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11월 2009-11-01   1140

참여사회가 눈여겨본 일_쓴소리 방송인의 수난


 

강요된 침묵을 깨고, 볼륨을 높여라


김용민  한양대 겸임교수, 전 시사자키 주말 앵커

개그맨 김구라 씨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좌파제동’ 김제동 씨의 퇴출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여지없이 현실화 된 것이다. 숨은 일화지만 김구라 씨는 나의 미래에 대해서도 예언했다. 이 역시 사과를 꿰뚫은 윌리엄 텔의 활처럼 ‘불스 아이’를 적중했다.


방송 1시간 앞두고 “안나오셔도 된다” 통보


때는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당선으로부터 취임까지인 2007년 말부터 2008년 초. KBS의 라디오 저녁 프로그램 고정 출연자였던 나와 관련해, 청취자들은 MC 김구라 씨로부터 이런 멘트를 들을 수 있었다.

“김용민 씨가 대선 끝나고 사석에서 이랬습니다. ‘형님, 저 이제 끝났어요’라고요.”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시사평론가 김용민 씨 나오셨습니다. (당신,) 왜 이렇게 시대에 역행해? 새 시대에 동참해야지!”

“오늘 김용민 씨가 양복을 입고 왔네요. 한나라당에 가서 구명 활동을 벌이고 오셨나 봐요.”

물론 나는 ‘이명박 이후’에 대한 고민을 김구라 씨에게 토로하거나 한나라당에 가서 구명 활동을 벌인 일이 없다. 김구라 씨의 ‘구라’인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반 년 뒤에 있었던 가을철 개편(2008년 11월)에서 나는, 출연했던 4개 프로그램에서 모두 하차하게 됐다. 방송을 못해서 잘린 것 같지는 않다. 왜냐. 개편 이후에도 고정출연해 줄 것을 제안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수락했다. 그러나 이 ‘출연계약’은 방송 1시간을 앞두고 부도났다. 원고 전송까지 다 끝낸 상황에서 “안 나오셔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제동 씨는 그래도 양반 대접 받은 편이다. 그래도 거긴 3일 전 통보 아닌가. 나는 1개월, 1주일, 1일 전도 아닌 방송 1시간 전이었다.)

그렇다. 김구라표 농담은 하나도 빠짐없이 현실화됐다. 요컨대, ‘구라가 진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김구라 씨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렇게 잘나가는 방송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단 한 개의 KBS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없는 신세가 되긴 김구라 씨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김구라 씨는 이병순 사장 취임 이전 MBC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 이명박 정부를 강도 높게 비꼰 이력이 있었다. 그 일로 책잡혔다는 후문을 나는 KBS 안팎에서 들을 수 있었다.


모처로부터의 전화 한 통

이런 경험, 솔직히 처음이다. 방송 출연만으로 밥 먹고 살다시피 하는 나는 참여정부 시절, KBS나 SBS 등에 나가 한미FTA 추진과 대연정 및 개헌 제안 등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했다. 아울러 실상 기득권 투쟁이 본질인 ‘노선 경쟁’으로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당시 여권의 움직임에 일격을 가하며, “잘못했으면 심판받아야 한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했다. 그러나 이런 말하면서도 잘릴 걱정은 전혀 안 했다. 나의 진퇴와 권력은 거의 무관했기 때문이다. 다만 눈치를 볼 대상이 있었다면 PD와, 이 PD의 상사급인 실무데스크 정도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됐다. 진퇴에 관한한 PD도 데스크도 누구도 장담 못하게 된 것이다. 모처로부터의 ‘전화 한 통’이 이 실권의 전부를 가져가 버렸다는 얘기만 나올 뿐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말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KBS에 전화를 걸어 “정관용, 윤도현, 김제동, 손석희를 자르라”고 했겠냐고. 일리 있다. 아무리 깐 마늘(MB물가지수의 한 종목) 가격에까지 관심을 두시는, 아니 관심만 두시는, 그런 섬세한 대통령이라도, 방송사 캐스팅 문제까지 관여할 만큼 한가하겠나.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TV와 라디오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기호에 반하지 않는 방송인들로만 채워지고 있다. MB를 위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손’은 MB 앞에서는 ‘비벼대는 손’이 된다. “각하, 제가 이 정도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서일까. 물론 그 ‘비벼댐’은, ‘MB’가 아닌, ‘MB의 힘’을 경외敬畏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모든 권력이 MB로부터 나오니까. <조선일보> 박은주 부장 말대로 방송인 한 명 바뀔 때마다 대통령이 혐의를 받는 나라는 꼴이 좀 우습긴 하다. 혹시 MB는 직시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에게 저열하게 충성하려는 자들, 확고하게 뿌리치지 않으면 본인 스스로가 저열한 충성을 즐기는 존재로 인식된다는 점을 말이다. 게다가 자신의 힘이 소멸되는 날, 그동안 누려왔던 것만큼 ‘되갚음 당할’ 가능성이 있음을 말이다.


기껏 키워놓고 돈 많이 든다며 나가라?

최근 <한겨레>가 보도한 미국 보수언론의 도 넘는 ‘오바마 때리기’를 보면, 이 사람들과 같은 대기권 안에 있는가 싶을 정도이다. 보수언론 종사자들은,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이 사내this guy”라고 하더니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말하는가 하면, “(오바마를 상대로) 함께 맞서야 한다.”며 시위에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정책이 실패하길 바란다.”고도 발언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의 ‘조중동’과 흡사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시절의 ‘조중동’과 너무나 대조된다.

물론 방송사들, ‘권력 차원의 압력’은 없었다고 항변 한다. 경제위기 시대를 맞아 고액 출연자를 내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방패삼아 말이다. 이게 만약 진실의 100%라면, 이런 경영진은 자진 사퇴해야 마땅하다. 회사에 대한 도리로써 말이다. 방송은 제조업이 아니다. 누가 하더라도 그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단순노무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인적자원을 활용해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사람 장사’이다. 하면 할수록 깊이가 있고 숙성되며 고양되는 게 방송인이다. 진행 및 출연자에 대한 신뢰도, 또 그들이 발산하는 영향력. 이게 하루아침에 생성될 것들인가. 그런데 기껏 키워 놓고는 ‘돈 많이 든다.’며 나가라고 눈짓 손짓한다. 인적자원의 가치를 분별 못하는 이들이, 고등교육 수료자들로 천지인 방송사에서 간부로 발탁돼, 힘을 발휘하는 현실, 한 편의 아이러니이며 코미디이다.

물론 ‘돈’을 구실 삼는 것이 매우 궁색하다는 점을 아는 일부 방송사 간부진도 개중에 있다. 이들은 “프로그램의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제기한다. 차라리 이게 당당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도 빈틈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혹세무민’하는 기계적 형평성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뉴라이트 계열 이사들이 모이는 족족, 문화방송의 보도,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문제 삼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MBC의 저널리즘에 ‘공정성’이 배제돼 있다”는 것이다. 상식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이명박 대통령 진영에서 그의 이익에 충실하게 논리를 만들어왔던 사람들이 하는 ‘공정성’ 타령에 굳이 무게감을 두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파적 이해 논리가 근자에 MBC를 뒤흔들고 있다. 외면할 수만은 없다. 현실적 위협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는 ‘공정성’의 개념을 따져보자.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이 정계에 입문하기 전에 쓴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를 보면, 서문에 한 누리꾼의 말을 인용한 것이 있다. “공정하게 편파적인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이며, 편파적으로 공정한 것이 가장 편파적인 것이다.”일전에 <딴지일보> 총수인 김어준 씨는 “나는 편파적이다. 그러나 편파적이기까지 그 과정은 공정했다”라고 말했다.

역설의 미학인지, 언어의 유희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 어쨌든 나의 결론은 이렇다. “공정한 것도, 편파적인 것도 그 순간에는 분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가 훗날 공정성과 편파성을 가를 것이란 이야기다. 그러면 당장 공정성을 기반을 두어 기사를 작성해야 할 언론인은 어떤 규준에 따라 쓰고 말해야 할까. 뻔한 답에 길이 있다. “본질을 간파한 상황에서, 양심에 입각해 상식과 원칙의 원리에 충실하게 접근하라”라는.

쉽게 이야기한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만약 오늘날 재현된다고 가정하자. 이때 언론이, 진압군입장 반, 시민군입장 반 이렇게 반반씩 다루면 될까? 4대강 사업을 두고, 추진하려는 정부입장 반, 반대하는 야당 시민단체입장 반 이러면 될까? 둘 다 아니 되는 바이다.

본질이 빠졌기 때문이다. 전자(5·18)에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향해 총구를 겨눈 진압군의 횡포’가 고려되지 않고 있다. 후자(4대강)에서는 ‘국민의 삶의 자리를 황폐화할지 모를 환경파괴의 우려’가 빠져있다. 본질을 배제한 기계적 형평성, 국민으로 하여금 사안의 핵심을 읽지 못하게 만든다. ‘혹세무민’의 전형일 뿐이다. 본질을 간파한 상황에서 양심에 입각해 원칙과 상식에 따라 쓰고 말해야 한다. 이게 바로 ‘공정성’의 원리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첩경이다.

덧붙여 이 과정에서 배제해야 할 것도 짚어 보련다. ‘고려考慮’이다. 언론인에게 고려대상은 ‘보도의 정확성’, ‘약자에 대한 배려’ 정도여야 옳다. ‘(자사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권력’, ‘(자사의 경제력을 뒷받침할) 자본’까지 눈치 본다면 이는 언론이 아니다. 영리 사업체일 뿐이며, 소속 언론인들은 종업원에 불과할 것이다. 종업원으로서의 언론인은 소수 족벌언론 소속 기자들을 통해 충분히 봐 왔다. 그 수가 모자라 더 보고 싶어 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3년후 두고 보자? 언론 조종 울릴수도


2009년 대한민국 방송가는 두려움에 절어있다. 과잉된 공포라고 보지 않는다. 이명박에게 개갰다가 전 방위적인 탄압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 잘 안다. 특히 광고를 안 주면, 본인은 물론 방송사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는 점 또한 잘 안다. 속으로 ‘3년 후 두고 보자’라며 와신상담하는 분위기도 잘 안다. 지역방송사 기자인, 나의 마이크로 블로그 이웃은 “지금 한국의 방송은 국민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무너지고 있다”고 탄식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2013년 2월에 ‘언론 자유’를 존중하는 수준 있는 지도자가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도록 기도하면 되는 것일까. 그때까지 적당히 버티며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아니다. 권력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방송을 통할統轄할 수 있었다. 정권 초기 성과를 내려는 권력은 필연적으로 방송이라는 이기利器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끝이 아니다. 임기 중후반기부터는 남은 임기를 레임덕 없이 운용하기 위해 방송장악 음모를 표면화한다. 예전에 이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앞으로 그러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말한다. 우리 방송인들, 구조적 한계를 바로 봐야 한다고. 선거전 승리의 거대 전리품인 방송을 포기할 성자聖者 같은 권력자는 없다는 점 또한 직시해야 한다고.

결국 이야기는 이렇게 귀결된다. 방송의 독립성을 놓고 ‘누군가 나서서 항구적으로 보장해주겠지’하며 기다리지 말고, 당사자 스스로 항구적으로 투쟁해 얻어내라고 말이다. 이것이 가장 빠른 또 바른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명박 정부라는 괴물 같은 집권세력 앞에서 우리 언론은 저항은커녕,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마저 상실해가고 있다. 이 침묵이, 이 무력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 언론에는 새벽종보다 조종弔鐘이 먼저 울릴 수 있다. 최근 국민은 직시했다. 우리 방송의 독립성이 얼마나 취약한지, 우리 방송인들이 권력과 자본의 횡포 앞에 얼마나 속절없이 무너지는지를 말이다. 지금 일어서지 않으면 십 수 년 동안 쌓아온 방송에 대한 높은 공신력과 기대감은 곧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



그른 것을 그르다라고 말할 용기


CBS라디오 ‘시사자키’의 마지막 클로징 멘트로 글을 갈음한다. 나는 ‘시사자키’에서 왜 하차해야 하는지 합리적인 이유를 듣지 못했다. 게다가 해임된 사실을 게시판에 붙은 공고문을 통해 알았다. 담당 부장은 ‘따로 통보할 필요를 못 느끼는데다 굳이 설명을 안 해도 본인이 잘 알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불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리고 훗날 언론자유의 가치를 곧추 세울 그날에 CBS의 깨어있는 구성원들도 함께 하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발언을 전파에 실었다(전부는 아니고 일부만 나갔음을 밝힌다).

“내일부터 CBS라디오가 가을 개편을 단행합니다. 기획안을 보니까 시사 프로그램의 개편 방향으로 ‘공정성 그리고 균형감 확대’를 들던데요. 확대해야 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비판 기능’입니다. ‘비판 기능’이 빠진 ‘공정성 그리고 균형감’은 자칫, 그동안 언론으로부터 줄곧 감시의 대상이었던 권력과 자본에 대한 견제 기능을 스스로 약화시킨다는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우리 언론의 비판 기능이 후퇴하고 있다는 지적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언론인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분간하는 안목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옳은 것을 옳다’, ‘그른 것을 그르다’라고 이야기할 용기가 줄어드는 것일 뿐이지요.

시대가 아무리 광폭해도 CBS는 기개 있고 용기 있는, 예언자의 사명을 담당해주길 빕니다. 그 기대를 이곳에 놓고, 저는 마이크 앞을 떠납니다. 그동안 애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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