키고 있다.

동시에, 새롭게 정권을 획득하려 하는 야당의 중심이 여성이라는 것 역시 영국 사회와 공명한다. 물론 이는 대단히 표피적인 유사점이겠다. 그러나 대처가 자신의 여성적 이미지를 통해 효과적으로 사회를 보수화할 수 있었던 것처럼, 박근혜 역시 여성주의의 진보적 정치를 실현하기보단 아버지의 유산을 통한 우리 사회의 보수적 가부장화에 앞장설 것이다. 덧붙여 한반도의 핵 위협 역시 우리 사회를 급속도로 위축시키고 있다. 포클랜드 전쟁을 통해 영국의 보수 진형이 국민들에게 위기의 영국과 공통의 적,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전통적 대영제국의 찬란한 모습을 상기시켰던 것처럼, 북한의 핵 실험 성공은 우리 사회의 과도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보수 진형의 정권 획득을 위한 효과적 선전 수단으로 절합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정치·문화적 흐름을 근혜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물론 이는 박근혜의 정치적 입장과 한나라당의 정치 철학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처주의처럼 현재 한국 사회에서 확인되는 정치적·문화적 보수화와 진보진영의 위축을 가리키기 위해 고안한 개념이다. 또한 근혜주의를 분명히 함으로써, 섣불리 ‘노무현 일병 구하기’에 나서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예상되는 근혜주의 앞에 한국 사회의 신좌파는 어떻게 자신의 정치적 운동을 새롭게 펼쳐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여 년 전 영국 신좌파의 고민은 현재 한국 신좌파의 고민과 맥을 같이 한다. 때 이른 대선 예감을 하는 것도 자칫 우리 사회가 통과하게 될 보수화의 흐름을 거스르고픈 진보적 욕망 때문이다.

홍성일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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