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1월 2002-12-30   1108

내가 귀틀집에 사는 이유

조치원으로 살러 가기까지


참여사회』에서 1년치 연재를 주문했을 때 “한 번은 되겠지만 12번은 솔직히 자신없다”고 거절했다. 그런데도 이리저리 구슬리는 바람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12번 쓸 걱정이 태산이다. 그런데 일단 슬슬 얘기하다 보면 자꾸 새로운 얘기가 나올 것 같다는 희망도 있다. 따지고 보면 사람 사는 일이 항상 완벽한 계획을 세운다 해서 척척 진행되기보다 일단 ‘저질러 놓고’ 수습하다 보면 풀려 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이런 무책임한 말을 하다니…).

내가 99년 조치원읍에 들어와 귀틀집을 짓고 살게 된 결정적 계기는 97년 봄 고려대 서창캠퍼스에 조교수 자리를 얻게 되면서부터였다. 사실 난, 예전 직장인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별로 사랑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노동부가 원하는 내용의 연구 결과를 만들어내지도, 정책적 뒷받침을 잘 해주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내가 가진 세계관이나 노동관이 노동부와 많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특히 96년 말, 집권 여당이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한 뒤 온 사회가 시끄러웠다. 노동자의 전국적 저항은 마치 혁명 전야를 기대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개정 노동법이 무엇이 문제인지 시청자에게 알리려는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 해갔다. 나는 솔직하게 개정 노동법이 노동자의 노동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뉴스가 나가고 난 뒤 노동부 장관실에서 연구원으로 전화가 왔다고 한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당시 원장은 나더러 “자꾸 그런 식으로 문제 일으키면 곤란하니, 학교로 가지 그래?”하며 다른 기회를 찾아보라고 암시했다. 서운했지만 나는 적극적으로 ‘신규 교수 채용’ 칸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조치원에 오게 된 것이다.

취직해서 열심히 일했더니…송장 되더라?

조치원으로 근무지를 옮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나는 이번이야말로 수도권을 벗어날 때가 아니냐고 자문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가 살던 과천은 언론 등에서 주거지 만족도 전국 1위를 다툴 만큼 쾌적한 곳이었다. 하지만 푸른 나무들과 공원 사이로 언뜻언뜻 들어오는 시멘트와 아스팔트 덩어리의 대형 아파트촌은 뭔가 불만족스런 냄새를 갈수록 진하게 풍겼다. 특히 아침저녁으로 막히는 도로교통은 더러워지는 공기와 함께 삶의 스트레스를 고조시켰다. 드디어 나 뿐 아니라 애들을 위해서라도 떠날 때가 되었노라 다짐했다.

그런데 막상 떠나자니 여러 걱정이 앞섰다. 나 자신을 비롯해서 사람들은 대개 시골의 전원생활을 꼭 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현실적’ 여건 때문에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꾸만 그 꿈을 ‘뒤’로 미룬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일단 저질러야’ 뭔가 된다. 물론 계획을 세워 철저히 준비한다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너무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아무 것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몇 가지 생각은 확실히 정리해야 시골로의 ‘존재 이전’이 가능하다.

우선은 직장 문제다. 대개는 직장 구하느라 서울로, 도시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봉화에서 강아지와 함께 사는 전우익 어른이 말하듯, “편하게 살겠다고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간 결과” 결국 남은 것은 “눈에 쌍심지 돋우고 분초 다투며 산 끝에 다들 나가떨어지는” 것밖에 없다. “서울 가면 큰 수나 날 줄 알고 몰려갔”지만 “취직해서 열심히 일했더니 과장, 부장, 사장 된 다음 송장이 되더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따라서 직장은 도시든 시골이든 가리지 말고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좋다. 도시에 살더라도 뜻이 맞는 사람들과 뭉치면 공동체마을까지 설계할 수 있다. 또 만일 마음에 드는 직장이 지방에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옮길 필요가 있다. 나아가 생명산업, 즉 농업을 살려내야 한다. 제발 ‘농산물 수입하는 대신 핸드폰 많이 팔면 되지 않느냐’는 평면적 사고방식은 그만 했으면 한다.

진정 교육을 생각한다면 시골로 가야한다

다음으로 골머리를 앓는 문제는 교육이다. 나는 제 아무리 교육부 장관이 바뀌고 입시제도가 바뀌더라도 우리 자신 즉 학부모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고 믿는다. 우리 자신의 주체적 문제는 무엇인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일류대학 강박증, 두 번째는 조급성, 세 번째는 옆집 아줌마(?) 이야기다. 애들 교육 때문에 수도권, 도시권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면에는 솔직히 ‘우리 아이는 일류대를 나와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다. 그러나 수도권에 산다고 일류대를 가는 것도 아니요, 일류대 간다고 취업이나 행복의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옆집 아줌마’ 만나 커피 한 잔만 같이 하면, ‘아이쿠, 이럴 일이 아니지. 내가 나중에 아이한데 원망 듣지 않으려면 남들처럼 학원 보내고 과외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줏대를 세워야 한다. 진정한 교육은 아이들이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갈 태도와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다음은 역시 배우자의 동의다. 만일 배우자가 깔끔하고 세련되며 각종 문화적 혜택(쇼핑 포함)이 많은 도시생활을 좋아한다면 시골 전원생활은 어렵다. 그런데 곰곰 따져보면 우리는 자신의 편리함과 욕심을 추구하느라 건강한 인간관계는 물론 자연 생태계를 망가뜨릴 뿐 아니라 결국은 자기 자신마저 망친다. 그래서 간편주의나 외형주의의 덫으로부터 빠져 나와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도시를 떠날 수 있다.

사람들은 조치원이 ‘발전’되지 않아 안타깝다고 하지만 나는 그래서 더 좋다. 평화롭고 여유가 있으며 공기 맑아 좋고 차가 막히지 않아 좋다. 최근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당선자가 ‘행정 수도’ 이전을 공약했는데 나는 제발 그것이 ‘제2의 서울’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으면 한다.

또 나의 경우 아이들 교육문제는 일류대 강박증과 조급증을 버리면서 해결되었다. 아이들은 강아지와 닭, 고양이와 친구처럼 지낸다. 뒷산의 청설모, 가끔 나타나는 노루, 강아지 밥을 훔치러 오는 까치들, 나무 홈 속 벌레 잡는 딱따구리, 연못 안 우렁이, 이 모든 게 아이들의 친구이자 학습거리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시골에 산다면서 텃밭을 넘는 수준의 농사일도 못하고 있어 뭔가 죄짓는 기분이다. 그나마 올해 78세 되시는 어머니께서 앞장서서 하시니까 망정이지. 그래서 아직도 나의 시골생활은 문제 투성이다.

강수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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