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11월 2006-11-01   707

늦어도 11월에는

어렸을 땐 곧잘 믿곤 하였다, 사람과 이야기와 노래를.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믿음은 조금씩 사라졌다. 세계가 표리부동하지 않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이 세계가 ‘진부한 이미지들로 가득한’ 곳일 뿐이며 가치있는 것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절망적 인식에 도달했던 적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도 유효한 인식일지 모르겠다. 결정적 계기가 생겨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무덤까지 가지고 갈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이 절망적 인식을 안고 죽는다면 가엾은 노릇일까? 생각은 중학교 때 읽었던 〈성채〉의 마지막으로까지 이어진다. J.A.크로닌의 소설 막바지는, 한때 탄광촌에서 무료 의료봉사를 하며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기도 하였으나 상류사회의 부와 명예에 맛을 들여 사랑하는 아내까지 버렸던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다시 아내에게 돌아오고, 이 주인공의 아내가 기쁜 마음으로 남편이 좋아했던 버터를 사오다 트럭에 치여 죽는 것으로 끝난다. 나는 가끔 그녀의 죽음은 행복했을까 생각해 보곤 하였다.

5월의 어느날 밤 마리안네는 상공인협회가 주는 작가상 시상식에서 처음 만난 여인에게 ‘당신과 함께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한마디 말을 던진 남자를 따라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떠난다. 그녀는 어느 한곳에 고정되지 않고 자유로운 그래서 불안정한 작가 베르톨트와 어릴 적 이루지 못한 사랑의 완성을 꿈꾸고 현실의 공허와 존재의 불안을 감당할 힘을 얻고자 했다.

불쑥 찾아온 사랑의 기회에 용감히 생을 맡길 줄 알았던 마리안네는 그러나 역시 그런 위험한 사랑 역시 남편과의 지난 6년간의 무료한 삶과 닮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더욱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만, 11월이 다가올수록 베르톨트가 마치 처음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찾아오리란 사실을 예감한다. 늦어도 11월에는, 베르톨트의 작품이 완성되고 작은 폭스바겐을 하나 사서, 어디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을 것이었다.

사랑의 종말은 죽음과 함께라야 납득이 된다. 그렇지 않은 사랑의 종말을 나는 상상할 수가 없다. 마리안네와 베르톨트는 다시 만나고 그들은 폭스바겐을 타고 떠난다. 그리곤 죽음! 사고였지만, 예정된 종말이었다. 마리안네의 죽음은 행복했을까? 아니 그녀는 행복하게 죽었을까? 나는 다시 생각해 본다.

이지은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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