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1월 2000-01-01   966

천막 한장으로 인권을 지키는 사람들

“그래, 여기 몇 번째 왔어?”

“처음입니다.”

“아이구, 처음이라고라? 그렇게 많이들 다녀갔는데 처음이라고?”

서운함을 감추지 않으신다. 유가협 농성 텐트.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보도 위에 그 천막은 본 지가 꽤 오래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보기는 처음이었다. 낮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피켓들고 농성하고, 밤에는 텐트 안에서 새우잠 자며 농성한 것이 402일째. 그런데 처음이라고 하니까, 일순간 기자를 못미더워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돋보기를 쓰고 신문을 읽고있는 분이 자기는 대구에서 올라왔다는 말씀하셨다. 한참을 듣고 있는데 서운했던 어머니가 말을 뚝 자르고 끼어드신다.

“에이, 이 애기는 처음와서 그런 거 모르는가봐. 인혁당 사건이 언제적 얘기인데. 모르지? 그렇지?”

계속 구박이시다. 무안해서 미적거리자, 대구 어머니가 계속 말을 이으셨다.

“다음날 찾아갔는데 정문에서 보내주지 않는 거야. 그래서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뉴스에서 다 사형시켰다고 하더라구. 재판도 마저 하지않고,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사람을 죽여버릴 수 있는 거야? 그렇게도 엄혹했던 박정희 시절 얘기야.”

그런 박정희를 위해 기념관을 세운다니 피가 거꾸로 솟는다며 인상을 쓰신다.

노골적으로 서운함을 표현하는 어머니는 전남 포성에서 올라오셨다고 했다. 서운함을 좀 풀어주려고 하는데 돌연 일어나서 가버리신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나타나서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찰떡을 두 줄이나 가지고 나오셨다.

“먹어봐. 얼마전 텔레비전에서 한 민들레에서 우리 나왔잖아? 사람들이 그걸 보고는 많이 찾아와. 이제까지 지나다니면서 천막을 봐도 그런 건줄은 몰랐다면서, 민들레 보고 알았다는 거야. 그 아줌마가 떡을 한 상자 해서 왔더라고. 그런데 민들레는 봤는가?”

이 일을 어쩌랴? 또 미움받게 생겼다.

“못 봤어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야단치시지 않으신다. 그날은 ‘명예회복 보상법 관련 국회 공청회’가 있는 날이었다. 몸이 안 좋거나 천막을 지키기 위해 다섯 분만 남고 나머지 분들은 국회에 가고 없었다. 서운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동안 긴 시간동안 세상은 이들의 얘기를 귀담아듣지 않고 있었다. 때로는 반격보다 무시하는 것이 더 가혹하다. 정부나 언론에서는 그동안 이 사람들의 얘기에 대해서 대꾸도 없었다. 그러니 상한 마음이 오죽할까? 일년이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처음이라니까 서운할 수밖에. 그렇게 이해가 됐다.

“그 때 내가 민주화가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부끄럽지요. 흙만 파먹고 사는 무지랭이여서.”

목포에서 올라오신 강종학 씨(63)가 어렵게 입을 떼셨다. 아들이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목포역전에서 분신자살했다고 한다. 이제서야 아들의 죽음에 대한 명예회복을 위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을 하고있다고. 옆에 앉아있던 이기주(64) 씨의 아들은 95년도 폭력경찰에 의해 죽은 것이 확실한데도 오늘날까지 의문사로 처리되어있다. 사진까지 보여주며, 설명하신다. 포승줄에 묶인채 강가에 버려진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볼 때마다 “꼭 진상규명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고 했다.

걸려있는 옷가지들, 얇은 이불들, 이음새 부분에서 들어오는 왕바람… 겨울을 나기엔 형편없었다.

“밤에 이 다리랑 팔을 못펴고 자서 지금도 마디마디가 쑤셔. 난 원래 관절이 좋지 못한데 더 심해진 것 같어.”

이제는 서운한 것이 풀리신 것 같았다. 언제까지 농성을 할건가, 라고 여쭈었더니 “가족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 명예회복되는 그날까지”라며 “특별법이 통과되지 않는 한 집에 내려가서 어떻게 편히 발뻗고 자겠냐”며 반문했다. 강종학 씨는 “민주화를 죽음으로 염원했던 그 아이들이 곱게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부모된 도리를 다하겠다”며 끝말을 흐렸다.

농성이 일상인 사람들

일년 내내 천막이 서있는 곳이 또 하나있다. 명동성당 앞. 현재는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한 범국민 투쟁본부, 한총련 명동성당 구국 단식 농성단, 한전분할 매각 반대 농성단이 천막에서 생활하고 있다. 11일(토)에 있었던 민중대회로 며칠 동안 예전보다 사람들이 붐볐다. 민중대회로 모였던 농민들이 일터로 내려가지 않고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언론에서는 며칠동안 “시위대가 폭력적이더라도 경찰에선 앞으로도 최루탄을 쏘지 않겠다”고 선심쓰듯 약속한 것에 반발하며 “누가 폭력적이었는지 따져보자”며 전국농민회 회원들은 분노했다. 7일(금)에 정부종합청사에서 2차 집회를 가지고 내려갈 예정이라고 했다. 천막 안은 새로 가세한 농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렇게 어수선하더라도 이것이 일상인 사람들로서는 생활수칙이란 것이 있다.

“첫째, 시간엄수. 둘째 솔선수범. 셋째 예의바른 농성단… 이 외에도 많아요. 무엇보다도 몸이 지치니까 웃으면서 즐겁게 농성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먼저 한다는 생각으로 해야죠.”

단식 농성 10일째인 8기 신임 한총련 대의원의 말이었다. 열흘째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짐정리를 하고 있었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단체생활이니까 무엇보다 청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활이 짜여있어야 견디기가 낫습니다”라고 했다. 다른 두 사람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을 하고있었다. 일상을 제쳐놓고 농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는 농성이 일상이다.

농민들이 천막 밖으로 나와 짧은 선전전을 했다. 찬 계단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농성을 시작하자 다른 천막에 있던 사람들도 같이 나와서 동참한다. “다른 이슈를 가지고 있더라도 서로의 요구에 대해 공감하고 농성을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총련 학생들도 자리를 같이 했다.

“언론에서는 농가부채해결, WTO 반대 등 우리가 왜 집회를 했는지에 대해선 언급 않고 오로지 폭력시위라는 것으로 국민들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고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향에 내려갈 수 있겠습니까?” 라며 명동성당 천막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천막에서 추운 겨울을 날 수 밖에 없는 이유들. 사람들은 이 천막들을 지나 국회의사당도 들어가고, 명동성당 안으로도 들어간다. 한번쯤은 그냥 지나가지 말고, 천막 안을 기웃거려보길 권한다. 물론 처음이라고 구박받을 지도 모르지만.

윤정은(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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