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8월 2001-08-01   1938

대체복무는 군 현대화의 결실

병영국가 타이완의 변신

타이완으로 가기 위해 이른 아침 인천공항으로 서둘러 갔으나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5시간 가량 연발이란다. 덕분에 서너 시간 정도라도 그 유명한 고궁박물관을 둘러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빗나갔다. 일주일 예정으로 타이완을 방문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첫날을 빼놓고는 일정이 너무 빡빡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타이완의 시민운동가들과 정부 관리들은 대체복무제도에 대해 한국의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중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과 30년이 넘게 지속되었던 저 끔직한 계엄령과 백색테러. 그런 타이완이 작년 7월부터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했다. 15만이 넘는 군 병력을 감축하고서.

지난 50여 년 간 징병제가 실시되고 있고, 현재 60만의 대군을 보유한 나라. 분단과 군사독재가 계속되어 온 한국 사회에서 징병제는 성역으로 남아 있다. 매년 20만이 넘는 청년들이 26개월의 군복무를 위해 청춘과 인권을 반납하고 푸른 제복을 입는다. 그리고 그 청년들 중 매년 5000명이 정신병원 신세를 지고 10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군 복무중 사망자는 자살자를 포함하여 연 평균 300여 명이 훨씬 넘는다. 우리는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매 5~6년 마다 1개 연대 병력을 잃어온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현재 1300 여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감옥 안에 갇혀 있다. 매년 새로 투옥되는 사람은 600여 명.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인권문제는 올해 초에야 뒤늦게 인권운동가들과 평화운동가들에 의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문제가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이유는 국가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우리 사회 내의 막강한 권력에 의해 ‘이단자’ 내지는 ‘또라이’로 취급되어 온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군바리’, ‘고문관’, ‘이단자’ 그리고 ‘또라이’에게도 인권은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군사주의와 폭력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2001년 2월 제주인권학술회의에서 징병제와 군사주의의 문제가 토론의 대상이 되었고, 3월에는 파주에서 징병제와 군 폭력을 주제로 한 인권운동가들과 평화운동가들의 워크숍이 열렸다. 그리고 5월에는 ‘양심·종교의 자유와 군 대체복무를 위한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2000년 벽두의 군 가산점 논쟁에서부터 최근의 부산대 여학생들의 웹진 『월장』에 대한 공격에 이르기까지 군사주의에 물든 마초들의 집단적 공격을 받았던 여성활동가들은 아주 진지하게 –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발칙하기 짝이 없게 – 징병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타이완이 작년 7월부터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한 사실은 국내 활동가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지난 3월 파주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이 제도의 도입에 결정적 역할을 한 노동운동가 출신의 입법위원(국회의원) 치엔 시치에 씨를 초청하여 이 제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또 2001년 3월 22일 『한겨레 21』 351호는 타이완 현지취재를 통해 이 제도를 국내에 소개했다. 파주회의 참가자들은 우리와 같은 병영국가였던 타이완에서 이 제도가 실시된 데 대해 비상한 흥미를 가졌다. 치엔 시치에 의원이 집행위원장으로 있는 타이완 촉진화평문교기금회는 한국의 인권 및 평화운동가들을 초청하여 한국 뺨치는 병영국가였던 타이완에서 어떻게 이 제도가 도입되었고, 또 실시되고 있는가를 직접 돌아볼 기회를 제공했다. 군대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변호해 온 변호사,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평화인권연대, 민주노동당 인권위원회, 동성애자인권연대 등의 활동가, 진보적 인터넷 언론 『대자보』 발행인, 양심적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학생, 그리고 필자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된 참관단은 7월 8일부터 일주일 간 타이완을 방문하여 이 제도의 실시현황을 직접 돌아보고, 정부관리, 입법위원, 시민운동가, 대체복무자들을 만나 의견을 들었다.

우리의 공식일정은 도착 다음날인 9일 아침 기자간담회로 시작되었다. 장소는 의원회관 귀빈실. 여의도 의사당 귀빈실은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귀빈실로서는 초라하다고 할 만큼 소박했다. 의원회관의 정문에는 한가한 표정의 경찰 한 명만이 경비를 서고 있었고, 귀빈실 창문 너머는 바로 택시들이 지나다니는 한길이었다. 타이완을 찾기 전에는 막연히 그곳도 우리 뺨치는 권위주의적인 사회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선입견은 첫날부터 조금씩 깨어지고 있었다.

타이완의 대체복무제도 추진과정

치엔 시치에 의원은 1996년 2월 처음으로 대체복무제도(당시에는 ‘사회역’이라 부름)에 관한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기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어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 제도의 도입으로 가장 혜택을 보게 될 대학생들 역시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타이완대학 학생회 등 주요 대학의 학생회들 역시 무관심한데다 학생회와 접촉하기 힘들어 몇몇 동아리를 찾아다니며 동아리 간부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국방부 또한 치엔 의원 등이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을 강력히 요구하자 병력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절대로 도입할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대답 없는 메아리와 같던 대체복무제도 도입운동에 돌파구가 뚫린 것은 1997년 7월 국방부가 『국군정실방안(國軍精實方案)』을 채택하여 군 병력의 감축과 장비의 현대화를 추진하면서부터였다. 한편 치엔 의원은 대체복무제도의 도입과 병행하여 군 복무기간의 단축을 추진했다. 군 복무기간의 단축 없이 대체복무 제도가 도입된다면 대체복무 기간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이다. 군 복무기간 단축 문제가 제기되자 젊은이들은 대체복무제에 대해 관심과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98년 7월 치엔 의원은 『타이완의 희망의 복무 – 사회역』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이 제도의 장점을 대중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만화가이기도 한 치엔 의원은 이 소책자의 삽화를 직접 그렸다.

이런 활동과 더불어 치엔 의원은 사회복지단체를 찾아다니며 이 제도를 도입하면 사회복지시설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배치될 수 있어 사회복지의 질을 급속히 향상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사회복지단체들은 처음에는 군인들이 와 봐야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라며 시큰둥했다. 그러나 치엔 의원 등이 유럽국가의 예를 들면서 대체복무제도의 장점을 끈질기게 설명함에 따라 사회복지단체들도 이 제도를 지지하게 되었고, 마침내 1998년 8월에는 20여 개 단체가 참가하는 ‘사회역민간추동연맹’이 결성되었다. 추동연맹은 1999년 2월과 3월에 세 차례 공청회를 열어 대체복무제도가 도입되면 사회복지, 환경, 그리고 원주민 복지 등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널리 선전했다.

한편 감군안 실시 이후 병력 자원에 여유가 생기면서 행정원도 대체복무제도의 실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1998년 3월 행정원 내에 전담반이 구성되었고, 8월에는 이 전담반의 핵심요원들이 치엔 의원, 국방부 고위관료 등과 함께 유럽을 방문해 여러 나라의 대체복무제도의 실시 현황을 시찰하였다. 이들은 대체복무제도의 실시가 국가의 당면이익에 부합되며, 앞으로 1년 간 이 제도의 준비를 정부의 주요 개혁방안의 하나로 추진하기로 결론지었다.

1999년 5월에는 입법원 내에 ‘초당파 사회역 추진소조’가 결성되었는데, 225명의 입법위원 중 78명이 참가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국무총리격인 행정원장은 정부가 2000년 7월부터 사회역제도의 도입을 추진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입법원 내정위원회는 또 치엔 의원 등이 제안한 현역병의 복무기간을 3개월 내지 5개월 단축하는 안을 통과시켰고, 사회역의 복무 기간도 이에 상응해 단축하기로 했다. 한편 이 무렵 사회역 추진을 위한 인터넷 홈페이지가 개설되어 많은 젊은이들이 접속해 이 제도에 대해 알게 되면서 지지의 폭을 넓혔다. 이런 여론의 지지와 병력을 줄이는 대신 군사력을 현대화하는 방안을 군부가 받아들임으로써 인해 국방부도 태도를 바꾸어 사회역 도입안에 반대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1999년 9월 21일 타이완 중부인 타이중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 발생한 이재민의 구호와 복구건설의 긴박한 요구는 대체복무제도의 실시에 힘을 보태주었다.

한국 사회에서 대체복무제도에 관한 논의가 여호와의 증인 문제를 중심으로 촉발된 것에 비해 타이완에서 여호와의 증인 등 종교적 양심범에 관한 논의는 뒤늦게 1999년 10월에 제기되었다. 타이완의 경우 여호와의 증인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하여 복역중인 사람은 당시 40여 명에 불과했다. 10월에 열린 공청회에서 이 문제에 관한 심도있는 토론이 이루어졌고, 이어 관계인사들이 국방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방부는 인권존중과 병역 형평성의 원칙에 따른 제도 개혁을 약속했다.

최근 천정배 의원 등이 추진하던 공청회가 보수적인 기독교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우울한 소식을 접하며 떠난 우리 참관단은 타이완에서 대체복무안이 추진될 때 기독교계의 반발은 없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뜻밖에도 대답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증인 총본부를 방문했을 때도 설명은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타이완의 여호와의 증인 본부에서 일하고 있는 테리 레이놀즈 씨는 이 법안이 포괄적인 하나의 인권법안으로 제안되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인들 역시 찬성했다고 말했다.

마침내 2000년 1월 15일 입법원은 「병역법 수정안」과 「체대역(대체복무) 실시조례」를 통과시켰고, 이 제도는 2000년 7월부터 시행되었다.

타이완에서는 2000년 3월 18일 총통선거가 실시되어 야당인 민진당의 첸슈이피엔(陳水扁) 후보가 당선되어 50년이 넘는 국민당의 일당 장기집권을 종식시켰다. 즉, 대체복무제도의 실시는 민진당 집권 이후이지만, 이미 국민당 통치 하에서 이 제도의 도입 방침과 법적·제도적 준비가 완료되었던 것이다. 민진당의 집권이 이 제도의 정착과 확대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국민당과 군부가 이 제도의 도입을 받아들였다는 점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주목할 만한 일이다.

타이완의 대체복무제도 현황

처음 치엔 의원과 민간단체에서 대체복무제도를 추진할 때의 명칭은 사회역(社會役)으로 사회복지, 환경보호, 의료, 교육, 외교(해외파견) 등 공익적인 요소가 중심이었으나, 정부가 이 제도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경찰역(보안경찰, 교통, 순찰, 교정)과 소방역이 포함되어 전체인원의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고, 명칭도 체대역(替代役)으로 변화되었다.

현재 1만55명(종교상의 이유로 인한 복무자 43명 제외)이 대체복무중인데 이들을 역종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경찰역 5395명 (이 중 교정역이 1760명) / 소방역 1062명 / 사회역 367명 / 환경보호역 391명 / 의료역 242명 / 교육복무역 2036명 / 건설역 272명 / 사법행정역 163명 / 토지측량역 62명 / 외교역 35명 / 경제안전역 30명

신체 등급은 현역, 체대역, 면제로 나뉘는데 현역 판정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대체복무를 원하는 사람은 체대역을 신청할 수 있다. 신청자가 많을 경우에는 추첨으로 체대역을 뽑는다. 복무 기한은 현역은 2년 2개월이고 대체복무자 중에서 신체등급상 체대역 판정을 받은 사람의 복무기한은 현역과 같지만 자원에 의해 체대역을 신청한 사람은 2개월이 긴 2년 4개월이다. 이들은 4주 간의 군사훈련을 받은 후 8주 간의 역종별 훈련을 받는다. 종교적 이유로 체대역을 신청한 사람은 4주 간의 군사훈련이 면제되는 대신 복무기간이 현역보다 7개월 긴 2년 9개월이다.

대체복무를 하는 사람들은 민간인 신분이나 사병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체대역에는 계급은 없지만, 복무기간에 따라 현역처럼 봉급이 오른다. 처음에는 이등병 월급인 5545 NT$의 월급을 받고 6개월 후 일등병 수준, 18개월 이후 복무를 마칠 때까지는 상등병 수준인 6595 NT$를 받는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 NT$가 약 40원이므로 복무연한에 따라 22만 원에서 26만 원의 월급을 지급받는다(즉, 이들의 한 달 급여가 우리나라 사병의 27개월 월급 총액과 거의 비슷하다).

타이완의 군 인권 문제

매일 한두 명 씩 젊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는 타이완의 군 인권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우리 군대는 일본군의 못된 버릇이 남아서 그렇다지만, 타이완 군대는 악명높은 국부군(國府軍)의 후신이다. 그런 타이완의 군대에서 현재 놀라운 변화가 진행중이다. 비록 군대 내의 인권 문제를 훌륭히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타이완 군대는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타이완에는 첸피에(陳碧娥)라는 군대 내의 인권문제 해결에 헌신하는 인권운동가가 있다. 이 분은 우리 참관단의 어머니들처럼 군대에 보낸 자식을 잃은 분이다. 그는 자기 본명보다는 아들의 성을 따서 후앙마마, 즉 황어머니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여느 어머니들처럼 아들을 잃기 전까지는 후앙마마 역시 평범한 어머니였다. 성격으로 보아서 절대로 자살할 사람이 아니었던 아들이 시신으로 발견되었을 때 군은 한국에서 늘 그러는 것처럼 자살이라고 통보했다. 아들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다시는 이런 불행이 없도록 하기 위해 후앙마마가 발벗고 나선 지 6년. 처음 국방부에 갔을 때 수갑을 차고 끌려나왔던 후앙마마는 지금 장병들의 인권과 관련하여 국방정책의 입안과 집행을 감독하는 권한을 가진 관병권익보장위원회의 자문위원이다. 후앙마마가 국방부장에 의해 이 기관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것은 1999년 9월, 아직 민진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기 전인 국민당 통치 시절의 일이다.

후앙마마가 활동하는 군중(軍中)인권촉진회는 군에 입대하는 장병들에게 군중인권촉진카드를 나눠 준다. 이 카드에는 상관이나 고참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면 이를 자세히 기록하고 증거를 모아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되어 있다. 이 카드를 잃어버려도 걱정할 것이 없다. 후앙마마의 전화번호는 타이완의 각 부대 막사에 군헌병대 등 폭행사건 처리를 담당하는 군의 공식기구의 전화번호와 함께 나란히 붙어 있다고 한다. 국방부에서는 아예 후앙마마에게 이런 사건 처리를 위한 전용전화를 설치해 주었다. 타이완에는 현재 군 복무중 구타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 사람이 100여 명이다. 후앙마마 등의 노력으로 식물인간이 된 사람들을 위한 요양센터가 이미 건립되었고, 내년 예산으로 한화 600억 원이 책정되었다.

물론 이런 제도가 시행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일선부대에서 후앙마마 등은 큰 벽에 부닥친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참관단으로 방문한 한국의 어머니들이 보기에는 꿈 같은 이야기이다. 타이완의 군대는 중국 본토에서 패주하여 타이완으로 쫓겨 온 국부군이다. 이들과 함께 온 이른바 외성인(外省人)들은 타이완 현지인인 본성인들에게는 점령자였다. 그리고 타이완군은 본토수복을 노리며 타이완 전체를 병참기지로 만들어 물적·인적 자원을 쥐어짰다. 타이완 군대의 고위 지휘관들은 외성인인 반면, 하급장교, 하사관, 사병들은 본성인들이었다. 이런 구조적인 요인, 즉 점령자들이 피점령자들을 동원하여 군대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타이완 군대 내에서 심각한 인권탄압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점령자들이 본토수복이라는 허황된 꿈을 버리게 됨에 따라 타이완의 민주화는 가능해졌고, 군 인권문제 개선의 가능성도 보이게 되었다.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에 이론적 기수 역할을 한 첸신민(陳新民) 교수는 대체복무가 확대된다면 군입대 예정자들에게 현역과 대체복무의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군대가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현역으로 온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하여 복무하기 때문에 군대 생활에 더 잘 적응하게 되고, 군대 역시 통제가 용이해짐에 따라 구타 등 폭력 사용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직 대체복무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이런 기대효과가 충분히 나타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지만, 타이완의 군 인권문제 개선을 위한 당당한 첫발은 내딛은 것이라 할 수 있다.(다음 호에 계속)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 베트남전진실위원회 집행위원장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