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2월 2002-12-01   600

시대와 사람

문학박사 김용한의 SOFA 개정 투쟁기

“첫째, 목소리를 높여주세요. 이곳에는 매향리에서 오신 분들이 많이 방청하고 계십니다. 아시다시피 매향리에서는 50년 간 미군의 사람 잡는 폭격 소음 때문에 가는 귀먹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둘째, 공소장을 고쳐 주세요. 공소장을 여러 번 읽어봤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매향리에서 한 행동 가운데 어느 것이 어떤 죄에 해당한다는 건지 정확하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A4 용지로 15쪽이나 되는 공소장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더군요. 그렇게 긴 문장은 태어나서 처음 봤습니다.

셋째, 매향리 폭격장은 군수업체 록히드 마틴의 폭격장입니다. 매향리 폭격장의 입간판에는 ‘WELCOME TO KOON-NI LOCHKEED MARTIN’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매향리 폭격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말 바로 아래 있는 록히드 마틴!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환영합니다 주인 백’의 바로 그 ‘주인 백’이라는 것입니다. 매향리 폭격장이 주한 미공군의 폭격장이라고 해도, 더 이상의 인명피해와 자연환경, 인문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 공여를 해제하여 돌려받아야 합니다. 하물며 록히드 마틴이라는 무기회사의 폭격장인데 망설일 필요가 뭐 있습니까? 즉각 반환을 요구해야 합니다.

넷째, 매향리에 한번 다녀오신 뒤 판결해 주십시오. 법을 모르는 저희 같은 사람들이 나서니까 이런 데까지 붙잡혀 와서 재판이란 걸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이요, 엘리트이신 여러분 같은 법조인들께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SOFA(한미행정협정) 전면개정, 매향리 록히드 마틴 폭격장 폐쇄를 위해 적극 나서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에게 형량을 선고하시기 전에 매향리를 한번 다녀와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재판장님과 판사님들께서 나중에 대법관 인사청문회에 나오실 때 이번 재판기록이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울 뿐만 아니라 유리한 자료로 쓰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것은 지난해 8월 21일 매향리 사격장 폐쇄 투쟁으로 구속기소된 김용한 소파개정 국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이하 위원장)이 재판에 앞서 한 모두진술을 요약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20여 분 간 법정을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큰 목소리로 이 글을 읽었고, 그 자리에 왔던 200여 명의 방청인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김 위원장은 그때 이미 ‘재판도 할 것 없다. 이 재판은 내가 이겼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40여 일 간 구속되었던 그는 이 재판에서 ‘선고 유예’를 받았다.

“재판하기 전에 매향리에 한번 다녀오십시오”

운동가들의 법정진술이 화제가 되는 것이야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처음 구속되어 법정에 선 사람이 재판도 하기 전에 ‘이겼다’며 쾌재를 부르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그는 그만큼 배포가 큰 사람이다. 그리고 낙관적이다.

‘배포’ 와 ‘낙관’, 이 두 낱말이 없다면 우리는 그의 운동사를, 아니 그의 인생사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흔히 말하는 ‘진보운동계’에서 남다른 이력을 가졌다. 다들 대학 다닐 때 ‘장’ 자리를 거쳤고, 술이 거나해지면 “내가 무슨무슨 싸움에서…”로 시작되는 무용담을 늘어놓기 바쁜 이 동네에서, 그는 단 한번의 시위에도 참가한 적이 없는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그는 1975년 대학에 들어가 유신정권 말기에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국립 공주사범대학을 다니던 그에게 학생운동은 허용되지 않았다. 학비를 지원하는 대신 전공 공부 외의 다른 것은 철저하게 막는 학교의 지침 때문이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1979년 서울로 올라와 서울대 대학원 독문과에 진학했다. 10·26이 터지면서 그는 대학원 연락책을 맡았다. ‘서울의 봄’을 맞아 학부생들이 서울역으로, 신세계백화점 앞으로 물밀듯이 뛰쳐나가자 대학원생들도 연락책을 선정해 뜻을 나누었는데 그 일을 김 위원장이 맡은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당시 서울대 학보는 검열이 무척 심해 기사가 제대로 실리지 못했다. 학보가 나오는 날이면 김용한 위원장은 학보사로 달려가 잘려나간 기사들을 찾아내 조각조각 맞췄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교회에 청년들을 모아 놓고 그 기사를 큰소리로 읽었다.

그렇다고 해도 유별난 학생운동 경험도 없는 그가 어떻게 미군반대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을까? 여기서 바로 김용한 특유의 ‘배포’와 ‘낙관’이 나타난다.

그가 미군반대운동을 시작한 것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8년 아내와 함께 부모님 곁인 경기도 평택으로 이사한 김 위원장은 6개 대학교를 돌아다니며 시간강사를 하고 있었다. 그 때만 해도 그는 대학교수를 꿈꾸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진보 성향의 월간지 『말』을 정기구독하긴 했지만 장차 그의 직업이 시민운동이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탈선의 기지촌

평택은 그가 고등학교를 다닌 곳이다. 20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그는 말이 통하는 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한겨레신문사 평택지국. 그곳을 통해 지역의 진보인사들을 알게 되었다. 그들과 어울려 지내기를 2년여.

1990년 3월 김 위원장의 인생을 바꿔놓은 신문기사가 실렸다. 바로 ‘용산미군기지 평택 이전 예정’이라는 기사였다. 그 기사는 그에게 잊고 있었던 고교시절의 기억을 되살려놓았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그는 딱 한 번 오산공군 기지촌(그곳도 행정구역으론 평택이다. 미군들이 잘 모르고 오산이라고 붙인 것이 통용되고 있다)에 가 본 적이 있다. 그곳의 한 친구 집에 놀러갔던 그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가슴이 훤히 보이는 웃옷에 짧은 바지 차림의 여자들이 미군에게 달라붙어 몰려다니는 모습이라니…. 그 광경은 그에게 ‘퇴폐’ 그 자체였다. 기지촌 근처에 사는 친구들 중에서는 커다란 군복 바지에 담배와 대마초를 넣고 다니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에게 떠오르는 미군기지의 이미지는 퇴폐와 탈선이었다. ‘부모님이 살아오신 땅이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클 곳인데, 퇴폐와 탈선이라니…’ 그는 신문을 들고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그렇게 미군기지 평택이전반대운동이 시작됐다. 전화도, 사무실도 없는 초라한 시작이었다. 누구나 자식을 좋은 환경에서 잘 키우고 싶어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이런 일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이게 보통 싸움인가? 거대한 골리앗 ‘미군’을 상대로 하는 싸움 아닌가? 김용한 위원장이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파트를 돌며 전단을 뿌리고, 배달되는 신문에도 끼워 보냈어요. 평택 전에 미군기지 이전후보지로 잠시 거론되었던 대전에서는 YMCA를 중심으로 공동대책위가 꾸려졌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찾아가기도 했어요. 그렇게 활동을 하면서 성명서 딱 다섯 장 뿌리니까 경찰이 우리를 찾으러 다니더라구요. 우리를 지하조직처럼 짜맞춰 조직사건이라도 하나 터트릴 기세였어요. 그래서 이름을 공개했죠. 당시 이름을 공개할 수 있었던 사람은 저와 포장마차를 하는 제 친구, 이렇게 둘뿐이었어요. 그랬더니 신문에 공동대표라고 나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평택시민모임을 꾸리게 됐고, 1991년 6월 공대위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러나 활동은 쉽지 않았다. 사회단체들이 똘똘 뭉쳐 1만여 명씩 모이는 집회를 열었던 대전과는 달리 주민 50명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공대위가 출범한 지 한 달쯤 된 7월, 용산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한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김 위원장으로선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우연히 지역 신문에서 ‘미군기지 반대 주민들 200여 명 모여 시위’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평택군 고덕면 당현 2·3·4리, 서탄면 장동 1·2리 주민들에 관한 기사였다. ‘200명이나 모여 시위를 하다니….’ 기사를 보자마자 그는 그 마을로 향했다. 가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서 고덕면 두룽리로 들어갔는데 이 마을 입구에는 ‘미군기지 결사반대’라는 현수막까지 걸려 있었다. 더구나 그 마을은 미군기지 이전대상지에 포함되지도 않은 곳이었다. 동네에서 만난 노인의 말은 풀죽어 있던 김 위원장에게 새로운 힘을 주기에 충분했다.

“미군들이라는 게 본래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는 놈들이야. 이번에는 아니어도 다음 번엔 우리 마을로 들어올걸. 그렇게 야금야금 동네 땅을 뺏는다니까.”

‘미군이 들어오는 곳도 아닌데 이 정도니, 신문에 난 곳에서는 얼마나 더 지지해줄까.’ 마을이 가까워올수록 그의 기대는 커져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문전박대를 당했죠. 마을 사람들이 이미 저를 알고 있더라구요. 경찰이 돌았던 거예요. 김 뭐시기라는 놈이 있는데, 평택놈도 아닌 것이 이 곳에 와서 순빨갱이짓을 하며 미군기지 이전반대운동이나 하러 다닌다고요.”

빨갱이라는 말도 꺼림칙했지만 실상은 땅값을 올리기 위해 이전반대운동을 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가 반가울 리 없었다. 쫓겨나고, 쫓겨나고, 또 쫓겨나고…. 그러던 터에 우연히 마을 이장들 중 하나가 친구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회였어요. 그 날로 달려가서 ‘내가 네 형 친구다’라고 말을 놓아버렸죠. 그전까지만 해도 이장님, 이장님 했거든요. 그랬더니 ‘당신이 평고(평택고) 나왔단 말이냐’ 하면서 놀라더군요.”

마을 일도 돕고 노인들과 말동무도 하면서 김 위원장의 미군반대운동은 조용히 시작됐다. 그 동안 마을을 드나들면서 주워들은 주민들의 이야기를 모아 연극도 만들었다. 누구나 자기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만큼 파란만장하다고 생각하는 법!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김 위원장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마을 앞에 초소를 만들어 미군이나 국방부, 군청에서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막았고, 노인들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시위도 했다. 그렇게 하기를 3년여, 마침내 정부는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 계획을 유보한다고 발표했다. 평택 주민들이 이긴 것이다. 그의 배포와 낙관속에는 이 때 느낀 인간에 대한 신뢰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어려운 운동일수록 국민들과 함께 단계밟아야

평택 이전계획을 유보한다는 발표가 있자 이번에는 ‘서울연합’이란 단체가 “용산미군기지 지방이전 왜 안 하냐?”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김 위원장은 곧바로 서울연합을 찾아가 미군기지 관련 연대운동을 제안했다. 서울은 지방으로, 지방은 서울로 떠넘기려는 운동이 아니라 불평등한 SOFA에 따라 50년 넘게 공짜로 빌려준 미군기지를 돌려받는 운동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윤금이 사건’으로 반미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당시로선 미군철수까지 요구하는 상황에서 미군기지 반환운동이라는 것은 자칫하면 개량주의로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안기부의 프락치라는 손가락질을 받아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그가 3년이 넘게 주민들을 만나고 부딪치면서 깨달은 것은 미군에게 몰매를 맞아 죽은 가족들마저도 미군 철수라면 고개를 돌리는 게 현실이었다. 궁극적으로는 미군 철수가 필요하다고 해도 국민들과 함께 가는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한 단계 한 단계 절차를 밟아가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그리고 2001년 현재 그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문제점을 거론하고 있다. ‘미군 철수’는 국제법 위반이니 그 모태가 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얘기하자는 것이다.

미군기지 반환운동 대학강의 나선 김 위원장

그는 지난 9월부터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의 전공인 독문학 강의가 아니다. 강의 제목은 ‘역사 속의 한국과 미국.’ 지금까지 그가 했던 독문학 강의나 문학박사라는 이유로 불려나간 ‘주부대상 글짓기교실’에서 슬쩍슬쩍 흘리던 얘기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행히 강의는 성공적! 성공회대에서 가장 수강 학생이 많은 강의 중의 하나다. 어학 연수다, 유학이다 해서 어느 때보다 더 미국을 접할 기회가 많은 세대들에게 우리 역사 속의 미국이 어떠했는지, 지금 이 땅에 머무는 미군이 과연 누구인지를 가르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그가 진보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지 벌써 12년이 지났다. 그 동안 그는 중학생 딸들의 아빠가 되었고, 전교조 소속인 아내의 해직생활 4년6개월을 힘들게 헤쳐왔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평택에 살고, 아직도 미군반대운동을 하고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한번 바뀐다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강산이 100번은 바뀌었을 법하다. 그 동안 미국을 대하는 우리 정부의 태도는 변했을까.

“변했어요. 5년 전만 해도 우리가 정보 좀 달라고 하면 시민단체에 정보를 흘려서 도움된 적은 한 번도 없다며 끊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시민단체가 움직여줘야 협상에서도 유리하다며 정보를 슬슬 흘려요.”

예상외의 대답이다. 역시 그는 낙관적이다.

김 위원장은 외국에 나가면 자기 이름을 ‘HANDSOME KIM’이라고 쓴다. 외국인들이 ‘김용한’이라는 이름을 잘 발음하지 못해 만든 이름이다. 아닌게아니라 구릿빛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 시원시원한 웃음, ‘얼굴 하나 믿고 산다’는 그의 말이 완전 농담은 아니다. 김용한 소파개정 국민행동 공동 집행위원장, 그는 정말 잘 생긴 사람이다.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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