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9월 2011-09-02   2277

안건모의 사는 이야기-언제까지 그렇게 남에게 머리 지배당하고 살래?

 

언제까지 그렇게

남에게 머리 지배당하고 살래?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

  “우치야, 주민번호가 590×××-123○○○○ 이게 맞냐?”

  얼마 전에 <작은책>을 구독 신청한 전우치라는 친구한테 문자롤 보냈다. <작은책>은 다달이 3,000원씩 빠져 나가는 CMS방식이다. 이 돈을 인출하려면 주민번호와 계좌번호가 있어야 하는데 주민번호가 틀려서 인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자를 보내자마자  전화가 왔다. 그런데 이상한 말을 한다.

  “야, 건모야. 그거 1년 치 한 번에 내면 안 되냐?”

  “왜? 그냥 주민번호만 알려 주면 되는데?”

  “아니, 한 번에 내면 편한 거 아냐? 나한테 세무서에서 조사가 나올지도 모르고…….”
1년 치 구독료를 한 번에 내겠다는 말이다. 물론 그래도 된다. 하지만 그 뒷말이 이상했다. 세무서에서 조사가 나와? 이게 무슨 소리지? 신용불량자인가? 별 생각이 다 들어 꼬치꼬치 물었다. 알고 보니 <작은책>이 불온한 책이라 정부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돌아버리겠다.

  전우치는 군대 동기다. 지난 달 갑자기 동기들한테 전화가 와서 오랜만에 부부 동반으로 다섯 쌍의 부부가 만났다. 전우치, 신상품, 권사진, 김대문, 그리고 나까지 해서 모두 열 명이었다.

  내가 군대에 들어간 해는 1979년 7월 19일이었다. 훈련소에서 4주 훈련을 마치고 진해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을 때 10?26이 터져 박정희가 죽었다. 내가 자대를 들어갔을 때 12?12사태가 터졌다. 내가 들어간 부대는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부대였다. 나는 거여동에 있었던 ‘○○공사’라는 자대를 들어가자마자 실탄이 든 총을 지급받고 나갔다. 무척 추운 날이었다. 우리 바로 앞에 공수부대가 있었는데 그 공수부대원들이 우리 부대로 넘어 오면 총을 쏘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정병주 특전사령관인지 하는 사람을 우리 부대로 끌고 들어왔다고 했다. 우리는 야전잠바도 안 입고 나가 밤새 참호에서 덜덜 떨면서 총을 겨누고 있었지만 그 공수부대원들이 넘어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80년 광주항쟁을 부대에서 맞이했다. 물론 그 당시는 광주폭동, 광주사태라고 배웠다. 이른바 ‘80년의 봄’이었다. 그때 만난 동기들이 신상품, 전우치, 권사진, 김대문이었다. 그 당시 우리 부대는 고참들이 곡괭이 자루로 ‘빳따’를 때리는 살벌한 부대였다. 나는 열두 살 때부터 사회생활을 해서 눈치가 빨랐고, 축구도 그런대로 하고, 기타도 좀 치고, 바둑, 장기를 잘 두는 등 잡기에 능해 고참들한테 많이 맞지는 않았는데 전우치는 고문관으로 찍혀 틈만 나면 괴롭힘을 당했다. 우리는 서로 잘못을 감춰 주고 끈끈한 우정을 쌓아 나갔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빠졌나? 각설하고.

  80년 광주항쟁. 우리 동기들은 그 부대에서 광주로 차출을 나갔다. 운전면허도 없었고 특별한 재주가 없었던 나만 부대에 머물고 있었다. 광주를 갔다 온 고참들과 동기들은 간간히 공수부대원들이 여자들의 젖가슴까지 찢어 죽였다는 등의 만행을 전했지만 ‘반공의식이 투철’한 젊은이들이었다. 아무렴, 보안부대를 들어올 정도면 사돈의 팔촌까지 성향을 조사한다는데 어디 올바른 의식이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나 또한 어릴 때부터 이승복 어린이가 공산당에게 입을 찢겨 죽었다는 걸 철저히 믿을 정도로 반공 사상에 세뇌돼 있던 인간이었다.

  광주항쟁이 피로 진압되고 세상은 조용해졌다. 우리는 세상을 몰랐다. 우리 부대에 들어오는 신문은 조선일보뿐이었다. 그 신문은 온통 ‘인간 전두환’을 찬양하는 기사뿐이었다. “육사의 혼이 키워 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 “이해 관계 얽매이지 않고 남에게 주기 좋아하는 성격”,  “사에 앞서 공, 나보다 국가 앞세워”, 이런 기사들을 보면서 전두환을 훌륭한 사람으로 착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부대는 알량한 끗발도 있었다. 첫 휴가를 나갔을 때 길거리에 공수부대원들이 총을 들고 눈을 부라리고 있었지만, 머리가 긴 우리 보안부대원들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우리는 제대할 때까지 전두환, 노태우, 박병준을 사령관으로 차례차례 모셨다(?).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거쳐 가는 곳이 우리 부대였다. 나도 우리 동기들도 보안부대에 근무한다는 알량한 자부심이 있었다.

  나는 제대하고 난 뒤 버스를 운전할 때 현장에서, 책에서 세상을 배웠다. 자본가들이 우리 임금을 착취하는 걸 몸으로 경험하고 내가 겪었던 광주사태가 광주항쟁이라는 걸 책에서 배웠다.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가 희대의 살인마라는 걸 깨달았다. 친일파의 역사를 알았고, 자본주의의 역사를 배웠다. 그리고 나는 서민을 위하는 정당에 가입했고, 전태일열사기념사업회, 참여연대 같은 시민?사회단체 열댓 군데에 회비를 냈고, 부산 영도조선소 김진숙 씨를 응원하는 희망버스를 타러 다녔고, 작은 출판사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소식을 알려 주는 ‘기자’가 됐다.

  내 군대 동기들은 어떨까. 그날 만난 내 동기들은 잘살고 있었다. 아내가 말했다.

  “군대 동기들은 성공했나 봐.”

  동기들은 비싼 차, 에쿠스와 다이너스티 같은 차를 끌고 왔다. 건네주는 명함들을 보니 부장, 상무, 대표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그 가운데 키가 가장 작은 권사진은 우리가 있었던 부대에서 제대를 하지 않고 말뚝을 박아 기무사로 바뀐 그 부대에서 행정과장을 하고 있었다. 내년에 정년 퇴임을 하면 평생 먹고 살 연금이 나온다고 했다.

  그날 나는 그 동기들한테 <작은책>을 구독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기무사 행정과장인 권사진은 빨갱이 책이라고 구독을 하지 않았다. 다른 동기들은 술에 취한 채 구독 신청서에 주소와, 주민번호와 계좌번호를 적었다. 그런데 전우치가 술을 깨고 나니 <작은책>을 구독하면 이 정권에서 조사 나오거나 하는 무슨 불이익이 올 수 있다고 걱정이 됐던 것이다.

  군사 독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재벌 독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재벌 독재는 군사 독재 대신에 우리 머리를 지배하고 대중의 생각을 주무르고 있다. 희망버스를 절망버스라고 하고, 무상급식을 하면 세금 폭탄을 맞는다고 하고, 4대강을 파헤치면서 개발이라고 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면서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그 동기들은 머리를 남에게 지배당하는 불행한 삶을 산다는 걸 모르고 있을까? 야들아, 그렇게 살면 행복하니? 제발 <작은책>이나 <참여사회> 같은 책을 좀 보고 세상을 좀 배우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라. 언제까지 그 동굴 속에서 살고 있을래. 오호 통제라!
언제까지 동굴 속에서 살고 있을래? 야들아 그렇게 살면 행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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