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1월 2002-12-30   1069

고종석-서얼단상 :60억의 개인에게는 60억개의 진실이있다

일찍이 강준만은 그의 역저 『전라도 죽이기』에서 “타지역 사람 중에 호남차별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사람은 모든 종류의 차별에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떤 종류의 차별이든 그 차별의 기저를 관통하고 있는 정신을 폭로하고 교정하면 다른 분야의 차별도 저절로 사라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이렇게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다. 예컨대 “남성 중에 여성 차별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은”, “비장애인 중에 장애인 차별에 분노하는 사람은”, “이성애자 중에 동성애자 차별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은”, “적자 중에 서자 차별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은”… “모든 종류의 차별에 분노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을 ‘서얼’이라는 보통 명사를 매개로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이주노동자와 같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 보편으로 확장하고 있는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 적자/ 한국인 고종석은, 비록 ‘타지역 사람’은 아니나 역시 “모든 종류의 차별에 분노하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고종석 자신의 고백을 빌자면, 그가 적자(타 지역 사람)의 눈을 지녔다면, 세상에 서얼(전라도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서얼 단상』의 기저를 흐르는 서얼의 시선, 혹은 보다 구체적으로 ‘전라도 사람’의 자의식은 『전라도 죽이기』에서처럼 “차별의 기저를 관통하고 있는 정신을 폭로하고” 그것에 대해 ‘분노’하는 데서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조선일보』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최초로 일깨워 준 공로가 강준만에게 있다면, 그뿐이 아니라 미적으로 아름답지도 못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최초로 느끼게(!) 해 준(비록 진중권이 좀더 명징한 논리로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공로가 고종석에게 있으리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자신의 자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서얼’들에게로 확장되었던 ‘성찰’의 시선은, 모든 성찰이 근본적으로 그러하듯이 궁극적으로 다시 그 자의식을 최후의 겨냥점으로 삼아 되돌아온다.

강자에 대한 약자의 너그러움은 비굴함일 뿐

그래서 고종석의 글은 『조선일보』라는 ‘뜨거운’ 화두를 정면에서 응시하면서도, 그런 종류의 글에서 흔히 ‘화끈함’을 기대하곤 하는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실망할 만큼이나 미적지근하다. 그러나 바로 그 ‘따뜻함’(!)이야말로 그가 애당초 ‘서얼’의 시선에서 출발하였기에 가능한 미덕이다. 예컨대 자신이 『조선일보』에 글을 안 쓰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그 ‘영혼의 순결함’ 때문이 아니라 알량하나마 자신에게 부여된 물질적 조건이라는 진솔한 고백으로부터,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조선일보』보다 더 커다란 악과 싸우는 데 열중해 있는 이웃들에게 『조선일보』쪽으로 관심을 집중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자신에게 없다는 정직한 성찰에 이르는 과정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조선일보』의 ‘아름답지 못함’에 극명하게 대비되거니와, 그러한 성찰을 매개하는 “모든 개인에게는 그 자신만의 진실이 있다”는 명제는 사회적 소수자(=서얼)로서의 시선이 ‘궁극적 소수’인 ‘개인’에 치달은 결과 얻어진 ‘전라도 사람’ 자의식의 빛나는 결정체일 것이다(오해하지 말지니, 그가 개개인의 삶의 진정성에 너그럽다고 해서 구조악에까지 너그러운 것은 결코 아니다. “강자에 대한 약자의 너그러움은 비굴함일 뿐”이라는 통렬한 지적 또한 서얼의 시선에 포착된 진실의 한 단면이다).

나아가 “『조선일보』 애호가 그렇듯, 『조선일보』에 대한 적대의 피륙도 더러는 누추하고 황폐한 욕망과 변덕의 날과 씨로 짜여져 있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은 슬픈, 더 나아가서는 오싹한 일이지만, 그것을 우회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다”라는 뼈아픈 일침은 그의 『조선일보』에 대한 반대가 단지 『조선일보』만이 아니라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모든 『조선일보』적인 것에 대한 강력한 반대임을 시사한다. ‘서얼’의 눈에는 ‘서얼’의 존재를 무화시키려는 모든 것이 그가 대항해야 할 ‘적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중앙을 넓혀 변방 없는 세상을 가꾸겠다”는 고은광순의 소망을 뒤집어 “변방을 넓혀 중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으로 다시 곱씹어낸다. “모두가 서얼인 세상, 모두가 소수인 세상, 모두가 궁극적 소수 곧 개인인 세상은 아무도 서얼이 아닌 세상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 세상은 “혁명에 대한 열정이 넘쳐나는 세상이 아니라, 반동에 대한 경계와 조화에 대한 배려가 미만한 세상”이다. 기쁨을 키우는 세상은 아닐지라도 슬픔을 더는 세상을 소망하는 그에게서, 나는 미처 ‘기쁨’을 품어보기도 전에 ‘슬픔’을 느껴 본 적이 있는, 그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만이 교감할 수 있는 ‘서얼’의 시선을 어김없이 감지한다.

유토피아는 꿈꾸는 자의 마음에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그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기획이 포기된 세상”조차도, 매우 ‘슬픈’ 일이지만 내게는 여전히 멀기만 한 (또 다른 의미의) ‘유토피아’로 보이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집단주의의 유토피아가 (그것이 ‘유토피아’인 한) ‘기쁨’을 키워주지 못하듯이 개인주의의 유토피아 역시도 (그것이 ‘유토피아’인 한) ‘슬픔’을 덜어주지는 못할 것이다. 허나 누군가의 말을 빌자면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한다”면, ‘전라도 사람’인 그와 마찬가지로 ‘서얼’의 ‘슬픔’을 숙명처럼 짊어진 내 마음 속의 유토피아 또한 그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으리라고 기꺼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려나 고종석의 사유의 결을 따라 읽어 가다 보면, (적어도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극소수의 특권층이 아니라면) 자신 역시도 삶의 어느 영역에서는 어김없이 ‘서얼’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 깨달음이 주는 첫번째 미덕은, 누구나 부인하고 싶고 감추고 싶게 마련인 삶의 누추한 구석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미덕은, 그러한 자기 긍정을 자신과 실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이웃들에게로 확대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성별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남성과 여성을 확연히 나눌 수 있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구분선은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기실 그렇게 적서를 가르는 무수한 구분선에 의해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적어도 어느 한 측면에서는 ‘서얼’일 수밖에 없는 개인으로 분할될 것이며, 바로 거기에서 “60억의 사람들이 가진 60억 개의 진실”이 그 어떤 집단의 호명에 의하지 않고도 그 자체로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이 확보될 것이다.

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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