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2월 2003-02-06   2190

이슈추적 : 교계정치하며 시민단체 휘젓는 표용은의 두 얼굴

시민운동 정체성 뒤흔드는 표용은 서울YMCA 이사장의 정치이력을 고발한다


무림고수가 있다. 절대강자다. 한동안 그에게 적수란 없었다. 표용은. 그는 한국 기독교사(史)에 교계정치의 장을 열었고, 30여 년 간 이 분야의 동방불패로 군림해 왔다. 그런데 요즘 강호가 혼란스럽다. 중원 무림을 평정해 온 절대고수의 지위에 균열이 일고 있다. 몇몇 문파가 사력을 다해 그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표용은이 유린해버린 자신들의 정체성과 명예를 되찾겠다며 강호 군웅들에게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표용은 퍼즐 맞추기

농담이 아니다. 표용은 목사는 언제부턴가 ‘무림고수’라 불리고 있다. 더 있다. ‘마피아’ ‘껍데기’ ‘직업이 이사장’ 등, 그리 유쾌하지 못한 별명들이 그를 따라다니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그의 영향력은 기독교 내에서만이 아니라 학교, 방송, 시민단체에서까지 맹위를 떨쳐왔다. 그런 그가 도전 받고 있다. 지난해 10월, 그가 지지한 신 아무개 목사가 서울연회 감독 선거에서 떨어졌는가 하면, 최근 몇 달 동안에는 그가 이사로 29년, 이사장으로 16년째 재직하고 있는 서울 YMCA(이하 서울 Y)가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서울 Y의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은 표 목사를 혼란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의 퇴진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다른 쪽 사정도 비슷하다. 그가 이사장으로는 10년을 재직했고, 이사로는 27년째 재직하고 있는 기독교방송(CBS)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영향력에 상처를 입었다. 그가 꾀한 권호경 사장의 3선 연임이 노조의 저항으로 결국 좌절됐기 때문이다.

알려진 대로, 서울 Y 사태가 터진 건 지난해 9월 30일 있었던 김수규 전 회장의 사퇴를 둘러싼 진실 공방이 계기가 됐다. 표 목사는 눈 밖에 난 김 전 회장을 치밀한 각본에 의해 사퇴시킨 뒤, 이를 김 전 회장의 전횡에 반발한 간사들의 개혁 요구를 김 전 회장이 받아들여 자진 사퇴한 것처럼 꾸몄고, 이 사실을 시민단체 공동신문 『NGOTIMES』가 폭로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탄생한 것이 서울 Y의 개혁을 바라는 실무자 및 회원들의 모임 ‘서울 YMCA 개혁과 재건을 위한 회원비상회의(이하 재건위)’다. 재건위는 그동안 제기되어 왔던 서울 Y의 정체성 혼란의 핵심 원인을 표 목사의 교계정치로 보고 이사장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표 목사는 이에 대해 1월 16일 현재까지 17명의 재건위측 실무자들을 해임하는 등 초강수로 맞서고 있다.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한 표 이사장의 도덕성엔 돌이킬 수 없는 흠집이 난 상태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그는 70년대 중반부터 기독교 관련 기관 가운데 알짜를 모두 섭렵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일개 목사의 신분으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해답을 찾아가다 보면 기독교 내 역학관계의 어두운 일면, 이 역학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교계 관련 기관들의 구조적 현실, 그리고 이들 기관들의 정체성을 표 목사가 어떻게 왜곡시켜 왔는지 하나하나 드러난다. 이를 위해서는 표 이사장이 어떤 방법으로 교계 핵심 기관들의 요직에 앉게 되었는지, 그림을 그려볼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은 퍼즐 맞추기와도 같았다. 일례로 표 이사장이 서울 Y 이사회에 어떤 경로로 진출했는지 현 서울 Y 간사들 중에는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만큼 그가 오래 전부터 이사 직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표 목사의 전반적인 인생 경로를 꿰고 있을 만한 사람들 중에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 표 목사의 측근이기에 그렇다. 표 목사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역시 일정 수준을 넘는 이야기는 삼갔다. 더 깊이 들어가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그래서 스스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교단의 내밀한 부분을 들춰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 멀리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치 표용은이란 그림판에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끼워 맞추듯.

감리교 계파정치의 달인

1933년생인 표용은 목사의 올해 나이는 71세다. 59년 감리교 신학대학교를 졸업했고, 60년에 현재까지 시무하고 있는 서울 서대문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평범한 목사였던 그가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택했던 방법은 영성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교계정치를 통해 세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당시 가장 손쉬운 세력 확대 방법은 감리교 내 계파 장악이었다. 지금은 감신, 협성, 목원 등 대학 학맥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일제시대 때는 친일 여부로, 해방 후부터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출신 지역에 따른 계파를 중심으로 감리교 권력이 편재되어 있었다. 60년대 이후 주요 계파로는 월남한 교인들이 주축이 된 성화파와 서울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정동파, 충청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호헌파를 꼽을 수 있는데, 얼마 뒤 호헌파가 주도권을 잡게 된다. 충남 공주 출신으로 호헌파에 속했던 표 목사는 70년대 호헌파가 구파와 신파로 분열되고 80년대초 신파 김창희 전 감독이 세상을 뜨면서 신파의 좌장으로 부상한다. 이렇게 세력을 형성한 그는 이미 1970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운영위원, 71년 KNCC 실행위원 부회장, 73년 기독교 대한감리회 중부연회 실행위원이 됨으로써 교계정치를 위한 든든한 기반을 마련한다. 그런 그가 주목한 것이 바로 서울 Y다.

표 목사의 서울 Y 진입은 그야말로 ‘갑자기’ 이루어졌다. 어느 날 보니 그가 이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75년의 일이다. 이에 대해 서울 Y의 한 관계자는 “회원운동체인 서울 Y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외계인과도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표 목사가 이사가 되기 전에는 서울 Y 회원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기억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는 또 “표 목사 스스로는 자신을 50년 된 회원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자료에 의하면 그는 69년에 회원등록을 했다. 다시 말해 34년 회원”이라고 짚어 주었다. 애초에 시민운동에 뜻을 둔 것이 아니었기에 그의 서울 Y 진입은 회원 활동이 아닌 이사회 장악을 목표로 이루어졌다. 이 때의 상황을 ‘영원한 Y맨’이라 불리는 전택부 명예총무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표용은을 필두로 그때부터 서울 Y에 정치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 때문에 밀려난 사람이다. 나는 6·25때 파괴된 서울 Y 건물을 재건하기 위해 Y가 불러서 57년부터 Y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총무가 됐고, 결국 68년에야 현재의 건물을 완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Y 건물이 폐허였을 때는 건물 짓겠다는 이야기에 코웃음치던 사람들이 번듯한 건물이 올라가니까 Y 총무 자리를 탐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사회에서 정년을 낮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그때 내 나이 60이었는데, 많이 속상했지만 이사들과 싸워서 Y를 분란에 빠뜨리느니 차라리 내가 그만두겠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정년을 60세로 바꾸고 퇴임했다. 그때 주동이 되었던 사람 중 한 명이 표용은이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이 안 돼 이사회가 다시 정년을 65세로 환원했다.”

그렇다면 서울 Y 실무진에게조차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표 목사가 어떻게 총회에서 갑자기 이사로 선출될 수 있었을까. 여기에 감리교 교단 정치의 비밀이 있다.

서울YMCA, 정답표와 카르텔

6·25 이후 서울 Y에 주로 기여한 교단은 장로교였다. 그런데 표 목사가 이사가 되는 75년 전후로 감리교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 방법은 카르텔이었다. 당시 대표적인 감리교 재단 학교였던 서울 ㅂ고등학교, ㅅ여자고등학교, ㄱ대학교, ㅇ대학교와 서울 ㅊ교회, ㅅ교회 등의 관계자들이 최고 6명까지 찍을 수 있는 Y 총회 투표에서 자신들이 확보하고 있는 표를 이용해 각자의 후보를 서로 찍어줌으로써 한꺼번에 이사로 선출되도록 하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직접 회원을 ‘재배’하기도 했다. 서울 Y의 한 원로 회원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들 학교나 교회에서 서울 Y 회원등록에 필요한 돈을 대신 내고 교사나 교인들을 등록시켜서 총회 투표에 필요한 회원을 만든다. 회원을 재배하는 것이다. 이건 당시나 지금이나 서울 Y 내부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나도 처음에 ‘우리도 좋은 사람 이사 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 등록해서 투표권을 갖자’고 해서 Y 회원에 등록했다.”

올해도 ㅅ교회는 300만 원의 교회 자금을 들여 150명의 교인을 서울 Y에 등록시켰고, 몇 년 전에는 경기도 ㅍ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이사들이 학교 버스로 교직원들을 실어 날라 총회에서 투표하도록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렇게 감리교 인사들이 결탁해 이사회로 진출한 결과, 현재 이사장을 포함한 25명의 이사들 중 2/3가 감리교 쪽이다. 이런 이유로 현재 장로교 쪽 인사들이 다수 참여한 재건위의 개혁 노력을 두고 이사회는 “장로교가 다시 권력을 잡기 위한 공작”이라는 음해성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 특정인들이 교단정치에 서울 Y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대목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88년, 표용은 목사의 명함에는 직함이 하나 더 늘었다. 서울 Y 이사장.

기존 이사회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이사로 선출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 새로 이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표 이사장을 비롯한 기존 이사들의 구미에 맞는 사람에 한정된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서울 Y 총회 구조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소위 ‘정답표’를 통한 투표 방식이다. 회비를 내는 서울 Y 회원은 대략 4만 명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모두 투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기독교인, 등록 3년 미만의 회원과 여성은 제외된다. 여기에 투표권을 가졌지만 기존 이사회에 신물이 난 회원들이 투표를 포기하는 예가 많아 2002년 총회의 경우 투표권자는 1189명, 최종 투표한 사람은 430명에 불과했다. 결국 이 작은 숫자의 회원들만이 투표를 하게 되는데, 방식은 이렇다.

이사의 임기는 3년으로 24명의 이사 중 매년 8명을 새로 뽑는다. 이 8명 중 6명은 선출이사, 2명은 추천이사다. 추천이사는 주로 이사장의 추천을 통해 임명되므로 이사장인 표용은 목사가 원하는 사람으로 결정된다. 이 제도에 의해 이사가 된 대표적인 이가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이다. 선출직 6명 또한 공천위원회의 추천을 받아야 출마할 수 있다. 공천위원 도 6명인데 3명은 선출, 3명은 이사 중에서 임명된다. 사실 공천위원회를 이사회가 장악하고 있고, 이런 공천위원회가 후보를 추천하기에 반 표용은 성향의 후보가 추천되는 길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어쩌다 추천이 되더라도 남의 잔치에 들러리만 서는 꼴이 되고 만다. ‘정답표’가 돌기 때문이다. 선거 전에 찍을 사람을 미리 정해 자신들이 관리하는 회원들에게 가르쳐준다.

그렇다면 이사 후보로 출마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공천위원회가 추천하는 대부분의 후보 1 순위는 만기이사들이다. 이사 재임 3년 후 만기이사가 되더라도 선거를 통해 다시 이사로 선출될 수 있다. 자신이 더는 이사를 하기 싫거나 표 이사장에게 밉보이지만 않았다면 이사회가 장악하고 있는 공천위원회에 의해 다시 추천을 받고, 이사들이 관리하고 있는 재배회원들이 담합해서 표를 몰아주기 때문에 이들이 그대로 다시 이사가 된다.

일반 회원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후보 한두 명에만 표를 주지만 재배회원들은 최대 기표 가능수인 6명을 모두 찍는다. 따라서 만기이사로 다시 선거에 나간 6명은 골고루 200표 이상을 얻어 고스란히 당선되지만, 7등의 득표수는 급락한다. 5~6년 전 친구가 이사 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다는 한 회원은 “개표 결과 친구가 7등이라고 했다. 58표를 얻었다. 그런데 1등부터 6등까지는 모두 220표 이상이었다”며 “이런 결과는 담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선거는 요식 행위일 뿐 아니라, 나아가 기존 이사회가 생명을 계속 연장해 나가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되고 있다. 예전에는 돈은 돈대로 내고 일은 일대로 해야 하는 자리가 이사나 이사장이었다. 그런데 표 목사가 이사장이 되고부터는 봉사직이 아닌 권력의 상징이 되고 만다.

KNCC, 표-권 체제 탄생시키다

표용은 목사가 KNCC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70년 운영위원으로서였다. KNCC는 70~80년대 인권운동의 메카였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목회자들은 암울했던 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의 맹장들로 그 활약이 대단했다. 그 중 한 명이 권호경 전 CBS 사장이다. 존경받는 민주화투사였던 그의 몰락도 표용은 목사와의 인연으로부터 시작됐다.

기독교연합기관 중 가장 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기관은 KNCC, CBS, 기독교서회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예장통합, 기장, 감리교 세 교단이 각 기관의 기관장을 돌아가며 맡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있다. 89년이었다. 예장통합 소속이던 김소영 KNCC 총무가 임기를 마치면서 기독교서회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CBS 사장은 이재은 감리교 목사가 맡고 있었다. 공석이 된 KNCC 총무는 기장이 맡을 차례였다. 그때 가장 유력한 기장 쪽 인사는 김상근 목사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예장통합에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영남지역 목회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예장통합 쪽 사람들이 보기에 호남 출신이자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의 측근이었던 김상근 목사는 매우 껄끄러운 존재였다. 이때의 혼란으로 총무 자리가 8개월 동안 비어 있었다. 그때 김상근 목사가 총무를 포기하는 대신 그 자리는 원래대로 기장이 맡도록 하자고 주위를 설득한 사람이 표용은 목사였다. 표 목사는 홍콩에 머물고 있던 권호경 목사를 KNCC 총무로 적극 추천했고, 권 목사는 총무로 부임했다. 그전까지 별다른 교류가 없던 두 사람은 이 일로 급속히 가까워졌고, 권 목사는 그 후 철저한 표 목사의 사람이 됐다.

표 목사가 KNCC를 서울 Y처럼 구조적으로 좌지우지한 것은 아니다. 부회장을 역임하긴 했지만 총무 중심 체제인 KNCC에서 그 권한은 미미했다. 다만 총무인 권 목사와 그 후임 김동완 목사의 뒤를 봐주면서 이들을 통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KNCC내의 음향영상위원회(이하 음영위원회)해체를 주도하고 그 결과로 CBS를 완전 장악한 것은 표 목사에게 엄청난 실리를 안겨다 주었다.

원래 CBS의 설립 주체는 KNCC 음영위원회였다. CBS와 KNCC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CBS 사업 방향과 관련해 KNCC의 발언권은 어떤 식으로든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80년대 후반, KNCC 음영위원회를 해체함으로써 KNCC로부터 CBS의 독립을 주도한 인물이 표용은 목사였다. 그가 이미 10년 이상 CBS 이사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그가 내세운 논리는 CBS가 더 많은 교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KNCC 음영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교단만 CBS에 이사를 보낼 수 있었다. 따라서 진보적 색채를 띤 KNCC에 속해 있지 않는 예장합동, 침례, 성결 등 보수교단은 CBS에 이사를 보낼 수 없었다. 이 교단들을 CBS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음영위원회를 해체해야 한다는 게 표 목사의 주장이었다. 음영위원회 해체 논의에 CBS 실행위원으로 참여했던 민 아무개 씨는 “사실 그 논의 자체가 이미 음영위원회 해체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CBS에 다른 교단을 받아들인다는 논의는 KNCC를 빼놓고 CBS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며, 음영위원회 해체로 가장 득을 본 사람은 해체를 주도한 표 목사라고 지적했다.

“CBS 논의구조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KNCC가 음영위원회 해체로 그 끈을 상실했으니, 그 다음부터 CBS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그가 장악하고 있던 이사회가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해서 CBS에 파송된 예장합동, 침례, 성결 등의 이사들도 결국 모두 표 목사의 추종자가 됐다.”

CBS, 음영위원회 해체로 장악

표 목사는 지난해 10월 CBS 재단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0년을 채운 뒤였다. 물론 자진 사퇴는 아니었다. CBS 사태에 책임을 묻는 노조의 압박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사직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77년 감리교 파송 이사로 CBS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해 93년 이사장에 오른 표 목사는 94년 권호경 당시 KNCC 총무를 사장으로 데려오면서 CBS 내 영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아울러 KNCC에 이어 CBS에서도 표-권 체제가 가동됨으로써 CBS 사태의 기나긴 서막이 오르게 된다.

94년은 권호경 목사가 4년의 KNCC 총무 첫 임기를 마치고 재임하고 있던 해로, 2년 9개월여의 임기를 남겨둔 상태였다. 임기를 마치기도 전에 권 목사가 CBS 사장으로 옮긴 데도 표 목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CBS의 경영 상황이 어려워지자 이를 타계하기 위해 사장이던 이재은 목사(감리교)는 정부에 기채승인을 요청했다. 방송사가 은행에서 대출받기 위해서는 정부의 승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이재은 사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때는 YS 정권이 CBS에 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사장으로 앉히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92년 대선 때 부산 출신의 한 아무개 CBS 보도국장이 YS에게 유리한 보도를 하려다 문제가 되어 사퇴한 적이 있었는데, YS가 이 일로 CBS를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표 목사가 나섰다. 정부의 이재은 사장 퇴진 요구를 받아들이되, 친YS 성향의 인물을 거부하고 권호경 목사를 낙점한 것이다. 이때는 순서로 보면 예장통합에서 사장을 맡을 차례였다. 그럼에도 통합 쪽 이사들까지 권 목사를 지지했고, 권 목사는 CBS 사장으로 옮겼다. 표 목사는 공석이 된 KNCC 총무 자리에 김동완 목사를 앉혀 문제를 서둘러 마무리했다.

이렇게 형성된 표-권 체제는 독단적 경영으로 CBS를 파행으로 몰고 갔다. 표 목사가 장악하고 있는 이사회도 마찬가지다. 사장을 대신해 간부 인사권을 가진 이사회의 권한은 막강하다. 사내에 국장급 간부 인사설이 돌면 “이사들이 또 용돈 떨어졌나?”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종로5가 마피아’. 기독교 주요 단체를 이런 식으로 좌지우지하는 KNCC의 몇몇 인사를 두고 세간에서 일컫는 말이다.

감신대, ‘105일 사태’ 원인 제공

CBS 이사장이 되기 2년 전인 92년, 감리교 내 표 목사의 위상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다. 더 올라갈 자리란 감리교 최고 위치인 감독회장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감리교 감독회장의 권한은 실로 대단하다. 중앙집권체제인 감리교 특성상 감리교의 모든 재정을 감독회장이 관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서울 지역연회 감독이던 그는 92년 10월 제20회 총회에서 마침내 전국 7개 연회를 총괄하는 감독회장에 선출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해에만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역자 은급재단 이사장,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 이사장에 오르는 등, 그가 지금까지 역임한 이사장 수만 모두 11개에 이른다. ‘직업이 이사장’이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감리교 감독회장이 되면서 동시에 얻게 된 또 하나의 이사장 직함은 감신대 이사장이었다. 이사장의 공식 임기는 4년이지만 관례상 감독회장이 새로 선출되는 2년 주기로 이사장도 교체된다. 새 감독회장이 이사장이 될 수 있도록 직전 감독회장이자 이사장이 2년 일찍 그만두는 식이었다. 주로 지역연회 감독들이 맡게 되는 이사직도 이 때 함께 교체된다. 92년 11월, 표 감독회장은 제20회 총회에서 함께 선출된 지역연회 감독들과 함께 감신대에 부임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감신대는 호헌신파가 완전 장악하게 된다. 표 이사장뿐 아니라 함께 부임한 이사들 대부분이 호헌신파인 데다, 당시 총장이던 구덕관 목사 역시 호헌신파였다. “그때의 이사회는 표 이사장의 마피아 조직”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쓰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93년 가을 ‘105일 사태’가 터졌다. 94년 3월 권호경 당시 KNCC 총무를 CBS 사장으로 데려 오면서 비게 된 총무 자리에 김동완 목사를 앉히기 위해 총무 물망에 올랐던 부총무 김아무개 목사를 감신대 교수로 임용을 시도한다. ‘달랠 목적’인 만큼 인사절차가 무시된 조치였다. 반대하는 교수들의 단식과 학생들의 수업거부가 이어졌다. 95년 후반기, 사태가 마무리될 때까지 5명의 교수가 해직되고 교수 사회가 분열되는 등 감신대는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구덕관 총장이 사퇴했지만, 표 이사장은 끝까지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행대로라면 감독회장 선거에 맞춰 떠나주어야 하는 이사장직을 임기 4년이 끝날 때까지 내놓지 않아, 표 목사 후임으로 선출된 감독회장이 이사장으로 부임하지 못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감신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치 비결은 철저한 논공행상

표 목사를 아는 사람이면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 있다. “정치 감각이 아주 뛰어난 사람” “목사이기보다는 정치인”이라는 게 그것이다. 정치인에게는 각자 그만의 정치 스타일이 있기 마련이다. 탁월한 정치감각을 가진 그가 교계정치를 펼치면서 보여준 스타일은 현실 정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맥 관리. 정치인에겐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다. 그의 광범위한 인맥이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표 목사 자신만 알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정계 인맥만 해도 상당하다. 우선 그와 같은 충남 공주 출신인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나 같은 당 소속 송광호 의원과는 아주 각별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특히 2001년 자민련이 김 명예총재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소위 ‘JP 대망론’을 연일 띄우고 있을 때 표 목사도 5·16 기념 행사에 참석해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JP 대망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당시 김종호 자민련 총재권한대행이었는데, 그 또한 표 목사가 지원하고 있는 정치인이다. 김 의원이 신한국당 소속이던 97년, 그가 대선후보 당내 경선에 출마할 뜻을 밝히자 표 목사는 김 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모임인 통일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 후 김 의원이 경선을 포기하고 대선이 닥치자 그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서울 Y의 한 관계자는 “표 이사장과 김수규 전 회장이 이회창 후보 지지운동을 했다. 이 후보 부인인 한인옥 씨에게 Y 강당에 모임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고 들려 줬다.

서울 ㅊ교회 황용배 장로를 서울 Y 추천이사로 영입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다. 2001년까지 이사회 명단에 올라 있었던 그는 마사회 감사 시절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돼 2001년 12월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인물이다. 99년 ‘옷로비 사건’ 때는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 구명 로비 혐의를 받기도 했다. 이런 대형 사건에 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있다. 황씨가 대통령 영부인 이휘호 여사가 나가는 서울 ㅊ교회 장로로 이 여사와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이다. 아태재단 후원회 사무처장을 역임할 정도였다. 교계 사정에 밝은 서울 Y의 한 원로회원은 “표 목사가 이 여사와 가까운 황 장로를 통해 이 여사에게 줄을 대려 했음이 틀림없다”고 황씨의 서울 Y 추천이사 영입 배경을 추측했다.

표 목사의 또 다른 인맥 관리 방식은 철저한 논공행상이다. 이는 주로 표 목사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그를 오늘의 위치에 오르게 한 비결 중의 비결이라고 할 만하다.

“표용은은 조직 장악의 귀재다. 대단히 탁월한 사람이다. 자기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끝까지 책임지는 보스 기질이 있다” “자기 사람을 관련 기관이나 단체 곳곳에 심고 상벌에 따라 떡고물을 철저하게 챙겨준다”. 표 목사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는 한 대학 교수가 말하는 표 목사 정치의 열쇠다. 서울 Y나 CBS를 비롯해 그가 관계하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가 취직시켜 준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서울 Y만 해도 10여 명 부장 중 2명이 그의 친인척이다. 그에겐 교회도 인맥을 관리하는 장소다. “목회는 안 하고 정치만 했다. 그의 교회는 그가 인맥을 형성, 유지하는 장소로 이용된다”며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고 있다. 표 목사의 절친한 친구로 알려진 김형승 씨도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표용은 목사는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수완도 뛰어나 정치를 했으면 대성할 인물이다. 교회 정치에 깊이 관여해 종교계의 거물이 되었고, 감리교 최고 위치인 감독회장까지 역임하기도 했지만, 목사로서 자기 교회의 부흥에는 미흡하였고, 교계 정치와 사회 일에 심취하다 보니, 설교 준비가 완벽하지 못하고 연습이 부족해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으며, 작은 교회 운영에도 아쉬움이 적지 아니하였다. 표 목사가 갖추고 있는 능력을 교회 부흥에 헌신했다면 5만 명은 넘는 교회로 성장시켰을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이렇게 정치에만 신경 쓴 결과 그가 개척한 서대문중앙교회 교인 수는 40여 년의 교회 역사 동안 100∼150명을 넘지 못했다. 이 교회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30여 명은 서울 Y 관계자, 30여 명은 CBS 관계자, 나머지는 가족이나 친구”라고 증언한다. 전대련·김수규 전 서울 Y 회장 등 실제로 이 교회를 다녔거나 다니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주목할 만한 이름이 여럿 보인다. 이들 대부분이 표 목사와 혈연이나 지연 혹은 이권으로 연결된 사람들이다. 김사풍 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성공회 신부다. 그런 그가 CBS 이사를 그만두면서 경비와 청소를 위주로 CBS 건물 관리 사업을 구상했고, 표 목사가 이사장이던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 경비업체인 (주)미환개발을 시작했다. 그 뒤 그는 표 목사의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 됐다. 성공회 신부지만 말이다.

YS에게 정치자금 제공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교인, 앞서 말한 김형승 씨다. 그는 표 목사가 졸업한 공주 영명고동기동창이다. 그가 작년 5월말 『서기관 20년』이란 자서전을 냈는데, 이 책에서 표용은 목사에 대해 여러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표 목사가 자신을 ‘꼬붕’이라 불렀다는 김씨는 오랫동안 서울시 공무원 생활을 하며 표 목사가 관청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중간에서 줄을 대는 역할을 했다. 표 목사는 김 씨를 통해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문제까지 해결해 주며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했다. 자기 사람을 챙기는 표 목사의 전형적인 인간관계 방식이다. 대표적인 예가 박우승 성화학원 교장이다. 충남시 토지구획정리 사업으로 위기에 빠진 학교 문제를 표 목사에게 호소했고 표 목사의 부탁을 받은 김씨가 건설부장관, 국회의원 등에게 돈봉투까지 주어가며 해결해 줬다. 이 인연으로 서로가 한자리씩을 맞교환하기도 했다. 박우승 교장은 서울 Y 이사, 표 목사는 성화학원 이사장이 된 것이다. 이렇게 힘써준 결과, 김형승 씨도 퇴임 후 강남 Y 예식장의 무상 위탁 경영권을 비롯해 Y와 관련한 각종 이권을 따내게 된다. 무엇보다 자신의 조카인 김수규 씨를 표 목사에게 소개해 서울 Y에 취직시켰고, 회장을 만드는 데까지 관여할 수 있었다.

여기에 충격적인 이야기 하나가 덧붙여진다. 표 목사가 91년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통령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김씨는 책에서 일본 동경 Y가 은행 부채로 경매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시 야당총재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도움을 준 데 대한 답례로, “나는 YMCA 이사장과 회장(그의 조카인 김수규)의 협조를 받아 김영삼 후보에게 정치자금으로 금일봉을 전달한 바가 있다”고 적고 있다. 사실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표 목사는 “김형승에게 직접 물어 보라”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김형승 씨도 사실 확인을 요구하는 기자에게 고성과 반말을 섞어가며 극도의 불쾌감을 표시했으나 정치자금 제공 사실만은 인정했다. 그의 대답 일부를 있는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걸 당신들이 알아서 뭐 하냔 말이야. 무슨 실익이 있어요? 아니 정치자금이라는 게 어떤 뜻으로 썼느냐가 문젠데, 정치자금이 무슨 대단한 겁니까? 정치인한테 단돈 100원을 줘도 정치자금이고, 1만 원을 줘도 정치자금 아니예요? 그게 뭐가 문제가 되냐 그 말이야. 쓸 데 없는 짓하고 다니지 말아요. 뭐? 아니 그럼 책에 썼으면 사실이지, 책에다 거짓말을 썼겠어? 원하는 게 뭐요? 정치자금은 표용은이 개인 돈을 줬는지, Y 돈을 줬는지, 훔쳐다 줬는지, 그것까지는 내가 몰라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로 있을 때 Y를 도와주었으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래서 조금씩 걷어서 준 거라. 그게 뭐 대단한 일이야, 일 없이 들. 당신들이 그 액수 알아서 뭐 하겠어. 쓸 데 없는 짓 하지 말아요.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잘 것이지”(전화 뚝).

이런 김씨도 몇 년 전 교회를 옮겼다. 교회 장로직을 놓고 빚은 표 목사와의 갈등 때문이다. 그 후 작년 5월 자서전을 냈다. 표 목사는 책 내용은 모른 채 「영원한 벗 형승의 발자취를 생각하며」라는 제목의 축하글을 써 주었다. 그리고 8월, 표 목사는 자신에 관한 온갖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까발려진 김씨의 자서전을 출판기념회에서야 처음 접하게 된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 뒤, 김씨의 조카이자 당시 Y 회장으로 있던 김수규 씨 퇴진 사건이 발생한다. 표 이사장이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던 김 전 회장을 퇴진시킨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김씨의 책에서 찾는 것도 이런 정황 때문이다.

“뭘 해도 좋으니 Y만은 건드리지 말라”

서울 Y는 지금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다. 급기야 지난 1월 9일, 시민운동과 자원봉사의 대표적 공간인 시민중계실을 서울 Y 직원들이 침탈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이 일은 몇몇 간부들의 묵인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더하고 있다.

표 목사의 이사 재임 기간이 길어질수록 회원운동체로서 서울 Y의 정체성은 점점 퇴색돼 가고 있다. 봉사기관이었던 이사회를 표 목사가 권력화 함으로써 파생된 문제들이 Y가 오랜 세월 유지해 왔던 훌륭한 전통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고 있다. 김수규, 김윤식 등 시민운동과는 전혀 무관한 재정 실무자들을 회장으로 등용해 확실한 친정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서울 Y를 전국 Y 중 가장 낙후한 조직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이 거세다. 실제로 비기독교인과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는 Y는 전국에서 서울 Y가 유일하다.

사업 방향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서울 Y의 인적구성과 재정상황을 보면 쉽게 드러난다. 서울 지역의 각 지회까지 합쳐 약 500여 명의 Y 실무자들 중 운동 영역 인원은 약 10%, 1년 예산 200억여 원 중 운동 영역에 할당되는 예산은 고작 4억여 원에 불과하다. 표 목사가 서울 Y에 들어온 이후 Y 건물을 이용한 임대사업은 크게 늘어난 반면, 청소년 활동 공간은 줄어드는 등 시민단체의 생명인 운동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 혼란은 결국 서울 Y 구성원들의 심각한 갈등까지 자아내고 있다. 이는 Y 운동성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재건위의 노력에 대한 행정 및 체육부서의 반응을 통해서도 그 심각성을 가늠할 수 있다.

“당신들 때문에 장사가 안 돼, 장사가. 기업 이미지 흐리지 마. 기업이란 경영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구조조정 할 수 있는 거야.”

작년 12월 30일, 표 이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재건위의 시위를 저지하던 서울 Y 한 직원 입에서 나온 말이다. 또 있다. 1월 7일, 서울 Y 개혁을 촉구하는 시민단체들의 기자회견장에서 자신을 박정규라고 밝힌 서초지회 직원은 “재건위의 주장은 표용은이란 표적을 만들어 자신들의 문제를 덮고자 하는 선동적 작업일 뿐이다. 이건 개혁을 빙자한 혁명”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도록 당사자인 표 목사는 아무런 말이 없다. 어떠한 해명도 없는 상태다. 입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도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실무자에게 물어라. 난 이사회만 주관하는 사람이어서 잘 모른다. 실무진에서 다 알아서 하고 있다. 내가 이사장이라고 월급 타 먹는 사람도 아니고, Y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람도 아니다. 명예직으로 봉사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기자를 만날 이유가 없다.”

그는 할 말이 없다지만 서울 Y의 개혁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실무자가 아닌, 표 이사장 바로 그에게 묻고 있다.

“표용은 씨가 정치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든, 감리교 정치를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 Y만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표용은 당신은 껍데기다.”

재건위에 참여하고 있는 한 원로 회원의 목소리다. 전택부 명예총무도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연못도 물갈이를 해야 썩지 않는다. 음식이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계속해서 먹으면 구역질난다. 이사 29년, 이사장 16년이란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표용은은 역사적 인물이다.”

한편, 표 이사장 퇴진을 요구하다 해임된 신종원 재건위 공동사무국장은 서울 Y의 모습이 다른 시민단체들에게도 엄중한 교훈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시민단체가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것보다 내부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개혁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서울 Y가 보여주고 있다”는 그는 “단체의 외적 규모가 커지고 성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 치열한 자기갱신을 하지 못하면 의사구조의 관료화라는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지난 1월 7일 서울 Y 개혁을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장, 뒤쪽에서 지켜보던 재건위 쪽 한 여성 간사가 소리 낮춰 흐느끼고 있었다. 올해로 설립 100주년을 맞는 서울 Y, 그 역사적인 해에 환한 웃음 대신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택부 명예총무가 또박또박 들려준 Y의 모토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우리 안에 있게 하사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한복음 17장 21절).

이문영 본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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