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12월 2016-11-30   558

[만남] 2016년, 다시 광장에서 – 신은경 회원

 

2016년, 다시 광장에서

신은경 회원

 

 

글.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사진. 김경희 미디어홍보팀 간사

 

 

무정부 상태를 방불케 하는 시국에도 인터뷰는 지속된다.
‘피아니스트시구요, 월요일에 덕수궁 앞에서 뵙기로 했어요.’ 불과 이틀 전 백만의 사람들이 모였던 곳, 이제는 덩그러니 비어있는 그곳에 가을비가 내린다. 물 먹은 낙엽들이 무늬처럼 박힌 거리, 그 위로 우산을 쓰고 지나는 몇몇의 사람들. 버스에서 내려 문 닫힌 덕수궁을 향해 걷는 내내, 노래 하나가 나를 따라왔다.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도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 정태춘, <92 장마, 종로에서>

 

참여사회 2016년 12월호 (통권 241호)

 

11월 12일
백만의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든 날, 그녀도 그곳에 있었다. 
“큰 아이는 친구들 하고 가고 전 남편하고 막내하고 함께 갔어요. 전철에서부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아이가 힘들어 했죠. 결국 집회 중간에 남편하고 아이는 먼저 보냈어요.”

아니, 왜 같이 안 가신 거예요?
“그런 생각을 미처 못 했네요. 그냥,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집회에 아이를 데리고 나오면서 그녀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고 했다. 내 삶의 주인은 나이고 주인이라면 스스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이 국가의 주인은 우리이기에 지금 우리가 거리에 나가는 것이라고. 
“사실 그동안 체념을 많이 했어요.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는 나라라고. 근데 지금은 오히려 박근혜하고 최순실한테 무척 감사해요. 이들이 우리에게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었구나. 이들 때문에 그동안 뒤로 빠져 있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주인이다!’ 소리치며 거리로 나온 거잖아요.”

역사가 또 하나의 ‘시민혁명’으로 기록할 것이라는 11월 12일. 그러나 그 하루 전날에도 그녀는 자신만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었다. 
“11월 11일에 참여연대 카페 통인에서 <노란리본공작소와 함께 하는 듀오 콘서트>라는 작은 공연을 열었어요. 그 자리에는 세월호 유가족 부부도 오셨었죠.”
참여연대에서의 공연이 처음은 아니었다. 올해 6월에도 그녀는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이름으로 세월호를 기억하는 콘서트를 진행했다. 
“친구와 함께 공연할 공간을 찾다가 통인카페에 우연히 차를 마시러 들어왔어요. 그땐 그곳이 참여연대인지도 몰랐는데 한쪽에 피아노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곳에서 공연이 가능하냐고 제가 먼저 물어봤죠.”

젊은 시절엔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친구가 ‘우리 사회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니?’하고 물으면 ‘아니, 무슨 문제가 있어?’ 하고 되물을 정도였다. 그러다 교정에 붙어 있는 수많은 대자보 중 하나에 시선이 꽂혔다. 변화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철거민에 관한 대자보였어요. 누군가가 자기의 집터에서 쫓겨나는, 그것도 공권력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내용이었죠.” 
이후의 일상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민족음악연구회동아리에 가입하고, 그동안 몰랐던 사회문제에 대해 공부하고, 한국근현대사에 대해서도 새롭게 배웠다. 
“지금도 그 때가 잊히지 않아요. 내가 여태까지 배운 모든 게 거짓말이라니. 철저하게 속아왔다는 거, 정말 충격이었어요, 어떻게 역사를 속일 생각을 하나….”

음악은 다른 예술 장르들과는 달리 한없이 추상적이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기에 음악가들은 자꾸 내면으로만 파고들게 된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그날 내가 본 그녀의 눈빛은 이미 그 심연의 한계점을 지나 세상을 향하고 있었다. 

 

존재, 상처, 죄책감 
“대학 졸업 후 ‘민족음악연구회’라는 곳에 참여했어요.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은 그것대로 계승하되 이 땅에 맞는 음악을 우리가 한번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모인 음악인들의 모임이죠. 거기서 남편도 만났어요.”
그러면서, 작곡을 하는 남편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저희 어렵게 살고 있어요. 왜 이렇게 기금이 모이지 않나 했는데 알고 보니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하하하”

서양클래식음악에 대해 나는 아는 게 없다. 그녀의 이력을 읽다가 ‘현재 타랑퀸텟의 피아니스트’라는 대목에서 퀸텟이 뭐지, 콰르텟의 오타인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퀸텟은 5중주, 콰르텟은 4중주). 아는 게 없는 대신 편견은 한아름이다. 클래식을 전공하려면 경제적 수준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야 할 텐데 그러면 그 세계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긴 어렵지 않나….
“그런 한계도 간과할 수는 없죠. 근데 세월호가 터졌을 때 음악인들이 뭔가 해보자면서 청계천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연 적이 있어요. 가보니 100명이 넘는 음악인이 모여 있더라구요. 감동이었어요. 음악인들은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건 나의 편견이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죠.”

그녀의 이야기엔 유독 세월호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그 까닭을 설명하며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던 상처 하나를 꺼내 놓았다.
“제겐 경계성지적장애를 가진 동생이 있어요. 비장애인인 나는 존재 자체로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거라고 오랫동안 생각해왔죠.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너에게 상처 줄 마음이 전혀 없어, 이런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냈어요. 그러다 올해 어떤 교육프로그램 하나를 듣고 나서 내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죠. 세월호 유가족들은 아파도 약을 못 먹는대요. 자신의 아이가 끔직한 고통 속에서 떠났는데 내가 어떻게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약을 먹을 수 있냐면서. 부모라는 존재가 죄책감으로만 남아있는 것, 그리고 내가 동생 앞에서 느꼈던 끝없는 죄책감, 이 두 가지가 오버랩된 것이죠. 아, 그래서 내가 이 사안에 이렇게 집착하는 거구나….”

피아노를 못 치는 이들에게 상처가 될까봐 선뜻 자신이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라는 말도 못 하고 살아왔던 지난날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씌웠던 두터운 장막을 걷어낸 지금, 그녀는 자신의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그렇게 믿는다고 말했다. 
“음악과 내가 하나가 되는 느낌이 정말 가끔 찾아와요. 그 순간엔 모든 게 사라지고 나도 관객들도 모두 음악 속에 다 같이 들어와서 함께 있어요. 그럴 땐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아요. 그게 음악가로서 느끼는 매력이죠. 모두가 하나가 되는 느낌, 음악도 사람도….”

 

 

참여사회 2016년 12월호 (통권 241호) 

11월 11일 참여연대 카페통인에서 열린 서촌 노란 리본공작소와 함께 하는 <듀오 콘서트>를 진행하는 신은경 회원.

 

 

11월 11일 
지난 11일에 있었던 <노란공작소와 함께 하는 듀오 콘서트>가 그랬다. 사람들이 그녀의 음악 안에서 함께 머물렀다. 그것은 ‘작은 기적’이었다. 
“그 공연이 음악가인 제겐 큰 힘이 되었어요. 그곳에 세월호 유가족 부부가 오셨거든요. 처음엔 굳은 표정으로 계시던 두 분이 나중에 가실 땐 정말 활짝 웃고 계셨어요. 보통은 제가 먼저 그분들을 안아드리곤 했는데 그날은 어머님이 먼저 저를 꼭 안아주셨죠. 그분들의 웃음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제가 평생 음악가로서 하고자 했던….”

순간, 그녀가 눈물을 흘린다. 잠시 내 시선도 창밖으로 돌려진다. 
“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음악은 힘이 없다, 음악가가 뭘 해, 그저 편안할 때 듣는 그런 음악, 사람들한테 그 이상의 의미를 줄 수 있겠어?’ 그랬었죠. 그날도 세월호 유가족의 슬픔이란 건 너무 깊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이분들의 가슴 속에서 뭔가 피어나는 걸 보니까 ‘나도 할 수 있구나, 정말 음악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구나.’ 그날 제 음악 인생에 기적이 일어났어요.” 

클래식은 잘 모르지만 음악이 힘이 세다는 건 나도 안다. 11월 12일, 백만이 모인 광장에서 가수 정태춘이 오래된 노래를 불렀다. ‘92 장마, 종로에서.’ 어렴풋이 가사들이 떠오르고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옆에 앉은 낯선 이도 조용히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음악은, 다 큰 어른들을 길가에 서서 이렇게 울게 한다.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훨… 훨…

 

절망을 딛고 다시 비상하라고 외치는 이 노래처럼 이제 그녀의 음악도 날아오를 준비를 한다. 
“언젠가 판문점에서 연주를 하고 싶어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곳을 음악으로 녹이고 싶어요. 휴전선을 따라서 작은 음악회를 열어가다 마지막에 판문점에서 함께 모이는 그런 음악회를 열고 싶은데, 참여연대랑 함께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삶의 의욕과 생기를 주는 것, 그녀가 음악가로서 품은 담대한 포부는 바로 이것이다. 

 

혁명
통인카페에서 있었던 한 공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광화문 광장에서 쇼팽의 <혁명>을 연주하고 싶습니다.”
조국 폴란드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이 러시아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는 소리를 듣고 쇼팽이 슬픔에 잠겨 작곡했다는 곡, <혁명>. 
“제목처럼 굉장히 강렬한 곡이에요. 그때 폴란드를 떠나 있던 쇼팽은 친구에게 자기가 음악가로서 얼마나 무력한가에 대해 편지를 써요. 제가 세월호를 보며 느낀 것과 똑같은 심정이죠.”

그러나 곧 그녀는 이와는 결이 다른 아니, 우리의 분노가 어떤 얼굴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언젠가 장일순 선생님이 혁명에 대해 쓴 글을 읽었어요. 너무 인상적이어서 휴대폰에 적어두었는데, 잠깐만요, 찾아볼게요.”
장일순에게 혁명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었다. 혁명은 새로운 삶이 전제가 되어야하는 것이기에,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그녀의 메모엔 아마도 이렇게 적혀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거리에서 싸우고 계신 세월호 유가족들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닌 대한민국 전체로 살고 있는 거예요. 비록 자신의 아이는 이제 없지만 남아 있는 다른 아이들의 안전한 삶을 위해서,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헌신을 하고 계신 거지요. 정말 대단한 분들이에요. 저분들에게 보탬이 된다면 내가 함께 해야겠다, 지금도 늘 이런 생각을 해요.”

사람들이 광화문에 모인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친다. 그 외침에 묻어있는 것은 단지 분노만이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리들의 혁명은, 그녀의 음악처럼, 무심한 시대의 흐름을 멈추게 하고, 나가 아닌 우리로서 함께 머무는, 그렇게 ‘새로운 삶’을 향한 소망까지도 모두 보듬어 안는 거대한 함성이다. 
오늘, 비가 그치고,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며, 파란 하늘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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