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9월 2001-09-01   644

선택

선택

수십억씩 들여 만든 몇편의 영화가 전국 상영관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뭔가 다르고 독특한 영화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다양한 문화를 섭렵하기 위한 공간으로서의 영화관은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화산업의 독점자본화 문제를 생각해 본다. 편집자 주

갑자기 한국영화가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모두들 흥분해 있다. <쉬리>가 단군이래 모든 흥행기록을 갱신하더니, 그 이듬해에는 <공동경비구역 JSA>가 다시 그 기록을 갱신했다. 모두들 기적이 벌어졌다고 소란을 피웠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올초 난데없이 <친구>가 다시 한번 기록을 바꿔 놓았다(전국에서 약 850만 명, 미성년자 관람불가인 이 영화를 다섯 명 중 한 명이 보았다는 말이다). 영화산업 종사자들은 이제 흥분 상태를 넘어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지금은 <엽기적인 그녀>가 그 뒤를 쫓고 있다고 난리법석이다. 할리우드 여름 흥행작들조차 한국영화를 피해간다.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칸영화제에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경쟁부문에 진출하였다(영화에 관심 없으신 분들이라면 한국축구가 월드컵 본선 16강에 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거의 모든 유럽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을 하는 중이다. 일본 도쿄에서도 150만 명이 넘게 <쉬리>를 보았다 (이 말은 그 해 흥행 10위에 들었다는 뜻이다). <조용한 가족>을 미이케 다카시 감독이 일본에서 뮤지컬로 개작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영화 감독 첸 카이거가 한국에 제작비를 구하러 왔다. 왕가위는 SBS와 합작으로 100편의 드라마를 제작하기로 계약했다. 신문들은 한국영화가 아시아 영화의 중심이 되었다고 떠들어댄다. 투자 딜러들이 속속 한국영화로 모여들고 있다. 이제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인터넷 주식 공모로 개미군단으로부터 1억 원을 모으는 것은 일도 아니다.

영화는 주식투자가 아니다

이 모든 일이 정말 신나기만 한 일일까?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이 흥분에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다. 여기서의 성공은 오로지 경제적인 수치와 서방세계 중심의 평가에 기대고 있다. 신문들은 영화의 완성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은 마치 주식정보를 알리는 것처럼 영화가 개봉되면 흥행기록에 매달린다. 그 다음에는 올림픽 경기에서 기록 갱신을 알리는 것처럼 넘어야 할 관객 동원 수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영화는 스포츠가 아니며, 주식 투자도 아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영화에 돈을 댄 투자자들과 제작자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록들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과는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관객들은 기록을 세워주기 위한 선수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과 제작자들에게 관객이란 머릿수를 채워주는 입장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즐거우면 그만이고, 장사꾼들은 돈을 벌면 그만이니 윈-윈 게임을 한 것일까? 세상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장사꾼들은 가만히 앉아서 관객들이 내리는 판결에 운명을 내맡긴 채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유사이래 더 많은 이윤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영화시장의 승자들이다.

우선 한국영화들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규모로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은 영화가 ‘갑자기’ 좋아져서가 아니라 시장의 크기가 변한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쉬리> 이전에 가장 흥행성적이 좋은 영화는 <서편제>였다. <서편 제>는 서울에서 135만 명의 관객이 보았는데, <쉬리>는 265만 명이 보았다. 갑자기 인구가 늘어난 것이 아닌데, 관객 수가 곱절이 된 것은 경제 규모가 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이상한 변화는 복합상영관들의 기하급수적인 증가와 함께 한 편의 영화를 동시에 여러 개의 영화관에서 개봉하는 방식으로 이윤을 극대화함으로써 영화 자본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영화관을 얼마나 더 많이 장악하느냐의 경쟁을 낳았으며, 이 경쟁은 결국 ‘영화산업의 독점자본화’ 경향이다. 부익부 빈익빈? 그러나 영화는 냉장고나 자동차가 아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 한국영화를 일 년 동안 146일 의무상영해야 한다는 보호무역정책인 스크린쿼터제에 동참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영화는 산업 이전에 문화이기 때문에, 그 문화가 독점화 되는 것은 문화의 편식이며 기형화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활성화되었다고 말하면서, 정작 영화 편수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여기에 더해 한 편의 영화 제작비는 이미 60억 원을 넘어서고 있다. 60억 원을 도로 벌어들이기 위해서는 서울에서 최저 관객 120만 명을 동원해야 한다. 제작비가 60억 원이면 홍보비는 20억 원 이상이다. 이제 한편의 영화 제작비는 100억 원을 육박한다. 그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서 그 영화가 극장에 내걸리는 동안 다른 영화는 ‘죽어야’ 한다. 결국 관객들은 같은 영화의 간판만 보아야 한다. 그것은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자본의 약탈이며, 영화 선택권에 대한 시장의 강요이다.

이 시장은 흥미진진한 것이다. 새로운 시장을 욕망하는 자들에게는! 그래서 이 시장을 약탈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새로운 침략자들은 시장의 성공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들의 영화를 가져간다. 서방세계의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은 시장에 대한 우회적인 욕망이다. 영화제는 군대를 동원하기 위한 선교사들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영화의 만국문화주의를 말할 것이며, 모든 예술은 지구상의 어디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고 전파할 것이다. 그러나 국적이 없는 것은 자본뿐이다.

몇 편의 영화들이 영화관 독점하는 것은 중지돼야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논리이다. 그 가운데 있는건 시장을 둘러싼 전술과 약탈이다. 그 시장이 멋진 스타들과 호화찬란한 화면과 첨단시설로 둔갑한 영화관들로 인해 아늑하고 안락한 취미처럼 보이지만, 당신이 영화관에 입장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입장료는 그 누군가의 소금으로 얻어진 것이다. 당신의 주머니를 노려 서로 다투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툼으로 인해 당신이 선택권을 빼앗기고 이미 결판이 난 싸움판에 초대되는 것은 강요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선택은 무슨 영화를 볼 것인가가 아니라 영화를 보든지 말든지라는 매우 폭력적인 논리가 판칠 뿐이다. 실제로 인터넷에 들어가 주말영화 목록을 열어 보라. 서울 시내 147개의 영화관에서 고작 서른 편 남짓한 영화들을 상영하고 있을 뿐이다. 147개의 즐거움 대신 고작 30편의 영화가 시장을 장악하고(그 중에서도 너댓 편의 영화가 4분의 3 이상을 차지한다) 우리들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그 참담한 목록은 영화관이 이미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이 아니라 시장바닥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과 휴식 그 모두로부터 빼앗긴 권리를 찾기 위해 시야를 넓혀 주위를 돌아보아야 한다. 당신은 그 기록을 세워주기 위한 입장권이 아니라 영화를 보며 울고 웃고 박수를 치는 따뜻한 피를 가진 인간이다. 영화관의 독점으로부터 우리들의 선택권을 빼앗아오는 일은 우리들의 권리이다. 몇 편의 영화가 영화관을 독점하는 일은 당장 중지되어야 한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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