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7년 05월 2017-05-02   852

[만남] 그녀를 듣다 – 양지은 회원

 

그녀를, 듣다

양지은 회원

 

 

글.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사진. 김경희 미디어홍보팀 간사

 

그녀가 다가온다. 한쪽에 목발을 짚은 탓에 절뚝이며 느리게 걷는다. 그 불안한 걸음을 끝내 지켜보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잠시 딴청을 부리는 사이 그녀가 자리에 앉고, 나는 또 본능적으로 낯선 이에 대한 정보를 추린다. 작은 체구에 강단 있어 보이는 눈빛, 거침없는 목소리와 빠른 말투…. 그러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의 한계는 언제나 명확하다. 

“예전에 장사하던 가게가 홀라당 불 탄 적이 있었어. 그때 외상 잔뜩 달아 놓았던 선배가 찾아와서는 다 탔냐고 물어서 다 탔다고 그랬더니 장부도 탔냐고 묻는 거야. 그래서 그것만 안 탔다고 했더니 이 선배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 ‘네가 타지 그랬냐?’ 하하하, 이걸 위로라고….”
내가 눈으로 결코 잡아채지 못 한 것 중 하나, 그녀의 탁월한 유머감각.

 

월간 참여사회 2017년 5월호(통권 245호)

 

세상을 꾸짖다
우리가 마주 앉은 곳은 참여연대 맞은편의 술집, 호질虎叱. 그녀는 이 가게의 주인장이다. 
“1984년에 고려대 앞에서 처음 카페를 시작했죠. 가게이름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때 마침 친구한테 박지원의 소설집을 선물 받았어요. 어떻게 이렇게 잘 쓰지 하며 놀랬던 게 연암, 황석영, 그리고 조정래예요. 마침 
<호질>의 내용이 당시 시대와 잘 맞았고 고려대의 상징도 호랑이고…. 호랑이가 꾸짖는다, 기가 막히지 않아요?” 

 

처음 카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남편도 없이 혼자 어렵게 키워낸 무남독녀. 어머니는 몸도 성치 않은 자식을 힘들게 대학까지 보낸 터였다. 그런 엄마의 손을 잡고 고대 앞 거리를 헤매며 힘든 설득 끝에 문을 연 가게. 그 꿈이 그토록 간절했던 건 그때가 ‘1984년’이기 때문이다. 

“이게 평생의 직업이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죠. 박정희 후반과 전두환 초기에 20대를 보냈어요. 당시엔 사람들 모두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늘 함께 모여 시국에 대해 고민했어요. 그러려면 돈이 필요한데 엄마한테 만날 돈 타기도 그렇고. 그래서 우리만의 사랑방을 만들자, 그렇게 시작하게 된 거죠.”

 

장사를 시작하며 돈을 벌어 성공하겠단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손님의 반은 외상이었고 그나마 들어온 돈으론 월세 내고 물건 들여놓기에도 벅찼다. 평생의 직업이 되었으나 또한 사는 내내 빚을 지게 만든 ‘호질’. 
“그때는 나도 젊어서 돈 땜에 막 아등바등 거리지 않았죠. 지금은 돈 좀 만들어 놓았다가 필요한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난 또 똑같이 살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히 이재理財에 어두운 장사꾼의 넋두리가 아니다. 30년 동안 계속 빚을 지면서도 한 번도 문을 닫은 적이 없는 ‘호질’. 무언가를 팔아 돈을 만드는 게 장사라면, 그녀가 평생 해 온 이 일에는 다른 이름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호질 재건 프로젝트
‘호질’이 운동권들 사이에서 유명했다길래 자연스럽게 그녀도 운동권이었나보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강하게 부정했다. 그저 자신이 살아냈던 그 시대가 그랬던 거라고, 자신은 그저 그런 사람들 곁에 머물렀던 것뿐, 지팡이를 짚고 무슨 학생운동을 하냐며 손사래를 쳤다.
“당시엔 수배 당한 선후배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런 사람들이 찾아오면 차비 주고 밥 챙겨주고 용돈도 주고 그랬어요. 그들이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몸이 불편해서 같이 밖에 나가서 뛸 수가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거뿐이었으니까.”

갈 곳이 없는 사람들, 쫓기는 사람들이 하룻밤이나마 지친 몸을 뉠 수 있던 곳. 그 소중한 공간에 어느 날 불쑥 재앙이 들이닥쳤다. 
“가게에 불이 나서 홀라당 다 탔어요. 한 순간에 가게를 잃고 집에 앉아 있는데 누가 벨을 눌러서 나가보면 외상값이라면서 쥐어주고 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국수를 잔뜩 사다 주고, 누군가는 연탄 100장을 들여놓고 가고. 나중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아서 다시 가게를 시작할 때는 선후배들이 모두 몰려 와서 수리하는 거며 도배며 함께 도와주고, 그렇게 ‘호질’이 재건되었어요. 기적 같았죠.”

재난과 기적이 함께 하는 감동의 현장. 그러나 이 드라마틱한 인생의 한 페이지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유머감각이다. 
“오랫동안 수배를 당하고 있던 한 선배가 새벽에 찾아왔어요. 불났다는 소식 들었다면서 자기가 100만 원을 해 주겠다며 만 원을 주더니 이제 99만 원만 가져오면 된다고 하더군요. 근데 마지막에 가면서 나한테 뭐라는 줄 알아요? 차비하게 오천 원짜리 두 장만 주라, 이러는 거 있죠.”
한참을 웃고 있는 내게 그녀가 말했다. 이런 사람들 덕분에 그 시절을 지나올 수 있었다고. 재난과 기적, 감동과 웃음이 한데 버무려지고 있었다. 

 

버팀나무 
그녀의 화려한 입담에 취해 있다가 문득 소싯적 그녀는 어떤 삶을 꿈꾸었을까 궁금해졌다. 
“엄마는 제게 다리가 아파서 시집도 못 갈 테니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면서 약대를 가라고 하셨죠. 하지만 전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요. 어찌어찌해서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는데, 적성에 안 맞으니까 열심히 안 했고, 만날 세미나만 하러 다녔어요. 그러던 어느 날 황석영의  『장길산』을 읽게 되었는데 다 읽고 나서 바로 절필 선언을 했죠. 삼류 소설 같은 글을 쓸 바에야 아예 아무것도 쓰지 않겠다, 그렇게 소설가의 꿈을 접었어요.”

소설가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녀의 모든 꿈이 좌절된 것은 아니다. 형제 없이 자라 늘 사람이 그리웠던 그녀는 엄마가 장에 가는 날이면 제발 오빠 좀 사다 달라고 조르곤 했다. 소설가가 되는 것만큼이나 간절했던 또 다른 꿈 하나….
“어른이 되면 스무 명이 함께 한 집에서 살아야지 했어요. 밤이 되면 잠 오는 사람만 자고 나머지는 날이 새도록 함께 놀고, 그렇게 재밌게 살고 싶었는데 어찌 보면 가게를 시작하며 그 꿈을 이룬 거죠. 수많은 사람들과 밤늦게까지 이야기하고 놀 수 있었으니까.”

어린 그녀가 많이 갖고 싶었던 건 돈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 꿈은 ‘호질’을 통해서 그리고 그녀의 삶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가 인생의 여울에 휩쓸려 쓰러지려 할 때마다 바닥부터 그녀를 받쳐 세웠다.
“서른 즈음에 부산에 갔어요. 사실 그때 죽으려고 간 건데, 친구들이 내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봐 몰래 따라 왔더라구요. 내일 죽으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고기 사주고, 나이트클럽에 데려가고. 그때 아는 선배가 저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너 그거 아니? 네가 얼마나 멋진 인간인지. 그 말 한마디를 듣고 다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인생의 쓰라림과 그 상처를 조용히 감싸 안아 주던 사람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녀의 이야기가 감동만으로 마무리될 리가 없다는 걸.

“그 친구들 하고 며칠 놀다 보니 돈이 다 떨어졌어요. 그때 한 선배가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가라고 일러준 사람이 생각나더군요. 그 사람을 찾아가서 3만 원만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죠. 근데 이분이 시국도 그렇고 내가 지팡이를 짚고 있으니까 저한테 무슨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줄로 오해를 한 거예요. 계속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묻는데, 너무 창피해서 차마 놀다가 돈 떨어졌단 말은 못 하겠고. 근데 그때 그분이 누군지 알아요?”

그녀가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찾아갔던 사람, 그가 바로 기호 1번 문재인이다. 그녀는 그때 자신이 어려서 그런 거라고 강변했다. 난 나이 서른에 자식까지 있는 사람이 어떻게 어린 거냐고 되물었고 그녀는 다시,  자기 나이가 돼 보면 서른 살이 얼마나 어린 건지 알게 될 거라고 주장했다. 아,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의 반도 못 썼는데, 지면이 끝나 가고 있다. 

 

월간 참여사회 2017년 5월호(통권 245호)

모노드라마 
그녀는 형제 없이 혼자 컸다.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친구들과 뛰어놀 수도 없었다. 그래서 늘 외로웠다. 심심할 때면 혼자 책을 봤고 거울 속의 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도 내가 다리가 안 아팠으면 뭘 했을까 가끔 생각하는데, 연극배우 했을 것 같아요. 오십이 되기 전까지 책 하나 쓰는 것, 그리고 연극 무대에 한번 서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내 머릿속 무대에 그녀를 세운다. 지면 부족으로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객석에 울려 퍼진다.
“스물넷에 아들을 낳았어. 실감이 나지 않았지. 남편은 애 낳기 보름 전에 군대에 가버렸고. 내가 다리가 이래서 애를 업어주지도 못하니 울 엄마가 다 키웠지. 애가 네 살 먹었을 무렵 남편이 돌아왔고 그 후 한 1년 반쯤 살았나? 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너무 사랑한다기에 보냈어 … 촛불집회? 일단 이런 일이 아직도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게 너무 절망스러웠어. 내가 알던 많은 이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다가 군대에 끌려가고 고문당하고 의문사 당하고 그랬는데, 그럼 뭔가 바뀌었어야 하는 거잖아 … 18년 동안 대학로에서 장사를 했어. 난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지. 근데 알고 보니까 난 그냥 고여 있었던 거야 … 참여연대 젊은 간사들을 보면 딱하지. 얘들이 자기이익만 챙기려 들면 하다못해 알바를 해도 그보다 더 많이 벌 텐데. 고맙고 되게 미안해 … 젊었을 땐 앞치마에 지팡이 짚고 가게 안을 왔다 갔다 하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어. 근데 요즘엔 이런 내가 구차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손님들이 불편해 하지 않을까, 그래서 요즘엔 주방에서 안 나와 … 저번에 장애인단체에서 하는 한 행사에 갔었는데 뇌성마비를 앓는 한 남자가 다가오는 거야. 순간 나도 모르게 눈길을 피하게 되더라고. 무서워서 도망을 쳤지. 돌아오면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 나는 장애인이 아닌 줄 알고 살고 있구나, 멀쩡한 사람들 틈에서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고 있구나….”

그녀의 긴 대사를 들으며 나는 또 다른 여자의 말을 떠올렸다. 

 

듣는다는 것은 거꾸로 그 길을 되돌아서 그 소리를 만나는 것이다. 당신의 언어로 그것을 번역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그것이 당신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 소리를 껴안고 그것과 섞이는 일, 듣는다는 것은 곧 타인의 삶을 여행지 삼아 그곳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 레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중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난 여러 번 생각을 멈추었다. 그렇게 한동안 멈춰 서서 그녀가 결코 말하지 않는 것들을 듣기 위해 생각을 집중했다. 가장 환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눈물 젖은 베개를 가지고 있다는 시를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녀의 이야기가 나의 일부가 되도록 이 글을 마무리하는 방법은 결국 그녀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근데 나만 그런 게 아니야. 우리 아이들도, 주변 사람들도 자꾸 내가 다리가 아프다는 걸 잊어먹어. 한번은 사람들이 나보고 등산을 가자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럼 난? 밑에서 니들 가방 지키고 있어?”
난 늘 그랬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그녀와 함께 오래 웃었다. 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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