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04월 2006-04-01   266

립싱크의 슬픈 기억

2002년 월드컵의 악몽이 시작됐다. 한국선수들의 4강 소식은 물론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TV를 켜도 신문을 펼쳐도 인터넷에 접속해도 모두가 대한민국을 외치기 시작하니 심술이 났다.

도대체 이 나라는 국민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축구 밖에 없다는 말인가? 월드컵으로 상승한 국가 이미지가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준다는 설명도 듣기 싫었다. 그 효과는 대기업에게나 돌아가고, 대기업이 “여러분들 응원덕분입니다”라며 사회에 환원하는 것도 아니다. 당시 미선이 효순이 사건을 이야기 하는 이들은 잔칫집 가서 행패 부리는 걸인 취급을 받았다.

그렇다고 거리응원을 나가지 않았나? 그러기도 힘들었다. 사회생활은 모두 월드컵 응원전에서 이뤄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비굴한 저항은 립싱크였다. 입만 ‘대한민국’을 외쳤다.

올해는 1년 내내 립싱크를 하게 생겼다. 동계올림픽 태풍이 지나가자마자 WBC라는 허리케인이 왔다. 미국과 일본을 이기니 세계를 정복한 분위기다. 수 십 년째 미국의 눈치를 보던 정치권과 여론은 얼굴색을 바꿨다.

애국심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대기업과 언론이다. 2002년에 한몫 챙긴 그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KBS는 아시아 예선전까지 포함해 총 16억 원, MBC 9억 원, SBS 11억 원의 광고매출을 올렸다. 방송사 메인뉴스가 한동안 ‘스포츠 데스크’로 바뀐 이유도 돈 버는 뉴스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시청 앞 광장을 놓고 괜히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다.

차라리 결승에 진출하지 못해서 다행이다(미안하다. 나라걱정도 좀 하자). 이제야 최연희 성추행 사건도 나오고, 이명박 서울시장 공짜 테니스장 사용 소식도 나온다. 뉴스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야구경기 대하듯 했다면 국제사회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기가 막힌 사람들은 따로 있다. 2006 토리노 동계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이다. 방송사 메인뉴스들은 20일 폐막식 방송만 ‘예의상’ 짧게 보도했다.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이들이 시치미 뚝 떼고 우리나라의 성적이 너무 낮아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따져보자. 한국은 이번 올림픽에 한상민(27세), 이환경(33세), 박종석(39세), 이렇게 3명만 출전시켰다. 평균 나이가 33세다. 장애인 스포츠의 현실이 눈에 보인다.

아마 방송사는 국민들이 장애인 올림픽에는 관심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다.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반일감정’의 자극이다. 일본은 이번 경기에서 금메달 2개, 은메달 5개, 동메달 2개를 얻어 종합 8위를 차지했다.

무엇보다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라이브 응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억울하다. 그 경기만큼은 장애인 선수들에게 ‘대한민국~!’하고 목이 터지게 응원하고 싶었다. 팔도 뻗고, 손가락도 뻗고 응원가도 부르고 말이다.

황지희(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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