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07월 2014-07-01   1649

[만남] 나는, 욕이라도 먹고 싶다 – 박재송 회원

나는, 욕이라도 먹고 싶다

박재송 회원

 

호모아줌마데스 / 사진 Zing

 

참여사회 2014년 7월호

 

“어렸을 적엔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죠. 과학 상상화 그리기 대회나 과학탐구대회 이런 거 하면 재밌고 신나고 그랬어요. 수중생물 키우기 실험 같은 거 했던 것도 기억나고 그냥 과학시간엔 집중이 잘 되었어요. 그래서 전공도 물리학과를 선택했죠.”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아이들의 꿈은 다 비슷비슷했다. 남자 아이들은 대통령, 경찰, 과학자가 대부분이었고 여자 아이들은 선생님이나 간호사 아님 현모양처 정도였다. 이루어지지 않기에 꿈이고 희망사항이겠지만 세월은 그 아이 들을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길목에 내려놓고 도망쳐버리기 일쑤다. 개구리밥과 부레옥잠을 애지중지 키우며 과학자를 꿈꾸던 소년이 훗날 전과 3범이 되고, 그 이후 세상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직업을 평생의 업으로 선택하게 된 사연. 이번 인터뷰는 그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주병은 운동을 하는가

 

“이번에 제가 출마한 지역구의 다른 당 후보가 그러더군요. 제가 후보들 중에 가장 어린데 전과는 제일 많다구요.”

박재송 회원. 그는 얼마 전 있었던 6·4 지방선거에 은평구 구의원 정의당 후보로 출마했었다. 전과가 3개나 되는 이유를 묻자 예상한 답이 돌아온다. 신기하게도 내가 만나는 전과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죄목들을 가지고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이번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죄목을 하나 더 알게 된 건 그나마 축복일까?

“2000년 매향리 사격장 이전 문제로 한창 농성 중이었을 때였죠. 사격장 인근의 갯벌에 발이 잠깐 빠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미군사시설이더라구요. 연행되어서 그 일로 재판을 받을 때 죄명을 보니 군사시설보호법 위반이더군요. 소명을 하라길래, ‘아마도 제가 침입한 그 시설은 벌써 원상복구가 되었을 겁니다.’ 그랬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연행, 재판, 죄명과 같은 엄중한 단어들이 오감에도 웃을 수밖에 없는, 코미디 같은 이 나라. 

 

“운동권학생이 된 계기라면, 선배들 잘못 만난 거? 하하하. 제가 나온 학교 분위기가 좀 그랬어요, 데모하면 이삼백 명씩 학생들이 모이고. 하루는 한 선배가 술자리에서 제 앞에 소주병을 꽝 하고 내려놓더니, ‘야, 이 소주병이 운동을 하냐? 안 하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직감적으로 이 질문에는 어떤 답을 해도 틀리겠구나 싶었죠. 그 선배가 운동권이었는데 어느 날 제게 ‘전태일 평전’을 건네주더군요.”

학부제 세대라 유독 동기들 하고 친하게 지냈고 그래선지 2학년에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학부학생회를 만들자 라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소주병이 거시적 혹은 미시적 차원에서 운동을 하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그의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사실 그전엔 운동권 되게 싫어했어요. 고등학교 때 연세대 근처에서 연행된 적이 있거든요. 대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끊이지 않던 때였는데. 근처 병원에 자원봉사를 하러 가던 중에 잡힌 거예요. 아무리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끝내 닭장차에 집어넣더군요. 억울한 마음에 데모하는 대학생들 욕만 실컷 했죠. 나중에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도 거창하게 내가 운동권이다 이런 생각은 안 했어요. 학교와 소통하기 위한 창구가 필요하지 않나, 그 정도였죠.”

 

되돌아보면 누구나 인생에 굵게 새겨지는 마디 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가 계속 ‘운동’하는 사람으로 남게 된 생의 굵은 꺾임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매향리 주민대책위 사무실에서 집회를 하는데 경찰들이 막아서 진입이 어려웠어요. 버스를 타고 가던 우리는 내려서 뛰어가야 했죠. 한참 뛰어가고 있는데 구멍가게 하시는 분이 길가에 나와서 저희에게 아이스크림하고 음료수 같은 걸 막 뿌리시는 거예요. 주민들의 호응이 대단했죠. 그리고 그날 집회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주민 아주머니 한분이 일어서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난 그동안 한총련 하면 정말이지 다 빨갱이들인지 알았다. 근데 오늘 보니 그게 아니더라. 미안하고 고맙다.’ 울먹이시면서 투박한 말투로 이런 얘길 하시는데 저를 포함해서 그때 그 자리에 있던 학생들이 많이 울었어요. 그날 이후 제 안에 한총련이라는 단체와 운동권에 대한 오해들이 풀렸던 것 같아요.” 

 

참여사회 2014년 7월호

 

세상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직업

 

학교를 졸업하고 군 제대 후, 그의 나이 서른 즈음. 그는 자신의 미래로 세상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직업 베스트 10위 중 당당히 1위를 차지한 바로 그 직업을 선택한다. 

 

“저랑 함께 활동을 했던 이들 사이에선 시민운동, 진보정당 활동, 지역운동이나 풀뿌리민주주의 이런 것들에 대해 고민하는 게 자연스러웠어요. 군 제대하고 2010년 민노당에서 당직자 생활을 시작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죠. 한 달에 90만 원쯤 받았으니까, 어려웠죠. 어렵긴 했는데 그래도 좋고 괜찮았어요. 이 길이 내가 꿈꾸는 던 바로 그 길이었으니까.” 

정치인들이 가진 직함의 특징은 ‘첫째, 많다. 둘째, 길다’이다. 그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의당 중앙당 대의원, 정의당 은평구위원회 부위원장, 정의당 서울시당 정책국장. 그 중 가장 긴 이름은 ‘친환경 무상급식과 안전한 먹거리 서울연대 공동위원회 위원장.’ 

 

“이번 지방선거는 당 차원이 아니라 제가 하고 싶어서 출마한 거예요. 정의당의 정체성과 과제 등이 여전히 미완의 영역으로 남아있고 미래도 불투명한 상황인데, 이런 시점에 맞이한 선거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후보자가 되는 게 가장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수많은 선거를 치루며 자신이 해 보지 않은 유일한 일은 후보자랑 후보자의 배우자 밖에 없었다며 뼈있는 농담을 던지던 그가 이번 선거에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제가 출마했던 지역에서는 정의당의 존재에 대해 많이 알렸다고 자부해요. 동네 이웃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석 달 동안 매일 다른 집을 찾아갈 수 있을 만큼의 단골집도 생겼구요. 이젠 술이라도 먹은 날은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정신을 바싹 차리게 돼요.”

 

처음 선거운동을 하러 나섰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정의당이 뭐하는 당이에요?’ 그러니까 말이죠, 정의당이 뭐하는 당인지 소개 좀 부탁드려요. 

 

“좋게 말하면 정의당은 스펙트럼이 무지 넓습니다. 반대로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도 있구요. 정의당이란 이름에서 느껴지는 애매모호함, 지금 정의당은 딱 그 정도의 상태라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어, 이 사람 진짜 쿨하네 하고 놀라는 사이에도 그의 입에선 냉철한 자기평가와 그에 바탕을 둔 비전과 목표들이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에겐 4년이 남았다

 

“지역정치를 하려면 적어도 그 지역에 상근하면서 돌아가는 사정도 파악하고 지역조직을 관리하고 키워내야 하는데 저희 당은 아직까진 그 정도의 인력풀과 조직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런 과제들을 하나씩 풀어가야죠. 아직도 진보정당 안에는 정당정치와 의정활동에 대한 축적치가 적다고 생각해요. 조직관리 혹은 다음 선거와 의정활동을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는 보수정당들과 비교하면 경험과 노하우 면에서 여전히 격차가 많이 나죠.”

 

진보정당들 사이의 통합에 대해선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시나요?

 

“아직도 진보정당들은 오류를 겪고 있다고 봐요. 아직 저희 당 안에서도 진보정당의 의정활동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들이 마무리 되진 않았어요. 이번 선거에서도 진보정당들 끼리의 통합을 바라는 여론이 있었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2008년 민노당 분당 이후 2011년 통합진보당이란 이름으로 다시 뭉치기까지 4년이란 시간의 축적이 필요했어요.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고 봐요. 더 많은 경험들과 논의들이 쌓이고 그런 시간들을 통해서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은 현실적으로 어렵죠.”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그는 진보정당의 한 일원으로 대한민국의 진보정당들이 국민에게 아무런 힘도 대안도 되어주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안타깝기만 했다고 토로했다. 그런 그에게 진보정당을 아끼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물었다. 이제 진보정당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보수양당의 영향 범위를 줄여나가면서 한편으로 진보정당의 힘을 길러내는 것, 지금의 정치구조를 조금이나마 바꿔나가는 것, 그게 저희들의 현실적 과제겠죠. 사실 새정치연합의 보수성을 가장 쉽고 확실하게 바꾸는 방법은 한시라도 빨리 진보정당들이 10% 정도의 지지율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새정치연합의 연대파트너가 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진보정당들이 가져야 그 연대의 장 안에 우리의 정치적 의지를 반영할 수 있게 되겠죠.”

 

그때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2016년에 총선, 2017년엔 대선이 있고 다음해 2018년엔 지방선거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모든 노력을 다 해봐야죠. 이것이 현재 제가 정치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비전이자 활동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세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도 목표를 이뤄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땐 아예 원점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진보정당 활동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이냐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무겁게 물어야 하는 순간, 그때까지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4년이다. 

 

참여사회 2014년 7월호

 

21통의 문자메시지

 

“얼마 전 정의당 차원에서 이번 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평가의 자리를 가졌는데 그때 조국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새정치민주연합은 욕이라도 먹고 있다, 정의당은 욕조차 못 먹고 있지 않느냐, 그 말이 기억에 많이 남았습니다.” 

그는 가을 아침의 청명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가을이 오면 부러 일찍 일어나 아침산책을 즐기기도 한다.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술 먹고 노래 부르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사람.  

 

노래 잘 하느냐 질문에 빼지도 않고 “네, 잘 합니다.” 또박또박 답하던 사람. 어려운 시절 결혼했지만 결혼 전 아내에게 약속했던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달에 백만 원은 꼭 갖다 주겠다’던 약속을 지금껏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다던 사람. 그런 그가 이번 선거에서 얻은 득표율, 5.2%…….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당신에게 정치란 무엇이냐고.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골목골목을 다니며 받았던 현장민원이 157개입니다. 그중 정책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추리니 47개였습니다. 선거운동을 하며 만난 사람들 중 제게 휴대폰 번호를 주면서 계속 연락하며 지내자고 했던 분들이 29분이구요, 동네에서 만나 술 한 잔 하면서 함께 의논도 하고 지역을 같이 일궈나갈 동네 분들도 약 250명 정도 되구요. 정치요? 제게 정치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투표가 끝나고 낙선이 확정되자 그의 휴대폰은 위로의 문자들로 몸살을 앓았다. 그 중 21통의 문자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온 것이었다. 

‘유세할 때 봤는데 낙선하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마시고 힘내세요.’ 

 

이 사람들은 나를 보고 무슨 희망을 가졌을까. 이들이 내게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욕조차 먹지 못한다며 농을 건네던 그가 진지한 얼굴로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내게 정치란 무엇인가. 내 이웃이 꿈꾸는 정치는 대체 어떤 모습인가. 앞으로 4년이란 시간 동안 그는 이 질문들 속에서 치열하게 헤맬 것이다. 

순간, 가슴 한 구석에서 깊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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