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그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 유철희 회원

 

그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철희 회원

 

 

글.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사진. 김경희 미디어홍보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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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막 여행에서 돌아왔다는 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두터운 겨울옷을 입은 채 그가 향한 곳은 한여름의 태양으로 가득한 뉴질랜드. 아내와 아이들 없이 처음으로 혼자 떠났다던 그의 여행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제가 지금 오춘기가 왔어요. 딱히 여행을 잘 다니는 편은 아닌데, 신혼여행을 호주로 갔었거든요. 그때 생각도 나고 문재인 대표가 대선 실패하고 나서 뉴질랜드로 떠났다던 것도 기억나고 그래서. 괴로운 거죠, 인생이….”

우리나라 시집의 주독자층이 40대 남성이란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미처 태양빛에 그을리지 않아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의 이마 끝을 바라보며 그도 시집을 샀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마흔 즈음에
그의 직업은 프리랜서 강사. 큰 학원에서 재수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소속된 학원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수능이 끝난 지금이 비유하자면 농한기인 건가요?
“보릿고개죠. 수입은 없고 돈 들어갈 덴 많고, 하하하”

그래도 열흘 남짓 훌쩍 떠날 수 있다면 무척 여유로운 삶이란 생각이 들었다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대학 때까지는 영화광이었는데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아무 것도 못했어요. 몇 년 전까지 새벽 6시 30분에 집에서 나와 밤 12시, 1시에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했죠. 결국 몸이 망가지더군요.”

몸까지 아프니까 더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여유와 너그러움이 사라진 자리는 짜증으로 채워졌다. 잦은 부부싸움, 늘어만 가는 아이들의 불만. 그러나 그가 오춘기라 부르는 이 혼돈의 시기는 단지 일상의 팍팍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회사 다니다가 서른 살 넘어 그만두고 학원가로 왔어요. 대형 학원에서 밤낮없이 일만 했었는데 마흔 쯤 되었을 무렵 갑자기 일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학원가는 정말이지 정글이에요. 자기가 잘 나가면 다른 사람이 죽죠. 파벌 싸움 같은 것도 있는데 제가 그런 걸 굉장히 싫어하거든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성격. 참여연대에 가입한 이유 또한 이런 자신의 성향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윗사람한테 아부를 잘 못 해요. 상황에 맞춰서 적당히 덮을 건 덮고 그래야 조직생활이 가능한 건데, 그런 게 체질적으로 안 맞아요. 회사를 그만 둔 것도 이런 제 성향 때문이죠. 대기업 기획팀에서 일했는데 어느 날 잘못된 것을 발견했어요. 그대로 두면 신규채용 인력들이 해고될 것 같아 윗선에 보고하고 구조조정본부에 신고도 하고 그랬는데도 해결이 안 되더군요. 결국 부장하고 회의 도중에 대판 싸우고 나왔죠.”

 

도가니 
그의 오춘기를 더듬더듬 쫓아가다보면 또 하나의 사연이 나온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나면서 가세가 갑자기 기울었어요. 부모님이 모두 병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의대에 가고 싶었는데 결국 돈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죠. 결혼하고 나서도 일만 했어요. 다시 한의대에 입학한 아내 학비도 벌어야 했고 두 아이의 뒷바라지도 해야하니까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죠. 계속 이런 일상들이 쌓이다 보니까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본적인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 세상과 영화 한 편 볼 틈 없는 빡빡한 일상. 그 사이에서 건조해져만 가는 관계들. 때때로 인생의 큰 줄기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방향을 틀어버렸고 가지 못한 길을 향한 미련은 짙어져만 갔다. 녹아내릴 것만 같은 몸과 마음, 그럼에도 놓을 수 없었던 남편과 아빠로서의 무거운 책임들. 그의 오춘기는 이 모든 것들이 섞여서 펄펄 끓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도가니일 것이라고, 나는 감히 짐작했다. 
“원래 술을 안 먹었었는데 오춘기가 오고 나서 처음 1년은 스트레스 때문에, 최근 1년은 고민 때문에 술을 마셨어요.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까…. 시민운동 쪽에도 관심이 많거든요. 앞으로 10년 내에 가족들 먹고 살 거 모두 마련해 놓고 이후엔 교육이나 법률 분야와 관련된 사회운동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

사회 참여에 대한 진한 갈증을 그는 후원으로 푼다. 그렇게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대신하고 있는 이들에게 힘을 보태고 싶기 때문이다. 
“처음엔 아들과 딸 이름으로 유니세프랑 참여연대에 가입했어요. 제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기도 했고 아이들한테 삶에 대한 태도를 가르쳐 주고 싶었거든요.”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그와 아내까지, 그의 가족은 모두가 참여연대 회원이다. 
“<참여사회>에서 가장 관심 있게 보는 게 수입지출 내역이에요. 참여연대는 정부보조금을 받지 않잖아요. 그게 어떤 면에서 보면 참여연대의 한계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돈이 있어야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늘 걱정이죠. 수입의 얼마를 딱 정해놓고 회비를 증액하자고 생각해서 거의 매년 회비를 증액해 왔어요. 솔직히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는 세금 내기도 싫거든요.”

그가 처음 참여연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소액주주운동’ 때문이었다. 사회의 온갖 잘못들, 구조적으로 저질러지는 문제에 대해 누군가는 지적하고 바로 잡아줘야 하는데 참여연대가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 
“제가 뭐 대단히 진보적인 사람도 아니지만 세상은 제발 상식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이고 작은 문제들 말고 큰 틀에서 제대로 시스템을 잡아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간 저도 그런 일에 동참하고 싶어요. 일상에 좀 여유가 생기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참여연대에서 자원 활동을 하고 싶기도 하구요.”

그의 가족도 이번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광화문에 섰을 때 그가 떠올린 20년 전의 기억 하나. 
“1995년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 터졌을 때 동기들하고 데모를 했었는데 그때 신촌 로터리에 대자로 누워있었던 게 불현 듯 생각나더군요.”

청산되지 않은 과거, 죄를 묻지 못했던 과오들. 그가 분노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가르치는 일 
사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가장 힘든 건 뭔가요?
“계층 이동의 마지막 수단이 교육이잖아요. 근데 요즘은 가난한 집 아이들일수록 공부를 더 안 해요. 반면, 대치동 아이들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주변 인맥이나 부모가 가진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적 기회를 점점 키워가고 있죠. 이런 구조적 모순을 강화시키는 데 내가 한몫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 그게 가장 힘들어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취약계층 아이들의 교육과 관련한 일을 해 보고 싶은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죠.”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이지만 그 사이에서 인간적인 무언가가 형성되긴 어려웠다. 아이들은 공부만 열심히 했지 목표의식이 약했다. 그조차 자신의 것이 아니라 부모의 가이드라인일 뿐이었다. 너무나 오래 방치되어 온 우리 아이들의 문제, 그는 해답을 알고 있을까?
“결국 공교육이 정상화돼야죠. 공교육의 질이 낮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이 사교육 시장으로 몰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학교 교육의 질을 높이려면 우선 선생님들의 처우가 좋아져야할 것 같아요. 잡무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하구요. 사명감도 중요하지만 피땀 흘려 일한 것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 사람들이 움직이거든요. 또 뒤처지는 아이들을 위한 수준별 수업도 필요하구요. 지금의 시스템에선 결국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피해를 입게 되거든요.”

오랜 시간 아이들을 가르쳐온 사람답게 그의 대답은 길게 이어졌다. 나 또한 두 아이의 엄마로서, 공교육과 사교육 양쪽 모두의 수요자로서 이런저런 의견을 전했다. 그러나 교육에 대한 대화는 늘 긴 한숨으로 마무리된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2017년 새해 소망을 들으며 그와의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제 안의 열정이 죽어버린 거 같아요. 제 사주를 보면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발목 잡는 것 또한 많대요. 이 괴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2017년엔 마음만 있고 행동하지 못했던 것들을 열정을 가지고 한번 실천해 보고 싶어요. 두 번째는 가족관계를 복원하고 싶어요. 제 나름대로 노력한다고는 했는데 일에 쫓겨 제 스스로 여유가 많이 없었어요. 앞으로는 애들이랑 더 많이 시간 보내고 싶구요, 아내에게도 예전처럼 너그러운 남편이 되고 싶어요. 세 번째는 미래에 대한 설계를 올해 안으로 좀 구체화하고 싶어요. 예전엔 10년 뒤에 뭐할까 생각하면 뭔가 그림이 좀 그려졌는데 지금은 보이질 않아요. 대략의 계획은 있으니까 좀 더 고민해서 구체적인 실천 방법들을 세워봐야죠.”

동네 상점에 들르니 새해 달력을 건네준다. 이런저런 곳에서 받은 2017년 다이어리도 여러 권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익숙한 풍경. 숫자 하나가 바뀌는 것에 불과할 지라도, 또 다시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를 부르는 숲
인터뷰 내내 나는 한 인간의 내면에 갇힌,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요동치고 있는 강한 에너지를 안타깝게 지켜봐야만 했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또 생계를 이어가야하는 평범한 직업인으로서의 삶. 그 무게를 감당하느라 놓쳐버린 나의 ‘본연.’ 그리고 그 상실감이 불러오는 몸과 마음의 고통.

집으로 돌아오며 ‘빌 브라이슨’이 떠오른 건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3,360km의 장거리 등산코스인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단지 자신의 집 근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감행하는 남자. 먼저 결심부터 하고 이유는 나중에 어떻게든 짜 맞춰 넣는, 이 무모한 남자의 여행기는 그러나 읽는 내내 감동이었다. 

 

발로 세계를 재면 거리는 전적으로 달라진다. 1km는 머나먼 길이고, 2km는 상당한 길이며, 10km는 엄청나며, 50km는 더 이상 실감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당신이나, 당신의 얼마 안 되는 동료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어마어마하게 넓다. 지구 넓이에 대한 그런 계측은 당신만의 작은 비밀이다.
– 빌 브라이슨, <나를 부르는 숲>

500만 번의 걸음을 내디뎌야 마칠 수 있다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동네 뒷산에라도 가듯 떠났던 남자. 그리고 끝내 메인주의 가을 단풍을 보지 못한 채 무참히 막을 내린 그의 종주. 그러나 그의 여행기를 읽는 내내 내가 만난 것은 무모함과 실패가 아니라 도전과 유쾌함이었다. 

참여연대에 온 김에 회비 증액이라도 하고 가야겠다며 3층으로 올라가던 그를 바라보며 언젠간 그를 불러낼 ‘숲’ 하나를 상상해 본다. 2017년, 무모함으로 시작하여 유쾌함으로 마무리될 그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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