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0년 06월 2020-06-01   984

[여는글] 물과 바람과 역사는 흘러야 한다

여는글

물과 바람과 역사는 흘러야 한다 

 

삼월에서 유월까지 산하는 신록과 꽃으로 물든다. 진달래와 개나리가 꽃을 피우면 그들을 봄의 전령사라고 칭하며 화사한 계절을 예찬한다. 오월이 되면 산하에 연둣빛 물이 오른다. 신록의 계절이라고 기뻐한다. 싱그럽고 환희로운 생명을 느낀다. 

 

그러나 당장 눈으로 보는 자연은 이렇게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한편 삼월, 사월, 오월, 유월의 역사는 무겁고 슬픈 빛깔로 우리에게 아픔을 안겨준다. 삼월, 3.1절이다. 혹독한 제국주의 침탈의 상처를 생각한다. 사월, 제주 4.3항쟁이다. 오랜 세월 동안 좌익의 반란으로 혹은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고 조심스럽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4.16 세월호참사는 오늘도 생생한 생채기를 남기고 있다. 4.19혁명, 무수한 이 땅의 젊은 피를 민주의 제단에 뿌렸다. 오월은 어떤가? 5.16 군사정변이다. 무력으로 국가권력을 강탈하고 4.19혁명의 민주주의를 군홧발로 짓밟았다. 올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40주년이다. 국가라는 통치기구가 합법의 면피를 두르고 폭압과 살상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어 유월, 6.25 한국전쟁은 무수한 인명 피해와 분단의 상처를 70년째 남기고 있다. 

 

누가 총을 쏘았는가?

누가 생명을 앗아갔는가?

마을 앞 그날의 말채나무

죽은 사람들의 핏자국을 밟고 

다시 5월은 오고 꽃이 핀다

– 문병란 <민주로에서> 중에서 

 

이렇게 현대사를 톺아보면 자연의 꽃과 신록을 마냥 감상하는 데만 머무르기 어렵다. 시인은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왔다 한다. 어쩌면 아름다움에는 슬픔과 아픔이 함께 스며있지는 않는가. 슬픔과 아픔은 쉬이 가시지 않는 현재적 기억이다. 피해 당사자의 슬픔과 아픔 역시 신체에 각인된 채 통절한 현재적 기억으로 살아있다. 당사자에게는 당시의 아픔, 그 자체도 고통이려니와 과거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가운데 각종 음해와 왜곡과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그것들이 다시 2차 가해로 이어지는 현실에서 슬픔과 아픔은 대를 잇는다. 살아 있는 현재에서 대를 잇는 모순과 아픔의 윤회라니! 그래서 봄의 들판에서 맞이하는 기념일마다 그날을 기억해야 하는 아픔이 크다.

 

그러나…역사는 흐름이다. 바람은 불고 물은 흐른다. 인간의 삶이, 역사가 이러하다. 흐르지 않으면 역사가 아니다. 흐름을 억지로 막아놓아 정체되거나 역류하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하여 잘 흐르게 하기 위해서라도 막힌 장애물은 허물어야 한다. 장애물은 바로 왜곡된 과거사이다. 이것을 허물지 않은 채 성급히 화해를 언급하는 일은 또 다른 왜곡이다. 왜냐하면 화해는 진실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진실’과 ‘화해’라는 두 단어를 함께 손잡게 하여 ‘진실과 화해’라는 말을 만들었는지 숙고해야 한다. 

 

오월광주가 40년을 맞았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분단상황이 7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적지 않은 세월이다. 원망과 증오와 적대로 현재를 살아간다면 인간의 삶이 매우 누추하고 어리석을 터다. 과거 행적을 밝히고 고백하여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피해자는 아픔을 지우고 가해자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온갖 구실을 붙여 더 머뭇거리고 미룬다면 인간의 게으름이 크다. 

 

삼월, 사월, 오월, 유월. 아름다운 계절에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어떻게 피어야 아름다운가. 새롭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니지 않는가. 화해와 평화와 공존과 상생의 미래로 역사와 바람과 물은 흘러야 한다.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 없는 얼굴과 얼굴이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 박봉우 <휴전선> 중에서

 


글. 법인 스님 월간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을 지냈으며,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지리산 실상사에서 공부하고 있다.

 

>> [목차] 참여사회 2020년 6월호 (통권 2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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