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06월 2006-06-01   1314

생명사상의 ‘대부’ 무위당을 기리는 사람들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현주 목사),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은 사람’(유홍준 문화재청장),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분의 선생님’(판화가 이철수) 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심지어 시인 김지하는 스승으로,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이슬’의 김민기는 아버지로 여긴다. 그가 바로 무위당 장일순이다.

무위당 장일순은 누구인가

1928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장일순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여운 장경호 밑에서 한학을 익히고 생명공경의 자세를 배웠다. 원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간 장일순은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재학 중 미군 대령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이른바 국대안)에 대한 반대 투쟁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되었다. 다시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군복무 후 원주에 돌아와 이후 원주에서 생활했다.

1954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원의 맥을 계승하는 뜻으로 원주에 대성학원을 설립하고 이후 5년간 이 학교의 이사장으로 일하며 학생들을 키웠다. 5·16 군사 반란이 일어나자 중립화 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법정에 끌려간 그는 7년형을 언도 받고 3년 간 옥고를 치른 후 다시 대성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65년 대성고등학교 학생들이 고등학생으로서는 전국 최초로 한일굴욕외교 반대 시위를 벌이자 이사장직을 박탈당했다. 또한 정치정화법과 사회안전법에 묶이면서 경찰이 그의 집 앞에 파출소를 세워 철저한 감시를 했다. 그는 이 때 농사와 서화에 매진하였다. 그래서 무위당 선생은 자신의 서화가 박정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원주가 오늘날 30만 시민의 10%에 이르는 3만 조합원이 참여하는 협동조합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무위당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1960년대부터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의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그는 신용협동조합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1970년대에 원주가 민주화 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떠올랐던 것도 숨은 지도자 무위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980년대 한살림 선언으로 알 수 있듯이 그는 21세기 우리의 지향점을 생명사상이라 내다보고 그 주춧돌을 놓았다. 이러한 발자취 때문에 무위당 장일순은 생명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무위당 선생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

무위당 선생이 떠난 지 12년이 지났지만 그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선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누고 그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그들은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무위당의 생명사상은 아주 사소한 생활 속에서부터 함께 일하고 더불어 나누며 서로를 모시는 일이다. 김상철 부회장은 “생명사상은 상처와 죽임의 사상을 극복하여 사람들을 섬기고 상대편을 받드는 삶을 사는 것” 이라고 말한다.

무위당 선생이 1970년대 초반에 결성된 민통련과 정의구현사제단의 숨은 주역이었지만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던 것처럼 이름 내세우는 일을 좋아하지 않은데다 “내 이름으로 되도록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생전의 마지막 당부를 지키기 위해 그를 따르는 이들은 어떤 추모행사도 갖지 않았다. 그러다가 선생을 그리워하는 마음만이라도 나누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활동이 없었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을 원치 않으셨어요. 이후 몇몇 사람들이 ‘잡놈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했는데 빈부귀천이나 상하를 따지지 않고 선생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참여한다는 뜻으로 ‘잡놈회’로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2001년 무위당의 7주기를 맞아 무위당의 사상이 잊혀지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한 제자들이 무위당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그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모임을 발전시켰다. 그 해 5월 22일 7주기 추모행사 및 포럼을 연 것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제자들과 무위당을 흠모하는 이들이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이 때부터 소식지를 발간하고 회원을 늘려 현재까지 소식지가 15회에 이르고 회원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생명 평화 밑거름 된 좁쌀 한 알

모임은 장일순 선생의 생명과 평화사상을 정리하고 확산시키는 일을 역점사업으로 하고 있다. 소식지에 실린 글과 무위당 선생의 미공개 자료를 모은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와 무위당 선생 지인이나 제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선생의 진면목을 되살려낸 ‘좁쌀 한 알’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좁쌀 한 알’은 원주 제 1회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 서적으로 선정되어 원주시민들에게 알려졌고 전국적으로도 생명사상을 널리 알려내었다.

모임은 올해도 12주기 추모 행사로 묘소 참배와 ‘생명과 평화의 밤’을 통해 장일순의 삶의 세계를 나누고 생명운동의 사례를 돌아본다. 치악미술관에서는 무위당 유작전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음을’이 6월 7일까지 열린다.

장일순은 ‘산도 없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를 기리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살아서 자신을 한 번도 중심에 놓고자 하지 않았던 ‘숨은 지도자’였기에 그가 없는 지금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다.

장정욱 참여연대 시민참여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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