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02월 2006-02-01   372

배고픈 겨울방학

아이들이 방학중이다. 방학이면 주부들은 집에서 아이들과 하루종일 씨름하느라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나는 그렇지가 않다. 방학에도 아이가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특기적성교육 시범학교로 지정돼 있는 농촌의 조그만 초등학교라 방학중에도 외국어와 예능을 위주로 특기적성 교육이 실시된다. 게다가 피아노 학원에도 가기 때문에 아이는 늘 바쁘다. 썰매장, 공연장, 미술관, 박물관 같은 평소에 잘 가지 못하는 색다른 장소에 함께 놀러 가려면 달력을 한참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니 날마다 영어, 수학을 공부하는 학원까지 다니는 다른 아이들은 방학이 얼마나 분주할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올 겨울방학부터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 도서 도우미 몇이 뜻을 모아 특기적성교육이 실시되는 기간만이라도 도서실을 열기로 했다. 각자 신청한 특기적성교육 시간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기 때문에 중간에 비는 시간을 보낼 데가 마땅치 않던 아이들은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틈 날 때마다 도서실로 달려온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책에 빠져든 아이들을 바라보면 흐뭇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아이들 손에 들린 책이 십중팔구 만화책인 걸 확인하면 한숨이 나온다. 얼마 전 양평에 새로 지은 어린이도서관에 갔을 때도 잘 꾸며진 열람실에 앉아 책에 몰두해 있던 아이들의 손에는 거의 대부분 만화책이 들려있었다. 만화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문제는 편식이다. 아이들은 글 책은 외면하고 만화책만 보려든다. 시설만 잘 갖춰놓고 손놓고 있으면 안 되겠다. 적절한 독서지도가 필수적이다.

도서실에 있어보니 점심을 제 때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은 것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의 특기적성교육이 모두 끝나면 학원으로 향한다. 밥 때를 훌쩍 넘긴 시간이다. 집도 멀고, 데리러 와줄 사람도 없는 대개의 아이들은 구멍가게에서 가느다란 소시지나 과자를 사 먹고 허기를 달랜다. 점심을 싸 와도 펴놓고 먹을 곳이 마땅치 않다.

일주일에 한 두 번 도서실을 지키는 나도 점심이 고민거리다. 굶고 있는 아이들 눈치를 보며 혼자 주섬주섬 먹는 일, 엄마와 함께 도서실에서 점심을 때울 수밖에 없는 내 아이 손에만 먹을 것을 쥐어주는 일이 꼭 범죄행위 같다. ‘도서실에서 음료와 다과를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또박또박 씌어있는 안내판까지 나를 위축시킨다. 인생이란 것을 살아볼수록 ‘절대’라고 단정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몇 가지나 될지 자신이 없어진다. 교육 현장만큼 ‘절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곳도 없을 것이다.

집에서 간단한 음식을 싸오는 아이들이 하나 둘 생겼다. 도서실에서는 먹을 수 없다는 소리를 못하겠다. 도서실을 운영하는 어른에게는 허용되고, 이용하는 아이들은 안 된다고 어떻게 말하나. 다른 교실에 가서 먹으라는 소리도 못하겠다. 잘못해서 아이들이 음식물 찌꺼기라도 흘리고 가게 되면 나중에 어떤 소리가 나올지 난감하다.

결식아동은 먹을 게 없어서,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배우고 익히느라 시간이 없어서 배고픈 방학이다. 쌀 소비량이 급감하는 것이 다 이유가 있다. 먹는 일이 언제나 가장 중요한 일이 될 수는 없겠지만, 뭐 그리 대단한 일이 있다고 아잇적부터 밥도 못 찾아먹고 허둥대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고진하 (참여사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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