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9월 2001-09-01   1651

자살테러, 강간, 끝없는 스리랑카 종족분쟁

자살테러, 강간, 끝없는 스리랑카 종족분쟁

천혜의 백사장과 푸른 바다가 매력적인 땅, 스리랑카. 그러나 이곳엔 싱갈리족과 타밀족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 땅에 폭력이 그치고 평화를 움트게 할 방법은 없는가.

인도대륙의 남동쪽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나라 스리랑카로 가보자. 인구 2000만의 이 나라는 세일론 차로 널리 알려져 있고, 1972년까지는 나라 이름도 세일론(Ceylon)이었다. 천연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이 나라에는 전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든다. 그러나 이 나라가 앓고 있는 병은 심각하다. 원주민인 싱갈리족(Singhalese)과 인도에서 주로 영국 식민지 시대에 차(茶) 재배를 위해 강제 이주돼온 타밀(Tamal)족 간의 불화가 바로 그것이다.

2000년 통계에 따르면 스리랑카에 대한 외국인 투자 총액이 2억1000만 달러에 이른다. 그 중에 가장 많은 프로젝트를 갖고 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니 우리도 이들의 고민을 이해하고 이 나라의 평화정착과 인권신장을 도와야 할 책무가 있지 않을까.

스리랑카의 운명은 서구 식민세력의 성쇠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 나라에는 6세기까지 3개의 왕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북쪽의 타밀족을 중심으로 한 왕국, 고원지대에 자리잡은 켄디 왕국, 콜롬보 해안을 중심으로 한 왕국이 그것이다. 켄디 왕국과 콜롬보 왕국은 싱갈리족의 것이었다. 1505년 최초로 포르투갈이 침공하여 콜롬보 왕국을 점령하고 무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톨릭교를 전파했다. 이 세력은 약 150년 동안 번성한 후 1650년 네덜란드에 자리를 내주었다. 네덜란드 해상세력은 콜롬보 왕국과 북쪽의 타밀 왕국을 점령하였다. 세 왕국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켄디의 싱갈리 왕조는 1802년 대영제국이 스리랑카의 새 주인으로 군림하면서 막을 내렸다. 마지막 주인인 영국은 세일론 차를 개발, 증산하기 위해 인도의 타밀나두에서 건강한 일꾼들을 강제 이주시켜 원주민인 싱갈리 족과 분리통치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아무런 해결책 없이 홀연히 섬을 떠나고 말았다.

여성들에 대한 집단강간과 어린이들의 군인화

세일론 차를 재배하러 온 타밀족은 힌두교를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가 약간 있다. 원주민인 싱갈리 족은 대부분 불교를 믿고 있어 종족 갈등에 종교 갈등까지 더한 실정이다. 양 종족 간의 갈등은 급기야 1983년 폭발하고 말았다. 정치적 권리를 독점하다시피 한 원주민이 상권을 독점하고 있는 소수의 타밀족을 공격했다. 그들의 상점을 부수고 싱갈리 언어를 국어로 선포했으며 타밀족 말살정책을 썼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으로 지금까지 양 종족에서 100만 명 가까운 희생자가 나왔으나 화해의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고 있다.

지역적으로 보면 원주민들은 스리랑카 제2의 도시인 북쪽의 자프나 항구를 제외한 전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타밀족은 자프나 시의 동부 트링코말리를 중심으로 살고 있어서 이 도시는 정부의 주공격 대상이 되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 1983년 여름의 원주민 폭동은 타밀족으로 하여금 독립전쟁까지 준비하게 했고, 사실상 자프나를 중심으로 그 같은 계획을 진행하였다.

소수인 타밀족의 자치계획은 그들이 억눌림을 당하는 희생자의 처지였기에 1990년대 초까지 국제적인 동정을 사기에 충분했다. 인도는 1987년부터 1990년까지 3년 간 3000명의 평화주둔군을 스리랑카에 파견해 평화를 모색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스리랑카의 인종 갈등은 국내문제”라며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타밀 분리주의자들은 더 과격해져 타밀독립 호랑이 해방군(LTTE :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1993년 당시 스리랑카 수상인 프레마다사(Premadasa)를 자살테러로 암살하였다. 이보다 앞서 1991년 5월에는 선거 유세중이던 인도의 전 수상인 라지브 간디가 타밀 분리주의자들의 자살테러로 암살당하였다. 1990년부터 1996년까지 6년 간 타밀 분리주의자들은 자프나 시를 점거하여 사실상 통치했다. 1994년 현 대통령인 쿠마라퉁가 여사의 자프나 시 탈환을 위한 전쟁선포로 양 종족 간에 집요하고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3000명의 양측 군인들이 희생되었다. 그 외에 여성들에 대한 집단강간, 어린이들의 군인화 등으로 그 비참함은 극에 달한다.

합리적인 대화로 평화 쟁취해야

결국 1997년 자프나 시는 정부군에 넘어갔고 타밀 분리주의자들은 점점 과격한 테러집단이 되어갔다. 1997년 민간여객기를 폭파해 75명의 승객을 살해했고, 지방도시의 시장을 암살했다. 스스로 폭탄을 안고 뛰어들어 죽음으로써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행위는 그들에게 동정심을 품고 있던 국제사회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했다.

테러집단의 만행을 응징해 달라는 쿠마라퉁가 대통령의 호소는 남아시아 협의체(SAARC: South Asian Asso- ciation for Regional Cooperation) 회원국들의 호응을 얻었다. LTTE의 해외본부가 있던 유럽도 등을 돌리자 타밀 분리주의자들은 본거지를 남아프리카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스리랑카 대통령에게 설득당한 넬슨 만델라 당시 남아프리카 대통령이 타밀족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우리는 이 끝없는 폭력의 드라마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아무리 억울한 호소도 폭력화하면 아무도 동정하지 않는다는 진실 말이다. 타밀족의 자치에 대한 염원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국제사회는 초기에 그들을 ‘자유를 위한 투쟁군(Freedom Fighter)’으로 불렀다. 그러나 그들이 민간인을 인질로 잡고 민간 여객기를 폭파하고 자살테러를 일삼자 국제사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세계는 요즘 이들을 ‘타밀 테러집단(Tamil Terrorists)’이라 부르고 있다. 물론 LTTE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양분되어 있고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듯 강경파가 실권을 쥔 채 테러를 지휘하고 있다.

평화적인 방법, 대화를 통한 합리적인 해결책의 모색은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결국 승리한다는 교훈을 놓쳐서는 안 된다.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서든, 인권 또는 집단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서든 그 어느 경우도 폭력이란 방법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전쟁으로 성취된 평화는 온전한 평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패자는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대화를 통한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도 우리는 여기서 배워야 한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거리에 나와 폭력과 화염병으로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들 때는 국민이 등을 돌리게 되고, 결국 노동자들의 주장은 관철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우리는 주위에서 보고 있다. 평화적인 시위, 그리고 합리적인 대화야말로 인권을 신장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하나뿐인 방법이다.

박경서 인권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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