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2월 2000-02-01   1166

엘리제를 위하여?

우리 어릴적, 피아노는 부의 상징이었다. 높다란 담장 너머로 뚱땅뚱땅 흘러나오는 그 선율이 비록 서툰 ‘엘리제를 위하여’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할지라도, 그 부티나는 음향은 얼마나 많은 소년소녀의 가슴을 동경으로 뒤흔들고, 얼마나 많은 소년소녀의 박탈감을 부추겼던가. 그때 피아노 교습을 받을 수 있었던 선택받은 소수 중엔 어느 정도가 빼어난 피아니스트로 성장했으며 몇 명 정도가 지금껏 피아노를 즐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삼천리 방방곡곡 어딜가나 빠지지 않는 3대 간판 중에 ‘교회’, ‘가든’과 더불어 ‘피아노 학원’이 당당히 끼어있는 걸 보면, 대한민국은 ‘피아노 왕국’이라고 불러도 누가 뭐라지 않을 듯 싶다.

그런데 피아노는 악기중에서도 꽤 오랜 수련기간을 요한다. 적어도 10년은, 그것도 매일매일 일정한 시간 꾸준히 연습해야 열 손가락을 제법 그럴듯하게 움직일 수 있다. 남들 앞에서 폼나게 연주하는 것 말고, 집안 식구들 노래부를 때 안 틀리고 반주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만 갖자고 해도 일, 이년 가지고는 안된다.

나 또한 집에 돈도 피아노도 없으면서 허영심은 남 부럽지 않았던 모친 덕에 초등학교때부터 고등학교에 걸쳐 5년정도 교습을 받았지만, 워낙 음악에 재능이 없는 터라 지금껏 손더듬 수준이고, 즉흥연주는 더군다나 엄두도 못낸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교육제도나 주거환경이, 전공을 목표로 전력투구하지 않는 한 피아노를 연습하거나 즐길만한 형편이 못된다. 음대 작곡과나 피아노과를 갈 작정이 아니라면, 대입을 위한 학과공부가 무작정 우선이다. 뚱땅거리고 있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전공을 하지 않으면서도 즐길 만한 수준이 될 때까지 꾸준히 실력을 연마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어도 대개의 주택이 게딱지같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아파트 또한 방음이 안되는 사정상, 저녁 8시가 넘으면 대다수 피아노는 ‘장식품’으로 돌아가고 만다. 점심에 파하는 초등 저학년생이 아니고는, 도대체 피아노칠 시간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나라는 피아노 잘치기에 적당한 나라가 아니라고 과장해볼 수도 있다. 뿐인가. 문화여건상 전문 피아니스트가 아닌 사람이 집밖을 벗어나 피아노 앞에 앉아볼 기회란, 또 가족끼리 피아노를 둘러싸고 오사바사 노래부를 기회란 좀체로 없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피아노치기란 투자규모에 비해서 수익률이 극히 적은 ‘모험투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일곱 살 정도 되면 피아노 학원 보내는 것이 자녀교육, 특히 딸 교육의 정석처럼 되어버린 것같다. 물론 피아노 교육은 아이들의 감성지수나 음감의 발달에 큰 도움이 된다. 손가락 운동이 지능을 높여준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건 아이가 원하고, 재능이 있는 경우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꼭 피아노여야 하는가? 왜 무슨 의무교육처럼 만장일치로 피아노 학원을 ‘보내야만’ 하는가? 기타나 하모니카는 안 되는가? 혹시 피아노는 지금도 우리에게 음악이기보다는 부, 신분을 나타내는 그 무엇이 아닌가? 아니면, ‘작은 악기’, ‘주변 악기’들을 쉽게 업신 여기는, 주류지향적인, 권력지향적인 우리의 내면이 은근히 반영된 결과는 아닌가? 마치 만년설이 없는 나라에서 아이들 스키 교육이 열풍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런 의문이 들어서, 두 딸에게 기타를 가르치려고, 비교적 쉽게 배워서, 어디서나 간편하게, 사람들과 더불어, 오래오래 즐길 수 있게 해주려고, 가까운 곳에서 값싸게 교습하는 곳을 수소문해보았지만, 없었다.

최보은 『케이블TV가이드』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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