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2년 03월 2012-03-06   1455

칼럼-설중유채(雪中油菜)

설중유채 雪中油菜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월간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지난 2월 18일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에 들어갔습니다. 지난해 9월 2일 해군이 펜스를 둘러치고 봉쇄한 지 5개월여 만에 찾는 것이었습니다. 문규현 신부님을 비롯한 몇몇 성직자, 평화활동가들과 함께 강정포구에서 카누를 나누어 타고 마치 상륙작전하듯 들어가야 했습니다.

 

멀리 범섬의 회색 절벽은 햇볕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구럼비 너머로는 한라산이 머리에 눈과 구름을 이고 길게 누워있었습니다. 구럼비 위로 솟아난 무수히 많은 샘물과 실개천 가장자리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돋아나 푸르고 여린 잎사귀들을 수정같은 맑은 물에 담그고 있었습니다. 바위를 둘러싼 둑에는 노란 유채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거무스름한 구럼비는 이 모든 빛깔을 더욱 영롱하고 선명하게 드러내 주었습니다.

 

둑 위에는 최병수 작가가 만들어 놓은 구름 모양의 솟대가 낯익은 모습 그대로 오롯이 솟아 있었습니다. 지난 여름 마을 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작은 가설무대도 온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문규현 신부님과 평상에 말없이 앉아 이 모든 것들을 감개무량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왔습니다. 종종 바람을 타고 온 함박눈이 구럼비, 그리고 유채꽃 위로 흩날렸습니다. 햇볕과 먹구름, 유채꽃과 함박눈이 공존하는 구럼비는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습니다. 구름같은 바위라는 이름을 지닌 그 바위 위에서 넋을 잃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평화활동가인 조약골과 김세리씨가 기타와 아코디언을 들고 ‘구럼비의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성지를 찾은 북미 인디언들처럼 사흘이고 나흘이고 둥글게 원을 그려 선댄스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겠지요. 그들은 실제로 침낭이랑 비상 식량을 챙겨 가지고 들어온 거였습니다. 저도 북 대신 가설무대 바닥을 발로 구르며 어설픈 어깨춤을 추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는 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강정마을 주민들이 정한수로 사용하던 할망물은, 설문대 할망의 배꼽이라는 신화를 지닌 그 신성한 샘은 이미 말라 있었습니다. 그 아래 작은 연못도 해군기지 공사장으로부터 흘러온 오수로 인해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길게 누운 구럼비를 가로질러 바다까지 콘크리트 도로가 나 있었습니다. 도로 좌우로 깨어진 구럼비의 날카로운 파편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구럼비 바위를 둘러싼 둑 저편에는 방파제를 쌓기 위해 만들어진 테트라 포트(일명 삼발이)와 콘크리트 구조물이 빼곡히 쌓여 있었습니다. 그 뒤로 거대한 기중기가 보였습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자 새로 난 콘크리트 도로와 둑 위로 경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숫자가 점점 많아져서 곧 100여명으로 불어났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우리에게 “공유수면에 무단으로 들어왔으므로 신분을 확인하고 과태료를 징수하겠다”면서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다른 활동가들은 경찰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신분증을 챙겨들고 순순히 경찰들이 서 있는 둑 위로 올라갔습니다.

 

둑 위에서는 제주 지역 평화활동가인 송창욱 씨와 경찰 간에 작은 언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송씨는 “만약 과태료 징수가 목적이라면 이렇게 많은 경찰 병력이 우리를 에워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과태료 징수 절차를 진행할 경찰만 남고 다른 경찰들은 물러나야 한다는 거지요. 그는 아마도 과태료 징수 외에 불법 체포를 시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경찰로부터 받아두려 했던 것 같습니다. 요 며칠 사이 경찰이 구럼비를 방문한 주민과 활동가들을 법적 근거 없이 체포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과태료를 징수하겠다던 경찰관 뒤에서 날카로운 핸드마이크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불법 집회를 하고 있으니 당장 자진 해산 하십시오. 만약 해산하지 않으면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저를 비롯한 몇몇이 우리는 과태료 징수 절차에 협력하기 위해 여기 모였고 아무런 구호도 외치지 않았을 뿐더러 어떤 집단적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불법 집회냐며 항변했지만 소용 없었습니다. 경찰은 막무가내로 1차 해산 명령, 2차 해산 명령을 이어갔습니다. 해산 명령은 본래 30분 간격으로 내리는 것이지만, 그 날 경찰은 5분, 10분 간격으로 해산 명령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경찰의 목적은 체포에 있었던 것입니다. 경찰에게 체포의 빌미를 줄 것을 우려한 일행은 3차(마지막) 해산 명령이 내려지기 전에 구럼비 곳곳으로 흩어지기로 하였습니다. 경찰의 해산 명령에 응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경찰은 구럼비로 물밀 듯 몰려와 신부님들과 활동가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문규현 신부님도 평상 위에서 사지가 들려 연행되었습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등장한 일군의 용역 직원들은 신부님이 누워있던 평상을 해머와 곡괭이로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몇몇 활동가들이 달려가 마을의 재산인 가설무대를 도지사의 허가 없이 철거하는 것은 불법이며, 경찰은 이를 제지할 법적인 의무가 있다는 점을 알리고 만류하려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렇게 14명이 연행되었고 구럼비 살리기 운동의 작은 상징이었던 가설무대는 불법적으로 철거되고 말았습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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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총리실은 현재 공사 중인 제주 해군기지 공사 실시 설계를 그대로 적용할 경우, 15만톤급 크루즈 여객선이 정박할 수 있는 민군복합형 시설을 짓겠다던 당초의 공약이 지켜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검증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지난 연말 국회에서도 같은 이유로 2012년 해군기지 건설예산의 95%가 삭감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2월 22일 이명박 대통령은 특별기자회견에서 제주해군기지 공사를 강행하겠다고 천명했고, 해군은 지난해 이월된 예산을 이용해 공사를 강행, 3월초에 구럼비를 폭파할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이를 돕기 위해 정부는 경찰청장 등을 불러 모아 관계 기관 대책회의를 가졌습니다. 해군기지에 15만톤급 크루즈항도 함께 만들겠다는 공약은 지난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제주도민들에게 발표했던 것으로, 제주도민들의 압도적 다수는 군항 위주의 항만 건설에는 반대하고 있습니다.

 

 

1)경찰서에 인계된 우리는 조사 받기를 거부했고, 그날 밤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2월 26일에는 해외활동가 포함 16명이 구럼비에서 비슷한 이유로 불법적으로 체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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