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5월 2003-05-01   1256

빛을 뿌리는 사람_ 옥수야학 교사 임춘영

눈으로 입맞추고, 가슴으로 말하고


‘운호 할배’가 오랜만에 봄나들이에 나섰다. 졸업하기 전까지 그를 ‘운호 학생’이라 부르며 공부를 도왔던 동생뻘 선생님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국립재활원에서 옥수야학 선생님들을 만나 공부한 김운호 씨는 그 덕분으로 고입, 대입 검정고시까지 치를 수 있었다. 몸을 가누는 것도, 말하는 것도 간단치 않지만 선생님들과는 이제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사이가 됐다.

운호 할배가 다니는 옥수 야간학교는 1976년 문을 열었다. 이 학교 교사들은 현재 국립재활원 등지에서 장애인들과 지역주민들의 학습을 돕고 있다. 임춘영 씨(23세)도 그중 한 명이다. 보고서 내랴, 토익학원 다니랴 정신 없는 대학 졸업반이지만 옥수야학에서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영어교사다. 운호 할배도 임춘영 선생 얘기만 나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학생들이 확실히 이해할 때까지 설명하지요.”

가르치며 배우다

청순한 외모의 20대 초반 여성인 임춘영 씨는 안경너머 호기심이 가득했다. 하마터면 기자가 오히려 시민운동에 대해 인터뷰를 ‘당할’ 뻔했다. 그는 왜 야학에 나선 것일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하고 싶었어요. 전 그 동안 부모님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살았거든요. 제가 하고 싶은 건 다했죠.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지난해 국립재활원에서 그가 만난 학생들은 동갑내기에서 할아버지까지 다양했다. 주로 한글과 영어, 한문 등의 수업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배움보다 정을 느끼고 싶어 오는 분들이었어요. 자신의 얘기를 많이 들려주고 싶어 하셨죠. 그분들을 가슴으로 대해야한다는 걸 배웠어요. 예전에는 그분들에 대해 동정심을 가졌지만 이젠 보통사람들과 똑같이 바라보게 되었죠.”

올해 들어서는 일주일에 두 번 교내의 빈 강의실에서 가난하고 바쁜 살림에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주머니들과 아저씨들을 만난다. 열정적인 선생님 못지 않게 학생들의 열의도 대단하다. 얼마 전 중등검정고시를 합격하고 지금은 간호조무사 시험을 준비하는 아주머니는 춘영 씨의 엄마와 같은 나이이기도 하다. 아저씨 한 분 역시 저녁 5시에 일을 마치고 6시 수업에 숨가쁘게 맞춰온다. 춘영 씨의 수업 외에 다른 수업을 9시까지 듣고 나서 밤일까지 하고 새벽에 귀가해서야 숙제를 할 수밖에 없는 분이기에 숙제를 내기가 미안할 정도란다.

“하나를 알려드리면 두 배, 세 배를 알려고 하세요. 새벽일까지 하면서 숙제까지 해오시는 거 보면, 아유 제가 그분들한테 배우는 게 더 많다니깐요”

춘영 씨는 옥수야학 교사로 활동하기 전까지 책임감도, 인내력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특히 약속에 대해서는 무딜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학생과의 약속이잖아요.”

그의 눈이 더욱 동그래진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몸이 아파도 참고 견디는 법을 춘영 씨는 배우게 되었다고.

“시간이 남아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와 시간을 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는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이 일은 결코 시간이 남아서 하는 일이 돼서는 안 되거든요.”

친구들과 함께 영화도 보러가고 옷도 사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해치워야 할 학과 숙제도 쌓여가지만 강의실로 향하는 것은 학생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다해보려고 애를 쓰면서 힘이 들었다. 동료들과 회의를 마치고 난 한밤중에야 다음날 제출해야 할 보고서를 부랴부랴 써야 했다. 하지만 이젠 내공이 채워진 것 같다.

“하나를 챙기면 다른 하나는 못 챙길 수밖에요”라며 덤덤해한다. 친구들과의 모임자리가 가장 많은 금요일, 역시 수업 때문에 나갈 수 없지만 위안 삼아 동료교사들끼리 수업 후 뭉친다. 일명 프라이데이클럽. 이런 그를 애처롭게 보는 친구들은 이제 숙제자료들을 챙겨주기도 한다고.

야학이 없어도 되는 날을 꿈꾸며

춘영 씨의 옥수야학에 대한 애정은 뜨끈뜨끈하다. “같이 있어보면 아는데요”라며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뭔가’가 옥수야학에 있다고 자랑이다. 그는 갖고 있지 못하다는 순수함과 순박함이 어디엔가 정착하지 못했던 그를 붙잡아 둔 것 같다고 말한다. 신임교사 연수시절 왜 들어왔냐는 물음에 서로가 잘 모르겠다며 웃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춘영 씨는 좋았다. 그런 이들과 함께 엎치락뒤치락 야학살이를 해온 그는 사람들이 너무 사랑스럽단다.

이런 마음은 춘영 씨뿐만 아니다. 졸업한 후에도 활동을 하는 선배들은 큰 버팀목이 되어준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면서 국립재활원에서 실용한문을 가르치고 있는 선배에 이어 춘영 씨는 그의 “2탄이 될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닌다. 영어선생님이 되고 싶은 그는 옥수야학으로 꼭 다시 돌아오고 싶다. 단, 야학이 없어도 되는 날까지.

“야학의 궁극적 미래는 없어져야죠. 하지만 아직 우리 주위에는 소외된 사람들이 많잖아요. 앞으로도 금세 없어지기는 힘들고, 그분들이 있는 한 계속 하고 싶어요.”

4월 15일 늦은 6시, 어두운 창 밖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과 진달래가 보이는 202호 강의실에는 아주머니 한 분만 앉아 있었다. 비록 이날 출석학생은 한 명이었지만 밤 9시까지 차례로 이어지는 세 시간의 수업은 진지했다. 저녁 7시부터 50분간 영어수업을 맡은 춘영 씨는 미리 카세트테이프와 중학교 영어교과서를 챙겨 이날 수업을 준비했다. 교단에 선 그. 또박또박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에서 앳된 모습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옥수야학의 교훈은 ‘사랑, 인내, 자립’.

처음에는 무덤덤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춘영 씨의 가슴에 이젠 와락 와 닿는다. 그는 이제껏 겪은 자신의 변화보다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은 변화를 꿈꾸고 있을지 모른다. 학생과의 혹은 자신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김선중(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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