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1월 2002-12-30   1098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신년 야간산행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동행자를 구했지만 무모한 야간비행이라도 되는 듯 다들 야간산행을 꺼렸다. 그러던 차에 내 유혹에 솔깃 하는 친구가 나타났다. 때는 대선 직후, 문우들끼리의 조촐한 송년회 자리였다. 그 날의 화두는 대통령 당선자의 능력 발휘에 쏠렸다. 나의 야간산행에 한 표를 던진 그 친구는 나보다 더 그것을 꿈꾸었던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열렬했다. 나중에 이유를 묻자 내 이야기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나는 그 친구의 호응에 고무되어 만나는 사람마다 새해 인사 대신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라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즐겁게 들려주었다.

파리 몽마르뜨 언덕에 매우 선량한 한 사내가 살았다. 사내에게는 벽으로 드나드는 특이한 능력이 있었다. 사내는 그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으로 여겨 동네 의사를 찾아가 그 증세를 없애줄 것을 부탁했다. 의사는 ‘갑상선 협부 상피의 나선형 경화’라는 해괴한 병인(病因)을 들어 처방을 내렸다. 과도하게 체력을 소모할 것과 쌀가루와 켄타우루스 호르몬의 혼합물인 알약을 일년에 두 번 복용할 것을 권했다. 사내는 알약 한 알은 먹고 나머지는 한 알은 서랍에 보관했다. 그러나 문제는 체력 소모였다. 등기청의 하급 직원인 그의 공무는 도무지 과로를 용납하지 않았고 마흔 네 살의 독신자인 그에게 여가라고는 신문 읽기와 우표 수집이 전부였다. 그러니 일년이 지나도 그의 능력은 남아 있었다.

그후 사내는 어떻게 되었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내는 벽을 드나들다가, 결국 벽이 되었다. 대도(大盜)가 되어 대형 은행을 내 집 안방 드나들 듯 휩쓸고 다니기 전, 아니 자신을 퇴물 취급하는 신임 상사를 벽을 뚫고 출몰하며 골탕먹이기 전, 그러니까 벽을 드나드는 기쁨을 맛보기 전, 사내는 자신의 능력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한번쯤 전 존재를 뒤흔드는 회오리바람을 피할 수 없는 법. 그것이 세속적인 인정의 욕구이든 지극히 사적인 사랑이든 무엇이든. 처음엔 상사를 골탕 먹이려던 것이 통쾌하게 성공하자 그는 새로운 힘이 용솟음치는 희열을 맛보았다. 그는 자기 능력을 온전히 사용하고 자기 한계를 뛰어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은행과 보석상을 털고는 애교처럼 가루가루(늑대인간)라는 가명을 남겨놓았다. 그는 순식간에 언론과 대중의 우상으로 떠올랐고, 어디가나 가루가루 이야기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루가루임을 밝히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인정의 욕구를 누르지 못하고 어설픈 도둑질을 연출하여 경찰에게 잡혀주지만 그에게 감옥의 벽이란 한갓 놀이감에 불과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일도 한두 번이면 족했다. 시들해진 사내는 새로운 모험에 이끌렸다. 마침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상대는 한눈에 혼을 빼앗아갈 만큼 아름다웠지만 의처증이 심한 남편을 만나 밤이면 집에 갇혀 홀로 지내는 가엾은 여자였다. 밤동안 너무 과격하게 사랑에 힘을 쏟은 나머지 사내는 격렬한 두통을 일으켰고, 엉터리 의사가 처방해준 알약을 실수로 먹고 말았다. 과도한 체력 소모와 알약, 황당하게도 그것이 효과를 일으켜 사내는 벽을 통과하다가 벽 속에 갇혀버렸다.

나는 야간산행을 위해 헤드라이트를 갖춘 광부용 핼멧를 구했다.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깊이 감동한 친구와 어둠을 헤치며 겨울 산을 오를 생각에 잠을 설쳤다. 실수로 발목을 잡히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었다. 산을 오르며 온전히 자기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동행자와 차근차근 따져볼 일이었다.

함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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