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03월 2014-02-28   1828

[특집] 아무나 당신이 한 일을 알 수 있다

특집 정보인권

참여사회 2014-03월호

 

 

아무나 당신이 한 일을
알 수 있다

 

황지희 현대도시여성

 

 

노고산동에 사는 도만준 씨는 며칠 전 옆집 여자와 크게 싸웠다. 아파트의 방음이 부실해서인지 그 여자가 몇 시에 잠들고, 어떤 TV 프로그램을 즐겨보는지 짐작 할 수 있을 정도로 생활 소음이 다 들렸다. 한밤중에는 소음을 낮춰달라고 몇 차례 요청을 했으나 안하무인이었다. 경찰에 몇 차례 신고도 했으나 ‘원만하게 협의하라’는 형식적인 답변 뿐,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 도만준을 화나게 만든 것은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그 여자의 어처구니없는 태도였다. 

 

도만준은 결국 복수를 결심했다. 그 여자를 힘들게 만들고 싶었다. 목적은 그것 뿐이었다. 시작은 그랬다. 

옆집이라 자택 주소를 이미 알고 있으니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우편함에 있는 각종 고지서와 택배 송장의 사진을 몰래 찍어둔 후 그 정보들을 조합해 이름과 휴대전화번호의 일부를 알아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천송희였다. 다음은 쉽다. 이제 인터넷을 열심히 뒤지면 된다. 세 시간 검색 끝에 천송희가 SNS에서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을 찾아냈다. 스물 아홉 번째 생일이라고 한다. 이제 주민번호 앞자리까지 알아낸 것이다. 

 

참여사회 2014-03월호

 

별의별 상상이 다 들었다. 천송희 이름으로 성인 사이트에 가입해서 스팸 메일이 쏟아지게 만들거나, SNS에 천송희의 개인정보와 그의 만행을 알려 네티즌들에게 호되게 당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도만준은 이 상상을 실현에 옮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주민번호 뒷자리까지 알아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옆집 여자에 대한 정보를 상세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범죄자가 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기분을 전환하려 TV를 틀었다가 도만준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TV 시사 프로그램에서 생년월일만 알면 몇십 분 안에 주민번호 전체를 알아내고, 그 정보를 이용해 주민등록증은 물론이고 신용카드 복제까지 가능하다는 걸 재현하고 있었다. 천송희의 생일을 알아냈을 뿐인데, 마음만 먹으면 천송희의 신용카드까지 만들 수 있다고? 천송희의 주민등록번호는 마치 상품에 찍힌 바코드 같았다. 태어나면서 국가가 우리 몸에 이미 찍어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도만준은 더 나쁜 상상도 가능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과연 범죄자가 신용카드 사기에만 개인정보를 이용할까? 인터넷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흔적, 각종 기업에 제공한 정보에 주민번호만 조합하면, 사기, 협박, 유괴 그 모든 게 가능하지 않겠는가? 스팸 메일과 보이스 피싱을 통해 금전 사기를 치는 정도는 단순한 경범죄로 분류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자정 뉴스에는 금융당국이 1억여 건의 고객 개인정보를 유출한 카드사에 3개월 영업정지와 60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도만준의 귀에는 1억여 건의 범죄를 600만 원으로 덮었다는 소리로 들렸다. 13자리의 숫자는 단순한 주민번호가 아니라 악마의 유혹이었다. 판도라의 상자임을 애써 덮거나 무감각해졌을 뿐이다. 더구나 세상이 변했다. 과거에는 주민등록증을 훔치지 않는 이상 힘들었던 일이, 인터넷 세상에선 클릭 몇 번만 하면, 누구의 어떤 상자도 열 수 있다.  

 

도만준은 결국 천송희를 포기했다. 천송희가 도만준에게 복수를 하는데도 몇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도만준은 이사를 택했다. 그리고 SNS를 탈퇴했다. 가끔 운영하던 블로그도 모두 삭제했다. 안전을 위해 방문을 잠그고 잠들 듯,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는 것 말고는 내 안전을 위해 도만준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지희 현대도시여성
전 참여사회 기자. 현재 모 출판사 마케터로 근무 중. 나라 걱정을 겸업하고 있으며, 독자를 위해 모든 영화를 포기하고 소처럼 일할 각오가 되어 있는 현대 도시 여성.

 

 

2014. 3월호 특집 – 정보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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