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11월 2009-11-01   1367

아카데미 느티나무_함께 공유하는 기억과 열망으로 만나는 광장



함께 공유하는 기억과 열망으로 만나는 광장


박현희  구일고 사회교사 
나는 서울 토박이이다. 내 모든 역사와 현재가 서울에 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서울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신 어머니의 딸이고, 한강물이 얼어붙은 한겨울에 두 뺨이 빨개지도록 얼음을 지친 추억을 가진 서울 남자의 아내이다. 그런데도 나는 서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별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 더 솔직한 고백이겠다. 그런데 하늘이 미치게 예쁘던 어느 날 서울 거리를 일 없이 쏘다니다가 인구 과밀, 교통 지옥, 살인적인 주택 가격, 환경 오염, 난개발 등등등 서울에 따라붙은 수많은 악명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가 정말 멋진 도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전 세계 인구 가운데 얼마만큼이나 과거와 현재가 이토록 도도하게 어우러진 도시에서 사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단 말인가. 이토록 오래 산 도시에 대해 잘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내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 강좌 안내에서 ‘한성, 경성, 서울을 걷다’라는 멋들어진 이름의 강좌를 발견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참가 신청을 한 것은 이것이 일종의 계시와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남산(옛 조선신궁 광장)에서 선은전 광장까지

한국 근현대 광장을 찾아가는 답사는 당장이라도 비가 올 듯 말 듯한 일요일 오후 남산의 백범 광장의 김구 동상 앞에서 시작되었다.

광장을 찾아가는 답사인데 웬 남산?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사에서 공식적으로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장소가 바로 남산이다. 조선을 점령한 일본은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웠다. 조선신궁은 조선 총독부와 정확하게 마주보도록 지어졌으며, 그 주변에는 광장이 만들어졌다. 높은 곳부터 상광장, 중광장, 하광장이라고 불렀다. 조선신궁 광장은 신궁 앞이니만큼 종교 행사도 열렸지만, 다양한 관변 집회가 개최되었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광장의 역사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후에도 광장의 역사가 이리 저리 왜곡될 것에 대한 예견이었을까? 재미있는 것은 조선신궁 광장이 서울운동장과 함께 해방 이후 미군정시기에 대중 집회가 열리는 양대 중요 공간이 되었다는 점이다. 서울운동장에 서 집회 허가를 얻기가 어려웠던 좌익들의 집회가 주로 남산 공원에서 개최되었다. 최대 인파가 60만에 달했다고 하니, 당시 서울 인구를 생각하면 무시무시한 숫자이다. 

답사팀이 다음으로 찾은 곳은 명동 성당이다. 명동성당은 광장이 부재한 한국 근현대사에서 광장으로서 역할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아직도 이 거리에 서면 가톨릭이나 추기경보다 87년 6월을 먼저 떠올린다. 6월 10일 당시 민정당이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던 날에 맞추어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누구도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애국가가 울려 퍼지던 그 거리에서 나는 울었다. 정신없이 구호를 외치는 가운데 어둠은 짙어가고 전투경찰에 쫓기던 시위대 중 일부가 명동성당으로 모여들었다. 독재 정권으로부터 잠시라도 시위대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곳이었으므로. 그날 저녁부터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명동성당을 지키는 이들이 있기에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시위대는 거리로 나왔고, 1960년 이후 처음으로 시민이 승리한 역사를 만들어냈다.

선은전 광장으로 오니 제법 다리가 묵직해진다. 선은전 광장이 어디인가? 일제시기 이곳은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미쯔코시(三越) 백화점 등으로 둘러싸인 교통 및 경제 중심지였다.

미쯔코시 백화점은 당시에는 파격적인 건축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옥상 정원을 설치했다. 인류 역사에서 주류의 자리를 차지해 온 문명은 대체로 농경문화였는데, 농사를 지으려면 비가 오는 것이 필수이니 대체로 주류 문명권의 지붕은 빗물이 고여 흘러내리지 않도록 경사지에 만드는 것이 상식이다. 평평한 지붕은 건조한 기후의 중동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1920년대 르 코르뷔지에가 평평한 지붕을 제안하여 파란을 일으킨 이래, 식민지 경성의 한복판에 이 혁명적인 건축양식이 도입된 것이다. 미쯔코시 백화점은 건축을 전공한 청년 김해경에게 엄청난 영감을 안겨주어 시를 쓰게 한다.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 내부의사 각형(…)옥상정원.원후를 흉내 내고 있는 마드무아젤.(…)”(<건축무한육면각체-오 마가젱 드 누보테>, 이상) 난해한 것으로 이름높은 그의 시가 사실은 지독히 치밀한 묘사였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이 백화점은 곧장 미군을 상대하는 PX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1층의 초상화부에서 미군 초상화를 그려주던 화가 중에는 박수근이 있었고, 손님을 끌어모으는 호객꾼을 하던 젊은 여성 가운데에는 소설가 박완서가 있었다.

이제 조선은행은 한국은행이, 경성우편국은 중앙우체국이, 그리고 미쯔코시 백화점은  신세계백화점이 되어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번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몸이 자전거 타는 법을 기억하는 것과 같은 ‘몸의 기억’처럼 ‘장소의 기억’도 질기고 질기다는 것이다. 100년 가까운 세월 앞에서도 끄덕 없다. 이 질기고 질긴 장소의 기억! 선은전 광장, 말 그대로 조선 은행 앞 광장은 말은 광장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모임과 소통의 공간이라기보다는 그저 넓은 곳으로서의 광장이었던 것 같다. 광장이라기보다는 교차로의 의미가 더 강한 것이다. 진짜 광장은 대체 어디서 만날 수 있지?


질기게 돌아가는 권력과 저항의 축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경운궁(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겨 경운궁은 졸지에 조선의 정궁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된다. 경운궁의 정문인 대한문 앞은 각종 상소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변화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문 앞에는 경성부청이, 그리고 대한문 옆으로는 부민회관이 들어선다. 이렇게 해서 조선 총독부 – 경성부청 – 조선 신궁으로 이어지는 일제 통치의 기본 골격이 서울이라는 공간 속에 완성된 것이다. 경성부청 자리에 지금은 공사중인 서울 시청이 자리 잡고 있고, 부민관은 서울시의회로 사용되고 있으니 여기서도 질긴 ‘장소의 기억’은 계속된다.

이제야 우리는 진짜 광장을 만난다. 지금도 내게는 서울광장보다는 시청 앞 광장으로 더 친숙한 이 광장에서 4·19혁명, 6월 항쟁, 촛불 시위가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 시청 앞 광장은 광장이 아니다. 광장이 광장이려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다. 우리는 안다. 이곳이 진짜 광장일 수 있는 까닭은 이 광장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역사 때문이라는 것을. 스케이트장으로 위장하고, 잔디로 감추어도 우리가 그 역사를 기억하는 한 이 광장은 우리 시민의 광장이다.

광화문 광장은 사실 광장이라기보다는 아주 넓은 길이다. 조선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후 성곽을 쌓고 경복궁을 지었다. 종묘와 사직을 짓고, 육조거리(주요 관청이 있는 거리)를 만들었다. 광화문 광장은 경복궁에서 육조거리로 이어지는 큰 길에서 비롯되었으며, 지금도 그 원형은 크게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일본은 조선 지배의 상징으로 총독부를 경복궁에 지어 왕실의 권위를 고의적으로 훼손한다. 시청앞 광장에서 만났던 경성부청과 남산에서 만난 조선 신궁으로 이어지는 공간 배치를 통해 식민지 지배의 위용을 과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일제 시대 조선인의 공간이었던 종로통과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 두 개의 축이 만나면서 형성된 이 공간의 긴장은 대한민국까지도 이어진다. 청와대에서 정부 종합청사, 미대사관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축과, 4·19혁명의 대열처럼 대학로에서 종로를 거쳐 경무대로 향했던,  저항의 축은 이곳에서 충돌한다. 하지만, 지금 광화문 광장은 꽃밭이다. 플라워카펫이 조성된 광장에서 나는 독재 정권이 대학생들의 집회를 막기 위해 대학 광장에 심었던 장미꽃을 생각했다.

종각이 있는 종로네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시전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광화문부터 시청 광장으로 이어지는 거리가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로서 지배층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이곳 종로는 시전 상인들의 공간, 필부들의 공간이다. 시전들 가운데에는 백목전(면포전)도 있었는데, 그 흔적이 계속 남아서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종로는 유명한 한복집들이 모여 있었다. 어머니를 따라 갔던 종로의 한복집에서 금박물린 휘황한 한복감을 만져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라고 할 수 있는 만민공동회가 이곳에서 열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혁명이 임박한 순간도 아닐진대, 왕의 공간 바로 앞에서 대중집회를 열 수는 없지 않은가. 만민공동회에 모인 사람은 많을 때는 1만명을 헤아렸다고 하니, 당시 20만 가량이었던 한양 인구를 생각하면 충격적인 숫자이다. 게다가 처음으로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동의 사안으로 집회를 열었다는 점은 조선이 완고한 신분제 사회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굉장한 진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로 네거리에서 종각과 마주보고 있는 곳에는 화신백화점이 있다. 선은전 광장 옆의 미쯔코시 백화점이 일본 자본을 상징하고 있다면 화신 백화점은 민족자본을 상징한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미쯔코시보다 더 높게, 더 화려하게 지어진 화신 백화점은 1987년에 철거되고, 지금은 종로 타워가 자리 잡고 있다.



장소의 기억, 공유와 열린 광장으로 만들어 나가기

다리가 뻣뻣해지고,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광장 답사의 마무리는 탑골공원이다. 탑골공원은 1898년 고종 때 공원으로 조성된 뒤, 연주회와 같은 문화예술행사가 개최되면서 조선 말 대표적인 근대적 공간으로 자리를 잡는다. 이 공원이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3·1운동 때이다. 그 바람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탑골공원은 총독부의 특별 관리 대상이 되었다. 그 특별한 관리가 무엇이었냐 하면 빽빽하게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저런! 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한 방법 아닌가.

하루 동안 공간상으로는 남산에서 종로까지를, 시간상으로는 조선시대에서 일제 시대를 거쳐 대한민국까지 여행했다. 그리고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는 듯하지만, 광장을 지배하려는 권력의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광장을 진짜 광장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기억과 열망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 나갔던 기억과 열망 말이다. 어떤 법이나 제도도 지울 수 없다. 그러니 광장은 여전히 우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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