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11월 2009-11-01   1095

최성각의 독서잡설_성장이 분배를 대체할 수 있을까



성장이 분배를 대체할 수 있을까


최성각 작가, 풀꽃평화연구소장

쓰지 신이지 『행복의 경제학』, 장석진 옮김 | 서해문집, 2009.


쓰지 신이치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슬로 라이프’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라 한다. 책을 펼쳤더니 여행기로써 유명해진, 김남희라는 이가 추천사를 썼다. 김남희 씨는 저자와 함께 2008년 가을에 피스앤그린보트를 같이 탄 모양이다. 피스앤그린보트는 한국의 환경재단과 일본의 피스보트가 ‘아시아의 환경과 평화를 위해 함께 띄운 배’라고 한다. ‘국경과 언어, 연령과 성별의 경계를 넘어 연대와 희망을 모색하는’ 그런 배가 떴다는 이야기를 그 즈음에 보도를 통해 대충 보고 지나쳤던 기억이 났다. 무슨 돈으로 배를 띄웠을까? 그런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그 생각을 오래 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추천사를 쓴 이는 저자와 같이 실현되기 쉽지 않은 대의를 내세운 보트도 함께 탄 적이 있고, 나중에는 히말라야 부탄 여행도 같이 한 모양이다.

8일간의 선상 프로그램은 ‘행복’에 관한 간담회부터 시작했다고 하는데, 추천사를 쓴 이는 그 선상 간담회에서 “‘덜 갖되 더 충실한 삶’을 배워가며 새롭게 행복을 찾은 나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고 썼다. 그때 쓰지 신이치가 부탄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그리고 몇 달 후, 저자와 추천사를 쓴 이가 함께 부탄에 갈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부탄에서 20일을 머물렀다고 했다. 부탄에서 20일씩이나? 이 대목에서부터 나는 이 책을 손에 잡고 계속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행복과 풍요의 불일치

책의 내용은 “물질적 풍요가 진정한 행복과 사실인즉, 관계가 없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일본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할 것 없이 기를 쓰고 매달리고 있는 풍요로워져야 행복해진다는 철석같은 믿음은 정작 사람이나 사회나 지구환경을 위기와 불행에 빠지게 했을 뿐, 그 믿음이 결코 성사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책의 후반부에 갈수록 저자는 풍요와 행복의 불일치에 대한 확신이 깊어져 그 주장의 강도가 단단해지고 있었다.

행복(감)은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와 함께, “이 책만 읽으면 누구나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는 곤란하다, 그런 의도에서 이 책을 쓴 게 아니라 풍요에 대해 질문하기 위해 썼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책 한 권으로 행복에 이르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산업사회에 먼저 진입한, 이른바 선진국 사람들이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는 누리고 있지만 기실 그 풍요로 인해 행복해진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여러 사례와 함께 전개되었다.

특히 저자는 영국 레스터 대학에서 2006년에 세계 각국 8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행복도 조사’를 예로 들고 있다. 세상에는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그런 해괴한 조사를 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조사는 그저 조사일 뿐이므로 다만 참고하면 그만이다.

한국은 세계 178개국 가운데 103위, 일본은 90위, 미국은 23위였다. 1위는 덴마크, 2위는 스위스, 3위는 오스트리아, 이어서 핀란드, 스웨덴 등 사회민주주의 체제의 북구쪽이 상위 랭킹이었다. 재미있는 현상은 8위를 차지한 히말라야의 빈국, 부탄이었다.

풍요로운 나라의 행복도 지수가 높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는 끔찍한 성장의 대가를 나열하면서 바로 풍요롭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닐까? 묻고 있다. 무한성장의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여러 조건들을 희생시켜 얻은 풍요는 인간을 행복하게하기는커녕 만악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빈곤이 단순히 돈이 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면, 풍요 역시 단순히 돈이 있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83쪽)라며, “저축이 없는 궁핍한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돈은 가지고 있지만 저축이 없는 부자들 또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고 역설한다. 이때 저자가 말하는 ‘저축’은 무엇일까? 단순한 은행잔고가 아니다. 그것은 “무슨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족, 친척, 우인, 지인 들과 가까운 지역이나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고 나아가서는 자연계와 교감하는 시간을 갖는 등 살아가는 기술까지를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을 의미한다. 이 사회안전망의 내용이 바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기본조건이라는 이야기다.

그 기본조건을 무시하지 않는 경제를 저자는 ‘행복의 경제학’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뺄셈의 경제학’이라 해도 된다. 사실 이것은 결코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갑자기 돌출한 사상은 아닌 셈이다.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바치는 준거로 인용하는 여러 인물들을 살펴봐도 그렇다. 더글러스 러미스나 사티쉬 쿠마리나 헬레나 노지베리 호지 들이 그들이다. 공교롭게 이 분들이 내한했을 때 짧게 뵐 기회들이 있었다. 러미스는 정치학자답게 날카로웠고, 사티쉬 쿠마리는 온화했지만 강건한 신념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고, 헬레나는 진지했지만 ‘서양여성’이었다. 앞의 두 사람은 자신들이 성취한 세속적 성공에 둔감한 부류의 사람들이었고, 헬레나는 그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이런 인상비평은 중요하지도 않고, 틀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생각이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2002년)라는 책제목이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명저를 통해 ‘자기파멸적 거짓 풍요’에 대해 일찍이 비판했고, 사티쉬 꾸마리는 잃어버린 3S, 즉 땅(Soil), 영혼(Soul), 사회(Society)의 회복을 통해서만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Soil, 즉 지구와 이어지는 것, Soul, 즉 자기 자신과 이어지는 것, Society. 즉 사람들과 이어지는 것이다. 헬레나는 강연장에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좋아하는 일, 친구(사랑), 자연과의 끝없는 접촉’이라고 요약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에 인용된 헬레나는 “세계화로부터 로컬화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194쪽)는 말로 ‘풍요가 아닌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20세기 행복 경제학의 선조이기도 한 슈마허는 진정한 경제학이란 “보다 작은 소비로 보다 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며, 버마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불교 경제학’을 제창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듣는 ‘모심과 섬김의 경제학’이 그것이다. 문제는 갈 길이 없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그 길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실히 드러난 ‘파이 이론’의 실체

이런 부류의 책에서 늘 만나는 고통스럽고 우울한 통계결과가 또 소개되고 있다.

‘세계 인구의 1%가 전체 부의 40%를, 2%가 전체 부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으며, 전 세계 인구 중 빈곤층의 절반은 전 세계 총생산의 1%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2006년 기준, UN대학).는 통계가. 이런 문맥으로 소개되는 통계는 그 내용의 이해를 위해 차갑고 냉소적인 머리보다는 상상력과 온기가 있는 가슴이 필요한데, 바로 그 가슴 때문에 이런 류의 통계를 접할 때마다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책을 덮고 나자 마침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맥의 통계가 발표되었다. 지난 10월 2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한국노동연구원의 ‘노동패널’ 조사(표본 5000가구 정도)를 분석해 결과를 공개한 자료가 그것이다. 그 내용은 지난 2007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부자 5%가 전체 부동산 자산의 64.8%를, 전체 금융자산은 절반 넘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특히 상위 10%의 경우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빼고, 부동산과 금융자산 등을 합한 전체 자산총액의 74.8%를 차지해, 자산 소유의 양극화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공할 만한 양극화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이른바 선진국들 일반의 추세다. 성장을 분배의 전제조건이라 주장한 이들이 내세운 파이 이론, 혹은 가증스러운 적하 이론이 허구라는 것을 이 통계가 여실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지금도 그런 거대한 거짓말이 공공연하게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이미 충분히 궁핍하거나 가난한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자산74.8%를 지니고 있는 상위 10%’에 해당되는 이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그러나 어이없고 비극적인 일은 74.8%에 속하는 이들은 ‘성장(풍요)의 경제학’을 경전처럼 탐독하지 “풍요가 행복의 불가결한 조건이 아니다”라는 이런 류의 ‘행복의 경제학’을 결코 접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제대로 읽은 이라면 “나는 가난하지만 행복해”라고 자위하거나 “당신도 비록 가난하지만 지족(知足)하고 자족(自足)하고, 이미 지닌 여러 행복의 조건들을 마음껏 누리세요”라고 권유하기보다는 75.8%에게 편중되어 있는 부를 고루 나누는 일에 젖 먹은 힘까지 다 동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에 대한 열망의 이름이든, 빈민운동의 이름이든, 인권운동의 이름이든, 환경운동의 이름이든, 분배에 대한 도덕적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 태도가 이곳에 태어나 자란 제대로 된 인간의 의무일 것이다. 존경할 만한 대단한 사상가들의 깊이 있는 사상에 십분 백분 공감하면서도 이정희 의원이 제시한 자료를 보면서 드는 확고한 독후감이 내 경우에는 그렇다. 풍요가 ‘행복해지기’의 한 부분일 수는 있어도 전부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가난이 너무 쉽게 미화되거나 권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한해에 3,800만 명이 굻어죽고 8억명이 기아에 허덕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가난은 행복은커녕 가장 본래적인 인간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부탄왕국의 자폐적인 두려움과 실리

책에 부탄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부탄의 전 국왕은 70년대에 각국 수뇌들을 초대해 한 나라의 부의 지표로서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GNP(국민총생산)나 GDP(국내총생산)가 아니라 GNH(국민총행복)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즉, Prodct(상품)의 ‘P’ 대신 Happiness(행복)의 ‘H’를 강조한 것이다. ‘젊은 임금님의 개그’라 하면서도 저자는 부탄 왕의 제안에 깊은 공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개그가 아닌 것이 부탄은 2008년 공포된 최초의 헌법에 GNH를 실제 국가통치의 중심개념으로 삼겠다고 선언한 모양이다.

책에 그려진 부탄은 생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경제성장과 관계없이 거기 사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아주 높은, 지상의 천국같이 묘사되어 있다. 전통문화가 잘 보전되어 있고, 불편해 보이지만 매사에 몸을 움직여 일을 하고, 늘 웃고, 돈의 과다로 인해 행복과 불행이 좌지우지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그것들이다. 그들은 정말 그렇게 보이고, 실제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와 달리 나에게는 매우 고약한 나라라는 인상이 깊이 박혀 있는 부탄은 어떤 나라인가. 부탄은 인도 동부와 방글라데시 사이의 히말라야 산군(山群)에 위치한 작은 왕국이다. 2008년 이전에는 입헌군주국이 아니었으므로 헌법이 없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는 인도의 압도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다. 히말라야를 자주 돌아다닌 나도 여러 이유들로 그 왕국에는 아직 가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안 갈 것이다. 그 까닭은 그곳에 이르는 진입장벽이 너무나 높기 때문이다. 입국을 하자면 부탄이 지정한 인도의 특정여행사를 통해 누구나 예외 없이 하루 200달러의 돈을 선금으로 내야 한다. 그 액수를 지정 호텔비로 부르든 우리나라 대학에 취직할 때 내는 돈에 빗대어 ‘부탄발전기금’이라 부르든, 나는 그 돈을 ‘부탄국립공원 입장료’라고 이해한다. 저자 쓰지 신이치는 부탄 국왕이 발명한 GNH라는 말에 빠져 부탄에 세 차례 갔다고 한다. 평화의 배를 같이 탄 인연으로 추천사를 쓴 김남희씨와 같이 갔을 때에는 20여 일을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20일이면 인당 4천 달러를 부탄에 냈다는 이야기다. 4천 달러(약 500만원)면 인도나 히말라야에서 어느 정도의 돈일까? 우리나라에서도 500만 원이면 큰돈이지만, 인도나 네팔 등 히말라야에서는 실로 어마어마한 거금이다.

이해를 위해, 100달러를 인도의 화폐단위인 루삐로 바꾸면 4,800루삐(2009년 10월 현재)이다. 인도 서민들의 식사 한 끼는 20루삐부터 40-45루삐 정도 된다. 배낭을 메고 인도나 네팔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100달러는 참으로 큰 돈이다. 1992년부터 히말라야를 찾곤 했던 내 경우만 해도 1박에 300루삐 이상의 여관에서 잔 적이 없었다.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수백만의 배낭족들이 모두 200루삐에서 300루삐 정도 여관에서 1박을 하고,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밥값으로 50루삐에서 100루삐 정도, 많아도 200루삐를 넘지 않는다. 부탄의 하루 최소한의 강제된 기본 체류비가 200달러이므로 20일을 부탄에 머물렀다면 19만 2천 루삐인데, 산수능력과 약간의 상상력만 있다면, 그 돈이 얼마나 거금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부탄은 배낭족들은 ‘서양식 낭비문화’를 대표한다고 간주하고, 그런 반문화가 부탄이 지키려는 ‘전통적인 문화’와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금의 입장료를 방패로 출입금지를 시키고 있다. 세상에, 하루 200달러를 낼 능력이 없을 뿐이지 배낭족들이 반문화의 떼거리라니? 물론 청바지 차림의 그들에 의해 코카콜라와 람보, MP3나 페트병, 노트북으로 상징되는 서방문화들이 무차별 유입되어 선망과 폐해를 끼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러 여관의 담요도 훔쳐가는 못된 인종들도 있지만, 배낭족들에 의해 그들 여행지의 현지인들이 당하고 있는 가혹한 인권유린이나 차별과 불평등, 힘센 자들에 의한 폭력의 실태들이 외부에 폭로되고, 그 폭로로 인해 개선의 여지를 찾는 일도 많다. 이른바, 현지인들과의 진정한 우의와 연대는 부탄왕국 입장권이 가능한 계층보다는 제멋대로의 인종들로 보이는 배낭족들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의학도는 험한 산중을 돌아다니며 의료활동을 펼치고, 산중의 작은 학교를 위해 학용품 지원이나 그들과 같이 뒹굴며 가능한 노력봉사를 하기도 한다. 홍수가 나면 현지인들과 같이 밧줄을 두르고 도강을 한다. 달리 말해서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외부와의 메신저 구실을 하는 배낭족들의 순기능도 크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부탄 정부는 “니네들은 돈 없지?”, 하고는 배낭족들을 원천봉쇄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부탄에서 20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태적 마인드를 되새김질하면서 잘 지낼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히말라야의 소왕국에서 기본경비 4천달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거칠게 잘라 말하기 어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이 세상을 가난한 배낭족들보다 좀 더 망친 사람들이기 쉽다. 본의든 아니든 탄소배출에 좀 더 기여함(?)으로써 지구온난화에 박차를 가한 사람들이거나 그런 체제의 승자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왕국 바깥의 산업사회에서 그들은 그 중 여유 있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없다. 여유 있는 부탄 입국자들은 악인이고, 그렇다고 돈이 없어 왕국에 진입하지 못하는 배낭족들은 무조건 선한 사람들이라는 어린애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부탄 왕국의 자폐적인 두려움과 실리가 어떤 의미로는 웃기고 영악하다는 이야기다. 인도에서 7년째 살고 있는 제자에게 들었더니만,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칭송받는 부탄 왕가의 한 왕자는 인도 뉴델리에 유학을 와 있는데, 왕자의 사치는 이 세상의 다른 왕국의 왕자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수준이라고 한다.

“200달러면 9,600루피인데 서민들로서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서민들의 한 달 월급은 대체로 1000루피에서 4,000루피 정도입니다. 100불을 넘게 받는 사람들은 아주 드문 경우지요. 게다가 가장 한 명이 벌어서 부양하는 가족은 4명에서 많게는 10명 정도입니다. 이 돈으로 집세 내고 식료품 사고 병원도 가고 아이들 학교도 보냅니다. 그러니 하루에 200불이 얼마나 큰돈인지 잘 알 수 있지요. 그런 돈을 매일 매일 내야만(써야만) 갈 수 있는 부탄을 지상에 남아있는 마지막 천국같이 묘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저 또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바라니시에서 한국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는 제자 채미정이 한 말이다.



‘가난 이야기’는 절대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한때 라다크가 그랬듯이 일각에서 근래 부탄이 상당히 신비롭게 소비되고 있는데, 모두들 간과하고 있는 부탄의 요상한 현실이 또 하나 있다. 부탄에서는 궂은일들을 모두 근처 인도 동부의 비하르 지역의 극빈층인 불가촉천민들을 싼 값으로 영입해서 해결하고 있다. 이른바 부탄의 힘든 일은 인도가 누천년이 흘러도 해결하지 못한 힌두 계급주의에 의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아는 이들은 알고 있지만, 인도 불가촉천민들의 삶은 지옥을 방불한다. 그들을 노예처럼 부리면서 부탄의 자국민은 돈 없어도 행복하다, 라고 선전하고, 거금의 체류비를 아무렇지도 않게 쓸 사람들이 그 선전에 감동해서 “부탄 부탄 부탄!”, 하면서 우아한 얼굴로 부탄을 소비할 때 그쪽 땅을 조금이라도 헤매본 사람으로서 심히 곤혹스러운 심사를 감추지 못하게 된다. 부탄이 그렇게 해서 지킨 전통문화의 가치는 어떻게 바라봐야 옳을까? 부탄은 아마도 자국민의 전통문화만 지키면 그만인가 보다. 물론 부탄이 이웃 강대국 인도의 오래된 계급문제까지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인도는 부탄의 국왕을 자국의 육군대령쯤의 계급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소리를 언젠가 북인도 거리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런 말이 나왔을 때 배낭족들은 ‘갈 수 없는 나라 부탄’에 대해 소리 내 웃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소 거친 농을 통해 강대국 인도의 부탄관觀을 여실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히말라야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시시한 이야기들에 속한다.

부탄의 이상야릇한 관광정책과 쇄국적인 태도들이야 남의 나라 정책이니 뭐라 할 일이 아니지만, 경치가 좋아 놀러간 이들이 아니라 의미를 찾기 위해 갔고 왕국에서 나온 뒤에는 뭔가 세상에 소용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업業으로 자임한 사람들은 그렇게 잠깐 들러본 뒤에 한없이 부탄을 예찬만 할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부탄 전역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것도 아닌 왕국에서 지정된 루트만 주마간산격으로 들러볼 자유만 허락되는 여행에서는 더욱 그렇다. 부탄에서 만나는 부탄 산악 민초들의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얼굴’은 하루에 200달러를 강제납부하지 않고도 네팔이나 북인도 히말라야 산중에서 사실, 늘 만날 수 있다.

산업사회에 속해 있으면서 산업사회의 여러 난공불락의 문제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관념과 낭만성이 바로 여기 ‘부탄 이해’에도 있는 것 같다. 공공연한 사실에 대한 고의적인 은폐와 적극적인 왜곡이 그것이다. 저자 쓰지 신이치와 추천사를 쓴 이에게서 부탄 왕국 입장권이 그곳의 화폐감각으로 너무나 과도한 액수라는 이야기가 한마디라도 나오기를 나는 아마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다. 부탄을 이야기하면서 왕이 강조하는 행복지수만큼이나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곳에 노예처럼 유입되어 짐승 수준으로 살고 있는 비하르 지역의 불가촉천민에 대한 이야기도 한토막 나오기를 나는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책의 분위기를 보니 그럴 것 같지 않아 책을 읽을까 말까, 망설였던 것이다.

“가난이 불행의 절대조건이 아니다”라는 이야기와 “풍요가 행복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쉽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는 섬세한 주변살피기와 냉정하고 무서운 자기비판이 동시에 수반되지 않으면 자칫 불필요한 오해나 거부감을 촉발하거나 공허한 이야기가 되기 쉬울 것이다. 나랏돈, 기업돈 쉽게 타 쓰고 세상을 망친 자들과 같은 수준의 소비생활을 영위하며 자기만족감에 빠져 무슨 대부 운운하는 명예까지 챙겨 누리던 스타급 시민운동가들의 추락이 반드시, 곧 몰락할 못된 정권의 탄압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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