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9월 2001-09-01   455

주정부 법안 제출·거부권 행사

제3의 길 모색하는 연방의회의 분권·자치 모델

녹색당과 사민당의 연정으로 제3의 길을 걷고 있다는 독일. 그들의 연방평의회까지, 엄격한 입법과정을 거쳐 각 주의 분권과 자치를 충실히 보장하고 있는 그들의 정치제도를 직접 찾아가 살펴보았다. 편집자 주

독일의 첫 인상은 ‘친절함’이었다. 독일 국적항공사 루프트한자의 여승무원이 보여준 기내서비스는 제주도에도 한번 가보지 못한 필자에게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지겹지 않도록 해줬다. 독일 에버트재단의 연수 초청을 받아 처음 경험한 장시간 비행은 비행기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에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까지 더해져 흥분의 연속이었다.

분권과 연방주의 정신 녹아있는 정치제도

연수기간 내내 받은 강렬한 인상은 독일 사회가 매우 환경친화적이라는 점이었다. 거의 모든 거리에 자전거 도로가 있었으며, 버스, 기차 등 대중교통 시설에는 어김없이 자전거와 함께 탈 수 있는 칸이 마련되어 있었다. 독일 도시의 하늘이 왜 그토록 맑은지는 배기가스를 내뿜지 않는 전차와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은 커다란 숲을 보고나니 이해가 됐다. 또 재활용이 가능하도록 생수는 페트병이 아니라 유리병에 담아 판매하고 있었다. 호텔 식당 등의 화장지는 예외없이 재생지로 만든 것들이었다. 환경단체의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미 독일 시민들 가슴에는 환경에 대한 인식이 뿌리를 깊이 내렸으며, 이런 사회분위기는 녹색당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녹색당이 연정을 통해 슈뢰더 정부에 참여함에 따라 독일의 환경정책은 원전폐쇄 정책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 어느 나라보다 앞서가고 있다.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하던 며칠이 지나자 독일 사회의 특징이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독일 정치제도에는 지방자치와 연방주의 정신이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독일의 입법과정과 선거제도는 지방자치와 연방주의가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독일 연방의회의 입법과정은 상당히 복잡하다. 법안 제출 이전 단계에서부터 관계기관과 의견을 조율하고, 연방의회에서 3심을 거친다. 독일 입법과정의 두드러진 특징은 주 정부에서 파견한 대표로 구성된 ‘연방평의회(Budestrat)’가 법안 제출권과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로 치면, 광역시장·도지사가 파견한 대표가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나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셈이다. 이런 복잡한 과정 때문에 법안이 원안대로 통과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처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단점이긴 하다. 하지만 강점도 있다. 연방평의회 등을 통해 주정부와 충분히 협의한 뒤 통과된 법안은 집행에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입법권도 연방의회와 주의회에 나뉘어있다. 연방의회는 외교, 국방, 통화 등 큰 틀의 법률안을 제정하고,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입법은 주 의회에 맡겨져 있다. 연방의회의 입법과정에 각 주의 의사를 반영하는 제도에서 오랜 세월 다져온 자치와 연방주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권자 의사 전폭 반영되는 선거제도

독일의 선거제도는 “1인 2표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이다. 독일 연방의회 의원은 총 656명. 이 가운데 328명은 지역구에서 다수대표제로 선출된다. 유권자는 지역구 후보에게 첫 번째 투표권을, 각 정당의 주(州) 명부를 대상으로 두 번째 투표권(정당투표)을 행사하며, 최다득표자 1인이 지역구 의원이 된다. 여기까지는 우리와 비슷하다. 하지만 정당별 투표에 따른 의석배분은 우리 선거제도의 전국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뤄진다. 각 정당의 의석은 지역구에서 선출된 의석수가 정당득표율로 환산한 의석수에 못 미칠 경우 정당득표율에 따른 수만큼 주(州) 명부의 서열에 따라 채워준다. 예컨대 전체 의석이 100석이고 A정당이 지역구에서 15석을 얻었으나 정당득표율이 20%라고 가정하자. 국민적 지지도인 정당득표율로 보면 이 정당은 20석을 차지해야 하지만, 지역구에서 15석밖에 얻지 못했다. 이 경우 주 명부의 서열에 따라 5석을 채워준다는 것이다. 반면, B정당이 지역구에서 22석을 얻었는데 정당득표율이 20%라면 이 정당은 정당명부에 따른 비례대표는 없다. 하지만 지역구에서 당선된 22석은 인정된다. 이 때 정당득표율을 초과한 2석을 `‘초과의석’이라 한다.

독일 정치 통해 본 한국 정치의 개혁방향

독일이 다소 복잡한 선거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유권자의 의사를 선거결과에 고스란히 반영하기 위한 고려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유권자가 하나의 투표권만을 행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비례대표(전국구)를 배정할 경우, 유권자의 의사가 왜곡되고 사표(死票)가 발생한다. 즉 1등 이외의 후보자에게 투표한 유권자의 의사는 철저히 무시되는 것이다. 민주적 선거제도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핵심요소다. 여기서 ‘민주적’이라는 것은 각 후보자들 사이의 차별 없는 경쟁을 보장하고 유권자의 의사가 정확히 반영되는 것을 의미한다.

연수 과정에서 ‘앙케이트 커미션’이라는 연방의회 산하의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루드비히 포트 AWO(Arbeiter Wohlfahrt 노동자복지) 연방회장과 클라인 박사(Dr. Ansgar Klein) 등 두 명의 전문가를 만났다. 얼핏보면 우리나라의 특별위원회와 비슷하지만, 그 구성과 활동에 있어서는 퍽 달랐다. 독일 연방의회 산하에는 5개의 앙케이트 커미션이 있다. 에너지 문제·민주화의 변화·유전공학·세계화·시민사회 참여의 미래 등이 그 커미션의 활동분야다. 각각의 커미션은 연방의회 의원 11명과 민간 전문가 11명 등 총 2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만난 전문가들은 ‘시민사회 참여의 미래’ 앙케이트 커미션 소속이었다. 이 커미션은 독일식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클라인 박사는 “앙케이트 커미션 안에서 연구하고 논의한 내용을 관련 위원회에 통보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말했다. 앙케이트 커미션은 사회 정치 문제에 자발적으로 나선다는 의미로 “스스로 돕는다. 스스로 나선다. 명예(무보수)로 한다”를 구호로 내세우고 있었다. 이처럼 의회를 중심으로 독일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 인상깊었다. 당장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준비하는 독일의회와 우리 국회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비록 제한된 시간이었지만, 독일 정당과 의회를 방문해 그들 정치제도에 스며 있는 자치주의 원칙과 미래사회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각 국가의 정치제도는 그 나라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민주적인 제도는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제도는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지금 한국의 정치현실이 그렇다.

독일의 정치제도가 우리에게 모범답안은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미래사회를 준비하는 독일 의회와 그네들의 민주적인 정치제도가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강준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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