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03월 2006-03-01   1056

폐허의 땅, 아프가니스탄의 운명

아프가니스탄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9·11테러 이후 긴 수염의 ‘오사마 빈 라덴’ 이나 터번을 두른 시커먼 얼굴의 ‘물라 오마르’를 기억할 것이다. 혹시 실베스터 스틸론을 좋아했다면 1988년 영화 ‘람보3’에서 아프가니스탄의 해방군 무자헤딘을 이끌고 소련의 기갑사단에 돌진하는 람보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혹 더 오래 전 개봉된 숀 코너리 주연의 ‘왕이 되려는 한 사나이’를 떠올린다면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또 어떤 사람의 기억에는 2001년 바미안 대불이 폭파되는 장면이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한 나라의 수도라기에 너무도 남루한 카불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은 파키스탄 페샤와르와 함께 간다라 지방에 속해 있었다. 이곳은 고도가 높아(해발 1,800m) 여름에도 시원하기 때문에 휴양지로 유명했다. 지금은 한랭 건조한 스텝지역이라 물이 많지 않지만 옛날 지도를 보면 많은 호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쾌적한 습도와 기온을 유지했던 듯 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카불은 아주 괜찮은 도시였다. 그러나 79년부터 23년 간 전쟁을 치른 아프가니스탄은 지금 모든 지역이 ‘폐허’라는 단어로도 부족할 만큼 혹독하게 부서져 있다.

2002년 개발구호활동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실감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바라본 카불공항 활주로에는 부서진 비행기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시골 기차역 같은 공항건물과 성한 데 없이 깨진 유리창이 눈에 띄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비행기의 잔해들을 모아놓은 ‘비행기 묘지’가 1km 가량 도열해 있었다. 중앙아시아지역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듯이 아프가니스탄 사람들도 흙집을 짓고 산다. 그러나 집들은 포격으로 무너져 마치 공상과학영화 속의 폐허가 된 어떤 행성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카불의 건물 절반이 무너져 내렸고, 벽은 총탄자국으로 곰보가 되어 1년 전 치열했던 교전의 흔적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파괴된 카불은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에 너무도 초라했다.

동서양의 ‘복도’에는 전화(戰火)가 꺼질 새 없고

사방에서 온 길이 모였다가 다시 퍼져 나가는 원형 로터리인 회전교차로. 아프가니스탄은 가히 동서문화의 회전교차로라 할 만한 지역이다. 로마와 그리스, 중동의 문물이 동방으로 넘어가려면 중앙아시아와 인도 평원, 파미르고원이 만나는 아프간을 거쳐야 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을 ‘정복자의 대로’라고 불렀다. 불교와 헬레니즘, 아랍문화가 뒤섞여 꽃피운 찬란한 문화는 또한 이 길을 ‘문명이 오가는 대로’가 되게 하였다.

이렇게 아프간은 동서양의 문명, 아시아와 유럽의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복도(회랑)국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국가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침략과 정복전쟁을 벌여왔고, 그로 인해 문화와 종족이 섞이며 아프가니스탄 역사를 만들어 왔다. 현재는 아리안계의 파슈툰족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19세기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영국이 이곳을 넘보고 3차례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지만 실패하였다. 1964년 자히르샤 왕이 자유선거를 포함한 민주화를 부분적으로 시도했다. 그러나 사촌인 모하메드 다우드 칸은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어 1973년부터 78년까지 통치하였다. 78년 아프간 인민당이 소련의 힘을 업고 공산주의에 입각한 개혁을 단행하자 수많은 종교, 정치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성전이 일어났다. 79년 하피줄라 아민이 정권을 잡았지만 소련의 간섭을 거부한 결과 10년에 걸친 소련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200~300만 명에 이르는 국내 난민이 발생했다. 소련에 대항하는 독립운동군 무자헤딘이 미국을 비롯한 소위 자유진영으로부터 무기와 군사훈련 등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결과 89년 소련군대가 철수했다. 100~200만 명의 아프간인과 1만4,500명의 소련군인이 희생된 채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소련이라는 하나의 적을 향해 온 아프간인이 단결해 대항할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종족별 정당과 무자헤딘 간의 대립이 극심해져 급기야 내전으로 치달으면서 대소항전 때보다 훨씬 더 참혹한 살육전이 벌어진 것이다. 미국은 파키스탄 정보국을 통해 아프간 내전에 간여했다. 아프간 국민들은 더 극심한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난국에서 아프간을 구할 위대한 혁명군이 나타났다. 94년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 변경의 파키스탄 난민촌에서 이슬람학교 학생혁명군인 탈레반이 출현한 것이다. 타락한 무자헤딘을 몰아내겠다는 탈레반에게 국민들은 높은 지지를 보냈다. 국민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그토록 일사분란하게 군벌과 파당을 평정하면서 2~3년 만에 전

국토를 장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혁명군 탈레반은 혁명을 완수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정통이슬람 문화보다 칸다하르 지방의 보수적인 지역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세계사의 흐름에 능통하지 못했다. 그들의 잔혹한 정책은 사회주의 혁명이 거쳐야 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과정을 연상시켰고 과거 어느 때보다 심한 공포정치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갔다. 결국 9·11의 희생양을 찾고 있던 미국의 공격으로 23년 간의 지긋지긋한 전쟁 상태는 막을 내렸다.

유엔과 국제NGO의 전후복구활동

미국을 싫어하는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아프간을 폐허로 만든 주범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23년 간의 대소항쟁과 내전 과정에서 아프간은 이미 완전히 폐허가 되어있었다. 미국의 폭격이 엄청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피해는 이전에 비해 오히려 적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프간의 많은 사람들은 미국을 신뢰하지 않지만, 고통스러운 내전을 끝내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전쟁이 끝나고 5년이 흐른 지금 아프가니스탄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사회기반시설의 복구가 시급한 일이다. 2002년만 해도 카불 시내를 제외하곤 포장된 아스팔트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다. 특히 마자르 이 샤리프나 칸다하르, 헤라트 등으로 가는 유일한 산업도로는 엄청난 폭격으로 온통 구멍이 뚫려 차라리 없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될 정도. 도로의 파괴는 단순히 물자수송망과 교통망의 파괴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앙의 통제력이 파괴된 것을 의미한다. 붕괴된 정부의 통치시스템도 하루 빨리 복구되어야 한다.

23년 간의 전쟁으로 수많은 출중한 인재들이 전쟁통에 죽었거나 해외로 피난하여 난민생활을 해야 했다. 정국이 차츰 안정되면서 이들은 조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해외에서 돈도 좀 모으고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들에게 아프간은 할 일은 많지만 일할 조건이 아무 것도 되어 있지 않은 곳이다. 유엔과 세계의 지원이 들어오고 있지만 이들을 상대할 영어가 유창한 사람들은 월급 50~70달러인 공무원 생활 대신 유엔 기구나 NGO 현지 직원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유엔 기구와 NGO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인재들을 데려가 정부에는 똑똑하고 쓸 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고 한 정부 인사는 한탄했다.

유엔이나 세계 여러 나라의 지원이 점차 늘어나고 있고 힘든 오지에까지 들어가 열심히 활

동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일을 하는 이들이 그 일들을 모두 완벽하게 처리하기를 기대하기는 무리다. 예를 들어 10만 명의 칸다하르 난민촌의 긴급구호활동을 위해 구비한 그들의 난민 리스트는 실제 인원보다 30~50% 부풀려져 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 소속 직원들이 현지상황에 맞게 훈련되어 있지 않고 관료적인 측면도 있지만 난민 현황을 정확하게 조사하기에는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 부도덕한 난민촌장들이 더 많은 구호물자를 배급받기 위해 부풀려 제시한 숫자만 믿고 구호물자가 분배되고, 이것들은 곧바로 시장에 흘러나간다. 어제 분배한 물건들이 상표도 떼지 않은 채 시장에 나타나면 담당자의 눈은 뒤집어진다. 구호는 필요한 사람에게, 적당한 때, 적절한 물건을, 적절하게 분배하는 것이 관건인데 아프간의 경우 보다 세심한 준비가 요구되는 현실이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필자 유정길 님은, 한국불교환경교육원(현 에코붓다)에서 약 12년(1999년-2002년) 간 실무를 책임지며 환경운동, 생명운동에 참여해왔다. 에코붓다가 속해있는 공동체 ‘정토회’는 매 1000일마다 모든 활동가들이 직책에서 자동해임되고 단 1회 연임할 수 있는 내부 방침이 있어, 2002년 1월 정토회 공양간에서 9개월 간공양간바라지 일을 했다. 또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의 긴급 개발구호 활동을 위해 2002년 10월부터 3년 여 기간 아프가니스탄에서 칸다하르 난민캠프 구호개발사업과 카불 북쪽 사카르다라 마을개발, 바미안주 전체 학교교육지원 등의 활동을 마치고 2005년 7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유정길 전 한국JTS 카불지원팀장, 현 에코붓다 대표, 평화재단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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