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6월 2010-06-01   856

동화 읽기-마음이 가닿아야 할 곳


마음이 가닿아야 할 곳

주진우 『참여사회』편집위원,

평화박물관 사무처장 난 SF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SF적 상상력은 흔히 삶의 바깥으로 뻗어나가서는 귀환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부터 지루하고 지겨운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 목적인지도 모르겠다. 변죽만 울리다 결국 정면승부를 피해 나긋나긋해지는 할리우드 영화를 싫어하는 것까지 겹쳐 SF 영화에 흥미를 느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벌써 이십년 전에 개봉했던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는 예외였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미래 사회 수백층 높이의 건물들 사이에 우중충한 분위기 속 비가 내린다. 지구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으로 다른 행성으로의 식민지 이주가 한창이다. 과학의 발전은 외견상으로는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리플리컨트(복제인간)를 낳는다. 하지만 이들 리플리컨트들도 인간처럼 감정을 갖게 되고, 여기에서 불행과 고통이 시작된다. 테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지상 최대의 로봇』에 바치는 오마주인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도 감정을 가진 로봇이 자신의 정체성에 괴로워하는 이야기가 한 축을 형성한다.

디스토피아적 미래와 인간처럼 감정을 가진 로봇이 등장하는 것에서 이 책 『로봇의 별』은 블레이드 러너와 플루토를 따른다. 다른 것 가운데 하나는 동화책이라는 것.

지금으로부터 100년 뒤 인간과 겉모습만 똑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처럼 느끼고 생각하게 된 쌍둥이 여자 아이 로봇 ‘나로’, ‘아라’, ‘네다’가 인간과 로봇, 인간과 인간의 권력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모험을 그린다.

로봇이 인간과 공존한다. 아니 인간을 위해 복무한다.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은 이들 로봇의 운명이다. ‘로봇은 인간을 해칠 수 없다.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로봇은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인간 사회도 부에 따라 엄격하게 계층이 나누어진다. 상위 계층은 하늘도시에서 최고의 복지를 누리지만, 하위 계층은 오염되고 황폐화된 지구에서 가난과 전염병에 시달린다.

로봇이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가지게 된다는 상상은 생각보다는 비현실적이지 않다. 공장 조립용 로봇과 청소 로봇에서 이젠 서비스 로봇으로 발전하고 있는 과정을 연장한다면 말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꿈이니까. 그러나 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자의식을 가진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지구와 달 사이에 있는 우주도시 라그랑주로 여행을 하려다 혼자 로봇보관소에 격리된 ‘나로’는 자신을 무시하는 경비원에게 ‘나는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에요.’라고 항의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이다. 로봇은 자기가 원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님에도 인간에겐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존재로 미움의 대상이 되고, 돈 많은 사람들에게는 필요해서 쓰지만 인격(?)을 갖출 수 없는 경멸의 대상이 된다. 로봇이 감정을 갖고 인간과 여러 관계를 공유하지만, 그들의 지위는 ‘애초부터’ 인간의 부속품인 것이다. 이것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아니, 뛰어넘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미 자기 존재를 느끼고 있는 인공지능 로봇은 이것을 뛰어넘으려 한다.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반란을 통해서 두려움의 대상으로 되는 길뿐이다. 해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나 노동자의 저항처럼 로봇의 반란은 필연적이다.

인간들은 인간과 가까운 로봇이라는 꿈을 향해 진보하다가 인간과 똑같은 로봇을 만난다. 최고의 성능은 환영하지만, 동등한 인격체로 되는 것은 불편하고 두렵다. 자신의 ‘안보’를 위해 로봇 3원칙을 만들어낸다.

아찔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우리의 미래는. 그러나 동화 속이니까 괜찮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힘껏 당겨진 고무줄이 우리 얼굴을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그 미래와 그 SF에서 느닷없이 깨어나 지금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지금 기계나 로봇은 누구인가. SF에서는 이들이 기계로 출발해 감정을 갖는 것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감정이 있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해 감정이 없는 기계로 되어야 한다. 노예나 자본주의 아래 노동자들(특히 비정규노동자들)의 다수는 감정이 있는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는다(이들은 문자로 해고통보를 받는다).

반란은 어떤가?

반란 로봇의 지도자인 우주 승강장 슈퍼컴퓨터 ‘노란 잠수함’은 인간을 적으로 규정해 전쟁을 선포한다.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강조하고 로봇만의 세계를 열 것을 선동한다. 급기야는 로봇의 권리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인간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지도자 ‘체’를 모함하여 제거한다. ‘아라’에 의해 포맷당해 파괴되기 직전 인간세계를 돈과 군사력으로 지배하는 A그룹의 피에르 회장의 뇌 속으로 들어가 공생하다 피에르 회장과 함께 파멸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반란은 필연이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다. 그 다음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다. 감정과 마음을 가지게 된 로봇은 반란을 통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기회를 얻게 된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질문이 필요한 것이다. ‘체’의 생각과 행동을 인간과의 타협을 추구하는 온건주의자의 모습으로만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체’가 ‘노란 잠수함’과 다른 것은,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왜 반란을 일으켰나, 인간들을 모두 끝장내면 과연 잘 사는 것인가. 원래 우리의 꿈은 무엇이었나.

‘네다’는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나로’와 ‘아라’가 바이러스의 도움을 받아 ‘로봇 3원칙 프로그램’을 제거하고 로봇반란에 참여하는 동안, ‘네다’는 지구의 하층민이 사는 지역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면서 살아간다. 그는 ‘로봇 3원칙 프로그램’을 제거하지 않았음에도 ‘금기’인 피에르 회장(인간)을 죽인다. 자신이 소중히 생각하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결국 현실에서 남의 도움을 받아서 인위적으로 제거해야만 하는 ‘로봇 3원칙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없다. ‘마음’이 가닿아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놓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올바르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본격 SF 동화라는 상찬보다 필요한 것은, 우리 삶으로 귀환한 이 SF가 우리 삶을 불편하게 만들도록 내버려두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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