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11월 2011-11-04   1919

참여사회가 눈여겨 본 일-월가(Wall Street)의 평온하고도 불온한 공동체

월가Wall Street의 평온하고도 불온한 공동체

 

글·사진 고병권 수유너머 R 연구원

 

월가시위의 현장을 미국에 체류 중인 고병권씨를 통해 생생하게 들어봅니다. – 편집자주

 

불가능은 불가능이 아니었다

9월 중순 월가의 점거 시위가 시작되고 나서 가장 놀란 사람들은 미국인들 자신일 것이다. 아마 점거를 제안하고 기획했던 이들이 가장 먼저 놀랐을 것이다. 공개된 준비모임 참관 후 그 곳  활동가 한 사람과 이러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는 운 좋으면 천 명 정도 결합할 것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최대한 버텨보기는 하겠지만 오래 끌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쉽게 물러나진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전망이 아니라 다짐이었다.

  사실 2000년대에 들어 세계 곳곳에서 산발적이나 강력한 시위가 있었다. 5-6년 전 프랑스에서 큰 빈민 시위가 있었고 2009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대학생들이 등록금 인상에 항의하며 대학을 점거했고, 2010년에는 영국의 대학생들이 전국적으로 학교를 점거하는 일이 일어났다. 남미에서도 장기간에 걸친 학생들의 점거가 있었다. 2011년 봄에는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고, 그리스와 스페인이 그 불길을 유럽으로 전했다. 세계 곳곳에서 지금의 체제를 견딜 수 없다는 목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다.

  올해 미국에 왔을 때 나는 이곳 학자들에게 자주 물었다. 미국은 어떠냐고. 지난 번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건에다 특히 미국 대학생들의 채무 규모가 엄청나게 높은데, 유럽처럼 미국의 도시에서도 뭔가 일어나지 않겠느냐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내게 빙긋이 웃으며, 문제는 심각하지만 유럽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어떤 학자는 설사 미국에서 빈민 폭동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인종문제로 변질되거나 소수자들의 상호폭력으로 국지화될 거라고 했다. 다른 학자는 미국은 고도의 경찰국가여서 봉기나 시위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했다(맨해튼의 경우 유럽 도시들에 비해 10배가 넘는 경찰력을 가졌다고 한다). 또 다른 학자는 미국은 집단적 행동에 대한 정치적 거부감이 매우 강한 사회라서 불만이 있어도 대중 행동으로 표출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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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미국인들이라고 시련을 견디는 특별한 비법을 가졌을 리가 없다. 2011년 9월 17일 점거가 시작된 그 날, 즉석 토론회 자리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한 두 명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사람들은 휘발유를 미리 뿌려놓은 듯 바로 타올라 버렸다. 대출이자를 갚지 못해 집을 빼앗긴 중년 아저씨, 학자금 대출이 이미 십만 불에 이른다고 울먹이는 대학원생, 아이들을 보험 없이 키우는데 불안해 미치겠다고 말하는 젊은 엄마. 누군가는 핏대를 세우며 절규하고 누군가는 울먹이며 옆 사람을 껴 안았다. 그 어느 곳보다 사생활을 중시하고 인종과 계급의 벽이 강한 뉴욕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벽에 갇혀 똑같은 응어리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피부색도 다르고 성별도, 세대도 달랐지만 사연은 비슷했고 누구나 쉽게 공감했다.

  서로에게 건네는 말들을 곁에서 듣고는 이번 점거가 엄청난 폭발력을 갖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다. 점거 초기에 만난 한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자기 이해에 도달하고 있어요” 도무지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답답해서 나왔는데 그 답답한 마음의 정체를 사람들이 여기서 알아간다는 것이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 그동안 뉴욕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일이 사실은 ‘불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불가능’이 ‘불가능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대중, 누구도 이번 점거가 무엇을 가능케 할지 가늠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평온한, 그러나 불온한 공동체

월가의 시위 소식은 전세계로 퍼졌고 곳곳에서 비슷한 점거가 일어났다. 지난 10월 15일에는 전 세계 천 개가 넘는 도시에서 이번 점거를 지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심각한(?) 상황을 만들어낸 월가의 ‘리버티 스퀘어Liberty Square’-공식 행정명은 ‘주코티 파크Zuccotti Park’이지만 점거자들이 리버티 스퀘어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는 정작 너무나 평온하다는 사실이다. 이곳은 시위대의 사령부라기보다는 도심 빌딩 숲에 들어선 작은 마을, 흡사 시골 장터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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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축제라도 벌이는 듯 입구에서부터 밴드들이 신나게 연주를 하고 사람들은 춤을 춘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나 ‘우리는 99%다We are the 99%’는 구호마저 리듬을 타고 있어 곁에 있으면 자꾸 흥얼거리게 된다. 그 뒤로 가면 침낭이 잔뜩 쌓여 있다. 지난 밤 사람들이 덮고 잔 것들이다. 몇몇은 낮에도 거기 누워서 휴식을 취한다. 간단한 상처를 치료해주고 피로한 이들을 마사지해주는 의무醫務 공간도 있다. 그 옆에는 ‘민중주방People’s Kitchen’이 있다. 시민들이 여기저기서 가져온 음식들(심지어 유럽에서 주문이 들어와 배달된 피자도 있다)이 잘 차려져 있고 누구든 그걸 먹을 수 있다. 주방 옆에는 전 세계에서 날아오는 지지 메시지를 정리하고 여기저기 상황을 전달하는 ‘미디어 센터’가 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제너럴 어셈블리General Assembly’가 열리는 회합 장소가 있는데, 무언가 발언할 게 있는 사람들은 거기서 큰 소리로 ‘마이크 체크’를 외친다. 한국에서 시위할 때 ‘소리통’, ‘마이크’ 하면서 외쳐대는 집단 육성을 생각하면 된다. 공원에서 마이크 사용이 허락되지 않기에 불가피하게 개발된 것인데 지금은 모두가 이 방식을 너무 좋아한다. 누군가의 외침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 소리가 공감이 되면 이번에는 자기 목소리로 변환해서 그것을 크게 외친다. 사람들은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자기 목소리로 변조해서 더 큰 파장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환상적이라고 한다. 한 번 말하면 서너 번 메아리가 치면서 공원 끝까지 그 파장이 전달된다. 하지만 ‘민중전원방식people-powered’이라 공감을 얻지 못하는 말을 하면 곧바로 전원이 나가버린다.

  발언대를 지나가면 ‘민중도서관People’s Library’이 나온다. 거기서 책을 빌려 읽을 수가 있다. 곁에서 ‘마이크 체크’를 외치며 구호가 울려나오는데도 옆에 책을 읽고 있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풍경이다. 하기는 밴드가 드럼을 치고 색소폰을 불어대도 그 옆에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문구를 적어둔 채 요가와 명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함성이 고요를 방해하지 않으며, 고요 역시 함성 만큼이나 강한 소리는 내는 곳이 이곳이다.

 공원 구석구석에는 작지만 다채로운 활동이 벌어진다. 뜨개질을 하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요가를 하는 사람,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 티셔츠에 구호를 새겨주는 사람, 바디페인팅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공원 주변 길로 나가면 자기 목소리를 피켓으로 만들어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월가의 탐욕을 비난하는 주장부터, 의료보험 개혁, 주택문제, 등록금 문제, 미군철군, 환경 문제 등 온갖 이슈들이 나란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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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면 갑자기 새로운 이벤트가 열리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가족의 월가 점거의 날’이 있었다. 부모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여기서 하룻밤을 함께 지새우는 것이다. 밴드들은 아이들에게 악기 사용법을 알려주고 노래하며 함께 춤을 춘다. 교사들은 서로 연락을 해서 여기서 임시 학교를 열기도 했다. 학생들과 함께 이곳을 체험하는 것이다. 몇몇 가수들이 번개팅을 제안해서 시민들과 함께 한밤중에 센츄럴파크 주변 도로를 행진하며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다. 지도부가 따로 없이 누군가 제안하고 그것이 호응을 얻으면 바로 실행되는 식이다.

 

민주주의, 꿈을 바꾸고 현실을 바꾸고 체제를 바꾼다

음식을 나눠 먹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책을 읽고 명상을 하고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신문을 발행하고 인터넷으로 전 세계와 소통한다. 뉴욕 사람들은 이곳을 계속 찾고 있다. 왜일까. 물론 월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여기서는 뭔가 다른 삶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그것에 끌린다. 분노로 시작된 자리였지만 지금은 희망을 생각하게 하는 자리가 되고 있다.

  도대체 월가 한복판에 생겨난 이 이상한 공동체의 정체는 무엇일까. 전통적인 과거의 공동체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미래 공동체의 어떤 비전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에 주류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이곳을 두고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이상한 공동체가 하고 있는 게 뭔지 알 것 같다. 이집트의 타흐리르 광장을 점거했던 사람들, 스페인의 마드리드 광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 그리스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 전 세계 천 개가 넘는 도시에서 점거 행동에 나선 사람들, 그 모두가 바라는 삶의 어떤 원형을 여기 사람들은 실험하고 있는 게 아닐까. 탐욕적인 경쟁을 통해 소수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가 아니라, 음식과 정보, 춤과 음악을 나누고, 환경과 생태를 돌보는 사회, 그런 삶의 유형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오랫동안 월가의 금융가는 ‘아메리칸 드림’으로 추앙 받아왔다. 그들은 현실의 부를 몽땅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꿈도 차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탐욕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람들을 채무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자기 이득을 챙겨온 사람들, 사람들은 그들을 인생의 성공신화가 아니라 도덕적 파탄자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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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저기서 ‘깨어나자Wake Up’는 구호가 나오고 있다. 지금 대중들은 뉴욕의 월스트리트도 워싱턴의 메인스트리트도 믿지 않는다. 그 대신, 서로를 믿기 시작했다. 대중들의 힘, 데모스의 힘, 글자 그대로 ‘민주주의’를 믿기 시작했다. 리버티 스퀘어의 소박한 공동체는 이런 데모스의 힘, 즉 민주주의가 발휘되고 있는 곳이다. 이들은 이 체제가 근거하는 삶의 기본 형태를 바꾸는 실험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민주주의’가 세계 민중들의 공통 구호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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