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운동가발언대

시민운동 항로, 지방자치로 돌리자

87년 6월항쟁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꼴을 갖추기 시작했다. 6월항쟁에 뒤이은 7∼8월 노동자대투쟁은 국가의 억압에 저항하는 시민사회세력들의 자율성을 현저히 확대시켰다. 그 결과 국가는 공식적으로 민주화 추진을 약속하는 등 민주화 및 시민사회 활성화 조치를 취하게 됐다. 대체로 이 때부터 한국사회에서는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계급적 불평등이라는 오래된 쟁점들에 덧붙여 환경, 소비자, 여성, 교육, 생활문화 등의 새로운 쟁점들이 부각됐다. 이는 현재 민주주의를 둘러싼 주요한 갈등과 대립의 지점은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도입의 문제라는 것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확대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국사회의 독점적인 권력구조의 유지는 이같은 갈등을 해소하기 어렵게 한다. 뒤늦게 실시된 지방자치제는 이러한 독점적인 권력구조를 분산시키기 위해 형식적 절차를 도입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여러 가지 걸림돌을 안고 있는 듯 보인다. 이는 동시에 시민들과의 보다 직접적인 결합을 추구하는 시민운동단체들에게 운동 조건과 관련해 중요한 문제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현재와 같은 중앙집중적인 형태의 권력구조는 지역이라는, 시민사회의 기반이 되는 생활세계의 공간을 단순히 행정적인 개념상으로만 머무르게 하고 있다. 지역이라는 가치는 단지 주변적인 영역으로서 중앙을 떠받치는 하부구조로만 사고됐고, 이는 최근의 지방자치제 도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직적인 행정체계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교육, 문화, 정치 등 모든 것들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구조 하에서 지역은 생활의 터전이나 시민사회의 풍부한 토양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지역이 자생적인 영역으로 숨쉬지 못할 때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경험을 하고 성숙된 시민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여건은 원천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고 합리적으로 조정, 해결해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지역이라는 생활단위의 등장은 현재 형식적 민주주의의 좁은 틀에 갇혀 있는 셈이다.

따라서 지방자치의 확대는 시민운동의 토양이 되는 시민사회의 확대와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요소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의 지방자치제도는 단체장을 주민이 직접 선출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개선돼야 할 점이 많은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다.

지방자치 핵심은 주민참여의 제도화

지방자치라고 하면 지금까지 중앙정부의 일선 행정기관에 불과했던 서울특별시, 광역시, 도, 그리고 시, 군, 자치구에 대해 실질적인 지방정부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 지방자치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우리사회 이렇게 바꾸자」, 1995, 경실련 자료집 참고).

첫째,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분권화가 추진돼야 한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지방정부로서 자율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단지 중앙정부의 일개 일선 행정기관으로서 중앙정부의 감독과 지시에 의해 지배를 받아왔다. 지금까지 지방자치단체가 처리한 사무 중 평균 2/3는 중앙정부의 위임 사무였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의 사무에 대해 지방자치단체가 자율권을 행사하려면, 위임 사무와 관련된 기존의 법령을 정비해야 한다. 또한 지방자치법에 우선해 기존 법령의 효력을 인정하고 있는 현행 지방자치법은 대폭 개정돼야 한다.

둘째, 지방재정의 확충이 필요하다. 진정한 자치권의 행사는 자치재정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지방정부의 완전한 재정자립이란 이론적 타당성도 현실적 가능성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방정부에 대한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은 불가피하다는 인식 하에 재정 지원의 방법을 합리화하고, 지방정부의 자율권을 확대해나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바람직한 유일의 방법이다.

셋째, 교육자치의 확대 심화가 필요하다. 교육자치의 본질은 기초자치단체인 시, 군, 구와, 직접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의 자율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다. 이는, 중앙정부의 역할은 전국에 걸쳐 통일적으로 적용돼야 할 교육지침을 마련하고 교육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는 데 그쳐야 하며, 교육내용, 교육제도 등에 대해서는 지방자치단체와 일선 학교가 결정권을 행사해야 함을 의미한다. 특히 학교운영위원회 제도의 도입과 관련해 보면, 시민들이 학부모로서 교육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참여할 기회의 확대는 교육자치의 실현이라는 문제에 의해 근본적으로 규정받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넷째, 장기적으로는 지방경찰제도의 확립이 요구된다. 범죄를 단속하고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찰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지방정부는 영내의 범죄예방과 질서유지를 위해 경찰력을 보유해야 한다. 경찰은 이제 국립경찰과 지방경찰로 나누어 그 직무를 분담해야 하며, 지방경찰은 지방주민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지방자치단체가 실질적인 지방정부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조건들은 중앙정부의 권력분산에 대한 의지가 분명할 때만 실현이 가능한 내용들이라는 점에서 시민운동이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자기운동의 토대를 확대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핵심적인 조건은 주민들의 참여가 제도화돼야 한다는 점이다. 주민참여는 선거 이외의 방법으로 주민이 지방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현행 지방자치법은 청원과 주민투표만을 규정하고 있으며 그나마 주민투표는 관련법률이 제정되지 않아 사문화되고 있다. 특별한 주민참여제도가 없는 상태에서 옴부즈맨 제도의 도입 등에 관한 조례 제정에 대해 몇몇 지방의회에서 노력한 바가 있긴 하지만 현재의 상태는 주민들의 참여제도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는 형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춘천환경련과 춘천경실련이 춘천시와 협력해 쓰레기 매립지 선정 조정위원회를 구성한 일은 특기할 만하다. 민간기구로 구성된 이 기구는 전권을 위임받아 매립지 부지를 선정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지방자치단체의 전적인 권한이라고 할 만한 부지선정과 관련한 일을 시민단체 및 주민들에게 직접 결정하도록 해 주민들 스스로 결정하게 한 춘천시의 사례는 주민참여의 모범적인 사례 중의 하나로 기록돼도 좋을 듯하다 (『강원일보』 1996년 11월 30일자 참조). 또 서울시의 감사청구제도는 주민참여 제도 중 주민제안의 성격을 받아들인 것으로 옴부즈맨 제도가 도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도입해볼만한 제도이다.

정보공개제도로 참여 공간 확장을

한편 주민참여의 전제가 될 정보공개법과 행정절차법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직접민주주의는 정보의 독점적인 구조의 해체가 전제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확립으로 권력의 독점은 해소됐지만, 정보의 독점적인 구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정보사회에서는 정보 그 자체가 자본이나 권력 획득의 근거이므로 모든 시민에게 정보에의 접근과 소유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확립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정보의 독점적인 구조를 해체하는 것은 직접민주주의 관건이 되는 시민참여 공간의 확장과 그 가능성을 가늠하는 지표다. 민주주의의 앙상한 뼈대는 있으되 그 안에서 살아숨쉬는 내용들은 여전히 독점적인 구조에 편입돼 있는 정보 독점구조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직접적으로 민주주의의 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활동의 폭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요인이 된다.

정보공개제도의 확립은 시민과 정부 간의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을 촉진하며, 정부의 정책결정과 행정과정에 다수의 시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절차적인 정의를 실현하게 한다. 정보공개제도의 실시는 행정민주화로 국민의 행정에 대한 참여를 높이고 결정과정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활동과 감시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책임행정과 공개행정으로 공무원들의 직권남용이나 직무태만을 방지하고 밀실행정이 지닌 폐단과 역기능을 제거하며, 시민단체나 야당 및 일반 시민이 행정에 대한 효과적인 감시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동시에 개발독재체제의 잔재로 남아 있는 권위주의적인 일방통행적 행정방식이나 관료주의적 병폐는 최근 고속전철, 도로, 공항건설 같은 대규모 개발계획이나 쓰레기 소각장,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같은 환경관련 시설사업 등에서 행정의 난맥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는, 행정의 공정성과 적정성을 보장하고 행정에 대한 시민의 능동적인 참여를 통한 민주적 통제의 제도적 보장이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행정절차법의 제정, 시행을 통해 행정에 대한 국민의 접근이 보장되고 행정과정에 대한 국민의 능동적 참여를 보장함으로써 행정의 정당성과 수용을 확보할 수 있다. 행정절차법은 국민이 더 이상 행정의 객체나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행정의 파트너이자 서비스의 고객이라는 인식을 제도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행정민주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정보공개법과 행정절차법이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통과돼 지방자치단체의 정책결정과정에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더욱 폭넓게 열리게 됐다. 형식절차가 마련된 이상 실제로 주민참여를 조직하기 위한 노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앞서 예를 든 춘천의 경우도 춘천시가 매립지의 적절한 후보지에 대한 정보를 민간기구에 공개하지 않았다면 이루어지기 힘든 사례다.

민주주의를 보다 확대하는 길

한국사회가 지난 40여 년간 유지해온 중앙집중적인 권력구조를 지방자치단체로 그 권한을 분산하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길이다. 87년 6월항쟁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의 도입이 시민사회의 영역을 확장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지방자치의 실시는 지역에서의 주민들의 참여를 촉발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보다 심화시킬 것이다. 이는 시민사회의 영역을 더욱 확장하는 것으로 연결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지방자치단체가 실질적인 지방정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갖도록 하는 것은 시민운동에게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하승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조직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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