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7년 01-02월 1997-01-01   1838

지역운동시대를 연다1-관악주민연대

1만명 청원, 철거 막은 ‘주민 파워’

미국의 빈민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스데반 개스킨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무도 하고 있지 않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이 세상에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아무도 하고 있지 않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 앞으로 달려가기만 바빠 짐짓 뒤에 넘어진 이들을 모른 체하는 생존경쟁이 합법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때, 매서운 칼바람을 받아안으며 관악주민연대(집행위원장 이호 도시문제연구소 연구원)를 찾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회적 약자들을 애써 외면하고 살아가는 뭇사람들과 달리 ‘끝나면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돌아보고 싶지도 않은 철거 싸움’의 어려움 속에서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 생각하며 실천하는 이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관악구 신림 1동 1631-19 5층. 이곳은 드물게 빈민운동을 중심으로 지역활동을 펴고 있는 관악주민연대가 사단법인 관악사회복지, 관악자활지원센터 등과 함께 자리한 곳이다. 지난 95년 3월 14일 창립했으니 두 돌을 앞두고 있는 셈이다. 40여 평 남짓한 공간에는 관악주민연대 유일한 상근자 강인남(27) 사무국장을 비롯, (사)관악사회복지 관계자 3명, 관악자활지원센터 관계자 4명 등 모두 8명이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관악주민연대의 태동을 이 시기로 잡는 것, 관악주민연대의 얼굴을 이 숫자에 한정하는 것은 관악지역의 주민운동을 너무 근시안적으로 보는 것이 돼버린다.

정부의 밀어붙이기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불붙기 시작한 70년대 ‘철거싸움’이 주민의 조직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즉자적 대응에 머물렀다는 측면을 인정한다 해도 76년 싹을 틔운 우리 나라 최초의 의료생협 ‘난곡 희망의료조합’은 사회적 약자들이 직접 나서서 우리 사회 공동체 정신을 지키려 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민운동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당시 118세대가 창립회원으로 참가한 희망의료조합은 월수입 3만 원 이하 5인 이상 가족이 세대별로 월 100원씩 조합비를 내 갑자기 입원하거나 생명에 위험이 있는 회원을 위해 대출해주려는 데 목적이있었다. 이후 87년 회원들의 의결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힘을 모아 주민, 의료인이 함께 운영하는 새로운 도시빈민지역 의료공동체를 만들자는 구상으로 문을 연 것이 요셉의원. 요셉의원은 유지비와 운영비, 그리고 자원봉사 차원에서 의료부를 담당하던 의료진들의 몰이해로 주민들과 괴리, 얼마 후 문을 닫고 말았지만 의료활동의 공익성과 윤리의식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현실에 적지 않은 교훈을 던지고 있다.

철거지역 주민조직들의 통합

관악주민연대 속에 면면히 흐르는 지역운동의 역사는 또 있다. 이는 관악주민연대가 동단위 공부방 7곳과 어린이집 3곳, 봉천 3·6동 주민회 준비모임, 봉천 5·9동 주민회 준비모임, 난곡주민회 준비위, 신림 10동 지역사랑모임 등 철거지역에서 강산이 변할 만큼 터를 닦아온 주민조직들이 통합한 것이니만큼 이들의 역사가 온전히 주민연대의 것일 수밖에 없다. 관악구 신림 1동 1631-19 5층에 적을 두고 있지만 관악주민연대의 얼굴은 지역에 두루 퍼져 있다는 말의 뜻을 이제야 알 수 있다.

그러면 관악주민연대 태동 당시의 고민을 들어보자. 이 위원장의 전언이다. “애초의 고민은 한 마디로 집약됩니다. 곧 가난한 사람들, 빈민들의 문제가 숨겨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때 철거지역의 문제는 폭력을 동원한 강제철거와 이를 저지하려는 주민들의 충돌로 언론의 사회면을 장식하며 부각되기도 했지만, 결국 재개발이 되고 그 곳의 대부분을 중산층이 차지하면서 더 이상 사회문제화되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던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론가 숨겨진 거죠. 그러나 분명한 점은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디에선가 더 팍팍해진 삶을 연명해 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도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2년이 가까와오는 지금, 눈에 띄는 성과는 많지 않지만 이 원칙만은 놓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여기에 동단위로 이뤄지는 철거싸움의 난맥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통합에 가속도를 더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봉천 3동과 신림 10동에 철거가 진행되는데 봉천 3동 주민은 3동만의 문제로, 신림 10동은 10동만의 문제로 항의하고 대안을 요구했다. 이는 철거문제를 지역적으로 협소화할 뿐 아니라 결과에 있어서도 전체가 함께 대응했을 때보다 엄청난 차이를 낳았다.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그릇으로 관악주민연대가 제기된 것이다.

현실 또한 철거투쟁에만 근거한 주민운동이 될 수 없게 만들었다. 주민들의 성분(?)도 변했을 뿐 아니라 풀뿌리 민주주의를 천명한 지방자치제는 물리적으로 근접한 주민운동을 뛰어넘는 새로운 지역운동의 내용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조건의 변화를 수반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자제는 주민들이 직접 지역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영역의 확장을 의미하는 ‘혁명적인’ 계기가 아니던가.

열매 맺은 집단청원운동

그런 의미에서 발족 2주만인 3월 27일 관악주민연대 소속 주민 250여 명이 봉천 6동 철거지역에 모여 가진 ‘자방자치시대의 관악구 재개발문제 개선을 위한 주민청원발의 서명운동 발대식’은 정치조직화로의 첫 시험대였다. 관악주민연대는 청원내용으로 1. 재개발지역에서 폭력행위 금지 2. 강제철거 금지 3. 재개발사업시 세입자 사업참여 보장 4. 가이주단지 보장 등을 내세우고 관악주민 5,000명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열흘간 진행된 서명운동에는 당초 예상을 훨씬

웃도는 약 1만 명의 주민이 참여했고, 이 집단청원은 관악구 구의원이자 난곡에서 빈민지역운동을 일궈온 김혜경 의원의 소개로 4월 9일, 마침 4·19 기념 마라톤대회에 참석한 학생 약 3,000여 명과 주민 3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의회에 정식 제출된 것이다.

그 날은 마침 회기 마지막 날이었고 1만여 명의 주민이 참여하는 일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터라 가장 먼저 구의회가 술렁였다. 구의회 의장은 직권으로 건설상임위에 청원을 이첩했다. 이어 건설상임위는 보다 자세한 조사활동을 위해 회기를 3일 연장시켜줄 것을 본회의에 요청했다. 그리고 이 요청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쯤되자 구청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것은 물론 계속 본회의를 방청, 무언의 압력을 가한 주민들의 조직적인 활동 또한 촉매제가 됐다.

“회기 연장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관악주민연대 소속 주민 15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국 건설상임위는 청원 그대로 본회의에 상정, 의회는 만장일치로 이 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최초로 주민의 참여로 주민문제를 해결했다는 커다란 열매를 거둔 일대 ‘사건’이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이 사건 이후 현재까지 관악구에서는 폭력, 강제철거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실제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사려깊은 표정의 강인남 사무국장이 전하는 당시의 감격이다.

집단청원운동으로 자신의 정치력을 드러낸 관악주민연대는 6·27 지자체선거에 보다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선거를 앞두고 ‘올바른 지방자치 실현을 위한 관악구민 결의대회’를 통해 관악주민연대의 공식적인 정책자료집을 주민들에게 전달했고, 이를 바탕으로 구청장 후보 초청토론회를 기획했다. 관악주민연대의 정치력을 감지한 구청장 후보들은 기꺼이 수락했고 이 자리에서 주민들이 질의한 재개발사업의 원칙 유지, 복지예산의 확대, 학교급식 확대 실시 등은 이후 국내 최초의 순환식(가이주단지 조성 후 재개발이 진행되는 방식) 재개발아파트 건립, 구립탁아방 위탁운영권 확보로 이어지는 등 구행정과의 협력관계(?)를 상당부분 이끌어냈다.

공부방 어린이 체육대회, 지난 해 12월 3일 열린 환경시민대토론회 또한 관악주민연대가 관악지역운동의 혈통을 이은 주체인 동시에 빈민운동을 넘어선 지역운동단체로의 자리매김을 분명히 한 자기선언적 활동이었다(그럼에도 활동가들은 눈에 띄는 성과가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지나친 겸손이 아닐 수 없다).

관악주민연대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곳이 있다. 바로 (사)관악사회복지(이사장 김혜경)와 관악자활지원센터다. 한 사무실을 사용하기 이전부터 같은 뿌리에서 나온 줄기.

관악사회복지는 유독 가난한 이들이 많은 이곳에 ‘복음의 실현’을 지향한다. 자물쇠 채워진 방 안에서 놀다 화재사고로 숨진 세 쌍둥이들이 다시는 없는 지역,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철거의 두려움이 없는 세상…. 다른 이들에겐 고민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이런 문제가, 그러나, 서울시에서 가장 많은 시민이 살지만 재정자립도는 가장 취약한 지역 가운데 하나인 이 지역에서는 너무나 간절한 복음이다.

복지와 자활, 두 마리 토끼

지난 해 6월 개소한 관악자활지원센터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공동체 건설 운동을 한다. 그간 철거싸움을 제외한 빈민운동 역량 대부분이 교육과 건강문제 등에 투하됐던 점과 비교해 ‘고용’에 초점을 둔 센터의 활동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으로까지 격상되는 관심을 끌고 있다.

자활지원센터 사업부장 김경환(32) 씨는 그 변화과정을 이렇게 전했다. “급박하게 진행되는 철거싸움은 항상 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했습니다. 자기가 살던 집을 비우면 당장 철거될까 두려워 일터에조차 나갈 수 없었던 것이죠. 이런 불안정한 생활에 그대로 노출돼 있는 주민들에게 교육문제와 공동체의식, 건강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나래건설이나 우리건설, 실과 바늘 등 몇몇 지역에서 주민들만의 공동체 활동이 시도됐지만 합법적인 지원망을 확보하지 않고는 기반을 다지기가 어렵다는 인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자활지원센터는 스스로 내건 ‘함께하는 노동으로 건강한 지역사회’에서 드러나듯 자활의지를 가진 저소득주민과 일감을 연결해주는 일을 한다. 여기서는 봉제일 등 부업공동체와 일꾼을 알선해주는 용역사업단, 창업지원단, 협동조합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자신에게 가장 냉정한 이는 자신이라 했던가. 관악주민연대 사람들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의 활동이 빈민운동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까요. 점차 주민들의 생활과 가까운 문제에 접근하면서 대중조직으로서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지만 아직은 걸음마단계죠. 특히 건강한 주민지도력이 발굴, 양성되지 못하고 아직도 활동가가 주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또다시 ‘직무유기’와 ‘설친다는 오해’ 사이에서 혼란스러움을 안깁니다. 이는 곧 장기적인 지역운동으로의 전망 또한 불투명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구요.”

이 위원장의 가감없는 현실진단. 관악주민연대를 괴롭히는 것으로 ‘돈문제’도 빠지지 않는다.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더 이상 생활고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인식이 어느새 자리를 잡은 요즘도 강 사무국장에겐 한달 평균 30만 원도 못 되는 활동비가 고작이다. 물론 식사는 대부분 주민들이 해결해 주지만 말이다. 이런 사정이라 자체 수익사업을 ‘적극적으로’ 고민해보지만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아 시작이 천리라는 후문이다.

희망을 먹고 사는 사람들

하지만 이들은 보상이 아닌 분명 희망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작은 희망’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이다. 이 위원장의 말이다. “철거싸움은 격렬한 충돌이라 상처도 많이 나는 투쟁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끔 자기 잇속만 채우고 돌아가는 이들도 있구요. 그래서 싸움이 끝나면 매우 허무해집니다. 하지만 등을 돌렸다고 생각하는 이들 가운데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오거나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결국 주민들과 함께 하는 우리가 정도를 가고 있다는 반증이겠죠. 그럴 때는 결코 작지 않은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보람을 느낍니다. 그리고 더 큰 희망은 너무나 어려운 길임을 알면서도 이런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있다는 사실이구요. 또 스스로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하는구나’하는 자각, 자신을 확인하는 생활이 소중합니다. 빈민운동을 흩어지지 않는 지역운동으로 정착시키는 일이 우리의 최대, 최후의 과제이구요.”

상근을 하는 특성상 주민들과 더욱 친밀도가 높은 강 사무국장의 희망 또한 다르지 않다. “솔직히 처음 활동을 시작할 즈음에는 제가 아이들을, 엄마들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한 마디로 겁이 없었죠. 그리고 어머니학교 등에 찾아오는 엄마들을 보며 ‘그래 이들은 변하고 있어’라고 착각했죠. 하지만 요즘은 김장김치로 엄마들과 밥상공동체를 만들며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배웁니다. 더 이상 우리의 그릇에 끼워맞추면서 함께 출발하지 않는다고 조급해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자세, 그의 얼굴에서 녹녹치 않은 연륜이 흐르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뱃속에 사개월된 아이를 둔데다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환상적인 아내와 함께 사는 자칭 ‘복많은 남자’ 김경환 씨는 생계를 위해 마을버스 운전을 하면서 느꼈던 생생한 체험으로 희망의 말을 대신한다. “시민없는 시민운동에 대한 대안으로 지역운동을 어떻게 풀어가나 하는 문제는 항상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죠. 그러던 중 마을버스 운전을 하게 됐죠. 3∼4개월 했나요. 그 사이에 주민들을 거의 다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주민들과 만나야 하는가를 실감했죠.”

한때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 내부고발자지원센터에서 활동한 김씨의 지역운동 출사표는 ‘관악구 명칭을 해방구로 바꾸겠다’는 것. 그리고 그 날까지 김씨와 그의 동료들은 ‘지역에서 푹폭 썩자’고 약속했다. 결국 우리의 몫은 이들이 펴는 ‘지역자치 혁신운동’에 따뜻한 관심을 보내며 이렇게 외쳐보는 것이다. “용기있게 뛰어나가 참여하라.”

손설화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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