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10월 2006-10-30   910

21세기는 ‘빈민을 위한 혁명’의 시대로

사회개혁과 반미 내세운 차베스의 등장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국내적으로는 서민 위주의 개혁을 추진해왔고, 대외적으로는 반미 반세계화의 선봉에서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구도를 보여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대규모 원유 공급계약을 체결하는 등 발빠른 행보를 보여 부시 행정부를 긴장시키고 있다.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권에 있는 중남미에서 이와 같은 정치지도자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현대사의 질곡이 낳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혼란을 거듭했던 베네수엘라는 1958년에 맺은 푼토 피호 협약에 의해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협약을 맺은 당사자인 민주행동당과 기독사회당이 다른 정치세력의 참여를 배제한 채, 한 정당의 후보가 대통령에 선출되면 다른 정당의 인물을 일부 정부에 입각시키는 형식으로 중앙정치를 교대로 독점하는 특이한 정치행태를 보였다. 정치권력은 물론이고 막대한 석유이익을 차지하려는 속셈에서 지속된 이와 같은 협약은 국민 대부분을 정치 경제에서 소외시키고 부정부패를 키우는 온상이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이와 같은 ‘상생의 문민독재’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IMF의 요구에 따라 시도한 급격한 개방이 문제였다. 버스 요금이 노동자 일당과 맞먹을 정도로 폭등하는 등 하층민의 생활이 어려워졌고 국내총생산도 40%가 감소했다. 이는 결국 1989년의 민중폭동으로 발전하였다. 푼토 피호 협약이 서민들을 정치적으로 소외시켰다면 신자유주의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소외시킨 것이다.

차베스는 일찍이 초급장교 시절이었던 80년대부터 이러한 현실에 불만을 갖고 볼리바르혁명운동 200(MBR-200)이라는 비밀단체를 결성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드디어 92년에 쿠데타를 감행했지만 실패하고, 2년간의 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93년 페레스 대통령이 부패혐의로 중도사퇴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민주행동당과 기독사회당의 후보 단일화 실패에 따라 98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개혁과 반미를 내세운 우고 차베스가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낡은 정치와 부패를 일소하고 남미의 해방자였던 시몬 볼리바르의 이상을 계승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혁명’의 기치를 들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92년의 쿠데타는 그 자체로는 실패였지만 베네수엘라의 구조적 모순이 낳은 결과이자 협약정치 종말의 신호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국민과의 소통 속에 도전 물리치고 강력한 통치체제 구축

차베스는 스스로가 민의를 수용하는 중심체의 역할을 자임하는 가운데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극대화시키는 통치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가 추진하고자 하는 개혁정책은 화려한 언변으로 뒷받침된 카리스마로 포장되어 물심양면으로 피폐해진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차베스는 국민과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선호한다. 집무실에서, 공장에서, 길에서, 마을에서 어디서든 그는 국민들과 끊임없이 스킨십을 나누며, 매주 일요일 ‘안녕, 대통령!(Alo Presidente)’이라는 TV토크쇼까지 손수 진행하고 있다.

그 결과 차베스는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력을 자신에게 집결시킬 수 있었으며 구질서를 붕괴시킨 후 90년의 개헌을 비롯한 여러 과정을 거쳐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개헌을 통해서 차베스는 재선의 길을 닦았고, 의회와 새롭게 출범한 선거관리위원회를 적절히 통제하게 되어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킬 수 있었다. 또한 자파가 다수를 장악한 의회를 통해 대법관의 수를 20명에서 32명으로 늘리는 법안을 통과시켜 측근을 대거 대법원에 포진시킴으로써 사법부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언론 관계 법안을 통과시켜 대통령이나 정부를 심하게 비판할 경우 사법처리할 수 있도록 하여 국내외적으로 많은 논란을 낳기도 하였다.

차베스 집권 이후 베네수엘라의 정치무대는 개혁을 통해 소외계층의 참여와 민중의 정치화를 도모하고 있는 친 차베스 정파와 지난 시절의 권력과 석유이익을 되찾으려는 기존 정치세력으로 양분되어 심한 갈등상황을 연출해왔다. 미국의 후원을 받고 있는 반대파는 2003년 정부전복 쿠데타 시도와 대규모 파업, 2004년 차베스에 대한 국민소환투표, 2005년 총선 거부 등을 통해 끊임없이 차베스 제거에 매진해왔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오히려 끈질긴 생명력으로 연이은 시련을 극복한 차베스는 지지자 결집과 반대파 제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2002년 4월의 쿠데타 실패를 계기로 차베스는 군부를 확실히 장악했고, 2002년 국영 베네수엘라석유회사의 파업을 이겨낸 그는 석유 부문을 무난히 접수하여 재정안정성을 확보했다. 또한 2004년의 소환투표에서 승리하여 자신에 대한 정통성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정치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제대로 조직화되지 못한 반대 진영의 어설픈 반 차베스 움직임이 결국 정치, 경제, 군부 등 모든 영역에서 그를 도운 셈이 되었고, 차베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중 삼중으로 지지기반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

서서히 효과 드러내는 분배정책

차베스의 개혁 목표는 포스트 자본주의, 즉 “21세기형 사회주의의 구현”이며 그 방법으로는 국민의 참여를 가능한 널리 확산시켜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유도하는 것이다. 물론 개혁의 세부지침은 위로부터 하달된다.

사회경제부문에 있어 차베스는 이른바 ‘빈민을 위한 혁명’을 추진 중이다. 헌법 개정을 통해 토지와 주택의 공개념을 도입했고, 집권 초기부터 외환거래 자유화를 철회하고 일부 상품에 대한 가격통제를 실시하였다. 특히 2003년부터 2005년 사이에 무려 200억 달러를 의료, 교육, 식량 등 사회복지와 빈민구제 사업에 투입했다. 유가 상승으로 인해 국가재정에 여유가 생긴 덕분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막대한 국가재정을 투입한 차베스의 분배정책은 효과가 있었는가? 복지정책의 공과를 측정하기는 상당히 어렵지만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차베스의 집권 초기 3~4년 간 베네수엘라의 각종 지표는 빈곤층이 43%에서 54%로 증가하는 등 악화일로에 있었다. 이것은 반대파가 주도한 각종 파업으로 인해 경제가 어려움을 면치 못했고 정부가 국영 석유회사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던 시절이어서 석유이익을 국가재정으로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베네수엘라 경제는 2004년 18%, 2005년 9%의 성장을 기록하면서 상당히 호전되고 있다. 그 원인은 바로 하층의 소비증가인데 이는 곧 분배정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었다는 점을 반증한다.

베네수엘라의 미래는?

지금까지 차베스의 등장 배경과 그의 개혁에 대해 살펴보았다. 단기적으로 보면 지나친 대중주의적 분배 정책과 부진한 산업투자는 유가가 하락할 경우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의 개혁에 의문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국민참여는 가속화되고 있지만 정당정치의 왜곡이나 이익의 분배에 길들여진 베네수엘라의 클라이언틀리즘(고객주의)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에서 볼리바르 혁명이후 일어나고 있는 교육, 의료, 토지 개혁에 있어서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노력은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하다는 점이다. 사회정책 및 공공지출의 핵심은 대부분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이고 국민을 자각시키고 교육하여 장기적인 국가 발전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베스는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흔히 쿠바의 카스트로나 리비아의 (이전의) 카다피 같은 지도자에 비견되곤 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가장 적절한 비교 대상은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일 것이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 출신이고, 카리스마와 탁월한 언변, 광장의 정치를 통해 서민 대중을 사로잡았으며, 후견조직을 통해 든든한 지지기반을 마련했다는 점 등에서 두 지도자는 많은 점을 공유하고 있다. 시트고 주유소 망을 통해 미국내 저소득층을 위한 난방유를 저가에 공급하겠다고 큰소리 친 점은 마치 페론의 부인 에바가 미국의 저소득층 어린이 600명에게 의복을 보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도 페론주의의 유산이 아르헨티나 사회에 짙게 깔려있는 것과 유사하게, 차베스주의가 주도한 정치, 사회, 경제적인 변화가 향후 베네수엘라의 미래에 상당한 영향을 줄 것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베네수엘라의 경험을 다룰 때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해석을 경계해야 한다. 차베스는 정책으로 보면 분명 좌파 사회주의자이지만,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에 우선하여 기본적으로 민족주의를 짙게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네수엘라의 현상을 설명할 때 ‘좌파지도자’,‘좌파 도미노의 진원지’ 등등으로 표현되는 이데올로기적 해석은 현실을 호도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리고 차베스 개혁의 공과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기엔 아직 이르다. 무엇보다 다수의 국민이 정치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독립이후 200년간 과두제를 유지해온 중남미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가 아닌가?

곽재성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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